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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웠습니다. 내복을 두 개나 입고 등산양말을 신고 털신을 신었는데도 서울역 광장에 서 있는 동안 몸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명절 연휴의 시작, 남쪽으로 내려가는 귀성열차에 몸을 실었어야 할 나는 광장에 서 있었습니다. 고향집에 가려고 짐 보따리를 챙겨 나온 친구와 함께. 나는, 우리는 왜 그곳에 서 있었을까요.

 

어디 소속이에요? 일반시민인데요

 

지난 수요일, 용산역에 갔었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사람이 불타죽는 게 말이 되나요? 이 추위에, 살던 곳을 빼앗긴 사람들을 폭도로 내몰다니 제 정신인가요? 가만 있으면 안 되겠단 생각에 문자를 보냈어요. 용산역 갈래? 그래. 가자.

 

수많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지만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지 몰라 눈치를 살폈지요. 지난해 5월을 생각하고 무릎담요를 챙겨나간 나는 살짝 민망했습니다. 빽빽하게 막아선 경찰들을 피해 이리저리 귀동냥을 하니, 명동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따라갔습니다. 화려한 명동거리에서 경찰과 마주하고 섰을 때, 누군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소속이에요?"

"일반시민인데요."

"대학생이에요?"

"아니요. 직장인인데요."

 

나는 말 그대로 일반시민입니다. 대학시절 집회에 나간 적은 있지만 소위 말하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가끔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리지만 ‘기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도심 한복판에서 ‘살인정권 물러가라’ ‘철거민이 죽을죄냐’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가 신기하긴 했나 봅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눈물 흘리는 내 앞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더군요. 깃발도 없이, 무리도 없이 서 있는 내 모습이 ‘그림이 될 만하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나는 카메라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 미친 살인정권에 분노한 ‘일반시민’이 있다는 걸,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명절선물과 청약적금

 

지난해 나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광장에 선 내 손에는 처음 받은 명절선물이 들려있었습니다. 스물아홉, 지방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 취직한 ‘촌년’이면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풋내기’입니다. 이런 나에게는 청약적금통장이 있습니다. 은행에 다니는 친구가 ‘직장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며 권한 상품이었습니다. 일찍 넣을수록 유리하다는 조언을 받고 만든 적금 통장입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왜 그 적금을 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연봉을 많이 주는 대기업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서울특별시에서 ‘내 집’을, 그것도 ‘아파트’를 가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서울시가 열을 올리고 있는 뉴타운 건설이 남 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겠지요.

 

이 땅의 부모들이 자식교육에 사활을 거는 것은 ‘내 자식은 나와 다르게 키우겠다’는 굳은 결심과 ‘내 자식은 비정규직이 안 되겠지’라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대다수 대학생들이 자신을 ‘미래의 노동자’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나 역시 부모님의 자발적 희생과 믿음 속에서 자라나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정규직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중에는 임용고사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기업이나 연봉이 높은 직장을 다니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불안합니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나이만 먹을까봐 두렵고, 여자라서 승진에서 밀릴까봐 두렵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개인의 문제일까요? ‘실력이 있으면 살아남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 말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조언이 아니라,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협박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먼저 때렸잖아요

 

가진 자의 탐욕 속에 무너지는 삶을 보라

언제까지 저들의 배를 불려야 하는가

신자유주의의 폭풍 앞에 내몰리는 삶을 보라

언제쯤이 되어야 저들은 만족 하는가

반격!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반격! 점점 더 빼앗기고 있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반격!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반격! 점점 더 빼앗기고 있는 우리의 피땀을 위해

 

-꽃다지, <반격> 중에서

 

이날 집회에서 제목도 모르는 이 노래를 처음 들으며 코끝이 찡했습니다. 화염병을 던진 사람들을 폭도라고 욕하기 전에, 그 사람들이 왜 망루를 짓고 올라갔고 왜 화염병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열사’라 불리는 이들은 처음부터 ‘전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일반시민’이었습니다. 전세금을 빼고 빚을 얻어 장사하던 터전을 빼앗겠다고 하니, 말 그대로 ‘되받아 공격’한 것 아닌가요? 그들은 몰리고 몰리다보니 최후의 수단을 택한 것입니다.

