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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출신 소설가 김정현 선생의 신작소설 <고향사진관>(도서출판 은행나무)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떠올렸다. 경남 밀양이라는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상들과 소시민의 삶을, 경북 영주에서 재구성하여 펼쳐놓은 것 같은 작품이 바로 김정현의 <고향사진관>이다.

대학을 휴학하고 군복무를 거의 마쳐가던 스물다섯 살 주인공 서용준은 부친의 위독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휴가를 얻어 귀향한다. 제대와 동시에 쓰러지신 아버지를 대신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장의 짐을 떠안은 서용준.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아버지와 가족들을 돌본다. 복학도 포기하고 청춘과 인생의 꿈을 뒤로 접은 채 아버지 손때가 묻은 고향사진관을 지키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사회에 나가 피 터지게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친구들 눈엔 고향에서 아버지의 안정된 사업을 물려받아 느긋하게 살고 있는 용준이 부러웠겠지만 항상 밝게만 보였던 용준도 늘 마음 한쪽엔 응어리가 남아있다.

<고향사진관>의 저자 김정현 선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40년 가까운 인연을 친구로 살아온 서용준의 인생실화를 소설로 재구성했다.

부친의 병고로 부친이 경영하시던 예식장과 사진관을 물려받아 17년 간 부친의 병간호와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가던 친구 용준. 어머니를 모시며, 2남 3녀의 형제들을 돌봐야 하는 장남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의 삶을 살다가 부친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찾았지만, 불쑥 스스로가 말기 암 판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담담히 주변 정리를 끝낸 후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는다는 이야기가 <고향사진관>의 큰 줄거리다.

작가는 "서용준 그는 단 한순간도 미워한 적 없는 친구이다. 가장 아름다운 청년, 가장 아름다운 아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삶을 살다간 아름다운 남자다"라면서 "내가 인천공항을 나오기도 전에 용준의 부음을 전해 듣고 한동안은 그저 허망하기만 했다. 문득 쓰던 이야기는 접어두고 새 파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꼬박 1년이었다. 일곱 번쯤은 술에 절어 거의 다 쓴 원고를 한 순간에 날려버리기도 했고. 부끄럼 많았던, 아니 겸허함을 잃지 않았던 그 영혼이 훼방을 놓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많이 망설여지고 마음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차마 덮어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눈 감는 그 순간까지 기억하고, 내 아이들의 눈을 통해 영원히 전해야 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라며 집필 동기를 말한다.

그는 친구인 서용준을 두고 쓴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의 글귀 '(처사달성서공용준지구(處士達成徐公庸俊之柩)'를 되새기며, "욕망에 휘둘려 세상 밖에서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고요히 초야에 묻혀 사람의 도리를 다한 진정한 선비를 일러 우리는 처사라 한다. 달성 서씨 문중의 후손으로 세상에 나와 스스로 끓어오르려는 욕망을 다스리며 자식과 남편과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벗과 이웃에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해 그 귀감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은 내 친구 서용준. 선비가 사라져 가는 우리들 세대의 세상에 용준은 진정한 선비였으니 그에게 처사의 명(名)은 실로 합당한 것이었다"라고 선비에 처사와 같은 아름다운 삶을 살다간 친구를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친구의 영혼이 쉬고 있는 산소에 내년 봄에는 조출한 추모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마음을 밝힌다. "'왔다간 흔적'이 아니라 우리가 오래 기억할 약속의 추모비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고향사진관>에는 작가의 여느 작품보다 더욱 큰 감동이 담겨 있다.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각박한 현실 속에서 잊고만 지냈던 가족애를 다시 일깨우는 작품이 <고향사진관>이다. 이것은 우리들 이야기이며,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이다.

선비의 고장 경북 영주 시내의 중심가인 명동거리를 들어서면 바로 보일 것만 같은 낡은 사진관 건물, 주인공 용준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들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사진관>은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효와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작품이다. 구수한 사람 냄새 풍기는 고향사진관.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변해도, 사진관이라는 원래 이름이 신식인 스튜디오로 바뀌었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디지털카메라처럼 바로 