 

진행자 멘트 중 “짓밟힌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자”는 말을 듣는 순간, 전날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일이 서툴고 잘 모른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무시를 당한다는 친구는 “나도 살아남아서 (내 밑에 들어오는 누군가에게) 더 혹독하게 해주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수긍할 수 없는 이유와 방식으로 매를 맞다보니 내가 맞는 것은 허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맷집을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 분노는 나를 성장하게 하는 동력이 아닐 뿐더러, 나를 때린 이에게로 향하는 것도 아닙니다. 친구가 힘을 가지게 된다면 내재돼 있던 분노는 나보다 약한 이에게 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더 쉬우니까요.

 

나도 엇비슷한 경험을 있습니다. 최근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나는 스스로를 ‘서울에서 뿌리 내리고 살아온 강남 부자’라고 칭하는 집주인으로부터 온갖 하대를 당했습니다. 부동산 비용을 아껴보려고 아는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했더니 집주인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의심이 많더니 끝까지 일방적이다’며 귀찮아하더군요. 계약 당시 이것저것 따져 물은 것이 자신을 ‘사기꾼’으로 모는 무례한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통화를 할 때마다 그분은 점점 더 나를 무시했고, 멋대로 약속 시간을 어겼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맞다보면 ‘치사하고 더러워서’라도 내 집을 갖겠다는 악다구니가 생길 법도 합니다. 내가 만약 건물주가 된다면, 이때의 설움을 되새기며 세입자를 배려하게 될까요? 

 

친구들아, 춤추며 싸우자

 

한 강연회에서 들은 하종강 선생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성장한 세대는 보수화, 경직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다시 진보와 변화의 움직임이 생긴다.”

 

10대 친구들의 자유로움과 재기발랄함은 지난해 광화문을 뒤덮은 촛불 행렬에서 익히 경험했습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자리를 즐기기 못했습니다. 내 주변 친구들도 엇비슷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2000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학생 운동권은 분열과 혼란으로 시들해가고 있었습니다. 6월 항쟁을 몸으로 겪은 세대와 거리가 멉니다. 동시에 인터넷이나 휴대폰, UCC가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친구들과도 문화적 거리가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나와 내 친구들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안고 직장인이 되었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23일 나는 친구와 촛불을 들었습니다. 나를 광장에 서게 한 것은 21세기 선진국을 자임하면서 도심 한 복판에서 사람을 죽어나게 만든 살인정권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개발에 열을 올리면서 땅과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불에 탄 시신을 가족이 보기도 전에 멋대로 파헤친 미친 정권을 두고 보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이었습니다. 이런 나를 북돋아 준 것은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김선우 시인의 칼럼이었습니다.

 

"모두 레지스탕스가 되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멋지지 않은가. 큰 나무만 있어서는 숲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소박한 주체들의 꿈, 문화적 파르티잔, 일상의 파르티잔으로!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 춤추면서 싸우자. 현실이 비관적일수록 의지로 낙관하자. 꿈을 잃으면 다 잃는다." -1월 20일자 한겨레 칼럼, ‘춤추며 싸우자’ 중에서

 

집회에 오기 전 경찰로부터 “그곳에 가지 마라”고 협박당했다는 유가족들, 이제 미망인이 되어버린 그분들은 한결같이 “추운 날씨에 모여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고마워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냥 여기 서 있을 뿐인데 무엇이 고맙다는 말인지요. 그래요. 그분들의 감사는 나 개인이 아닌, 거기 모인 ‘우리’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민중이었습니다. 내 것이 아닌 줄 알았던 ‘민중’ ‘투쟁’ ‘반격’이란 말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촛불을 든 팔이 춤추듯 팔랑일 무렵 집회는 끝이 났습니다. 나와 친구는 추위에 떨면서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 맞춰 어깨춤을 추었습니다. 친구는 31일 청계광장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머나먼 남쪽나라, 귀성길에 올랐습니다.

 

나는 ‘일반시민’입니다. 내 친구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친구들, 31일에는 광장으로 나오지 않을래요? 영화를 보듯, 공연을 즐기듯 아무렇지 않게 약속을 잡고 싶습니다. 그보다 절박한 문제인 걸 알고 있지만, 가볍고 즐겁게 권하고 싶습니다. 청계광장에서 만나지 않을래? 촛불을 들지 않을래? 함께 춤추지 않을래? 우리는 빼앗기보다 빼앗기기 쉬운 이들이잖아. 그러니, 우리, 만나지 않을래?

 

7년 후, 명계남 씨에게 

안녕하세요, 명계남 씨.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죠. 저 역시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2002년 대구에서 진행된 한 강연회에서 “요즘 대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냐고”고 물으셨지요. 그 말이 맴돌아 ‘오마이뉴스’에 썼던 기사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을 ‘명계남 아저씨’가 아니라 ‘명계남 씨’라고 부르네요. 그리고  이제 저는 대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입니다. ‘월급생활자’가 되면 어른이 될 거라 기대는 열아홉에서 스물이 되면 어른이 된다는 믿음만큼 헛된 것이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빠진다는 것, 게을러진다는 것, 모른 척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대학생들 무슨 생각하고 사냐구요?”라는 글을 썼던 때가 떠오릅니다. 당시 제 글에는 따뜻한 격려의 댓글도 많았지만, “자네는 아직도 새까맣게 멀었다” “노가다 한 달만 하면 세상을 알게 된다”는 댓글도 있었지요. 그런 악플에 상처받았던 저는 그런 말에는 신경 쓰지 않는 맷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이만 먹은 게 아니라 그분들의 ‘충고’ 대로 시급 3300원 서빙 아르바이트를 해봤고, 막막한 취업준비 기간을 내 방식대로 건너왔기 때문이겠죠.

 

그 글을 쓰게 된 것은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바쁜 어른들이, 기득권에 편입하기 위해 아등바등 하는 어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냐. 그래서 대학생들이 중요하다고 하다”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부산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디고 서원>의 허아람 선생도 최근 비슷한 말을 하셨더군요.

 

대학생들아, 너희들은 왜 데모하지 않느냐? 혁명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왜 데모하지 않느냐? 연대와 참여 없는 지성이 부끄러워 나는 그것이 견딜 수가 없다. (중략) 너희보다 많이 가진 자가 어디 있느냐? 대한민국 학벌위주 서열경쟁에서 살아남은 승자가 아니냐. (중략)

 

이제 힘 제대로 쓰고 제대로 공부하고 산다는 게 뭔지 답할 수 있는 모험추구 자아탐구를 해야 할 때 아니냐. (중략) 부끄럽다. 너무 부끄럽다. 나는 그런 게 치욕이고 국치라 생각한다. 제대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스펙에 목메어 학점 올리기에 목메지 말고 큰 공부하고 사람답게 사는 대학생들 좀 모여 봐라. (중략) 내게 이보슈, 선배 거기 잠깐 서 보십시오. 밤새 바닷가에 앉아 눈부신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시대를 논해 봅시다. 하고 먼저 말 걸어 줄 젊은 정신이 나를 좀 불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의를 향한 그 번뜩이는 맹수 같은 눈매에 맞짱 뜰 준비 되어 있다.        

                                                           / INDIGO + ing  Vol.15 January~Februry 2009 , p42

 

용산참사추모집회에 나갔더니 팔팔한 대학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풋풋한 열정과 기운찬 목소리는 대학생 때 접하던 것과 다른 감흥이 있더군요. 하지만 명계남 씨, 저는 ‘사는 게 바쁜 어른’이라고 해서 밥벌이에만 매몰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짬짬이 목소리도 내고, 팔뚝질도 해가면서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십대 초반, 당신처럼 우리를 독려했던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아 참말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15년 뒤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라”고 하셨지요. 7년이 지났으니 이제 8년이 남았습니다. 여전히 저는 서른일곱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미친 정권이 국토와 민중을 황폐화시키는 동안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최대한 즐겁게, 몸도 마음도 더욱 튼튼하게 다져가며. 명계남 씨, 당신도 건강히 잘 지내시길. 우연히 집회현장에서 만나면 저 혼자 찡긋 눈인사 날릴게요.


태그:#용산 철거민 참사, #살인정권, #촛불, #일반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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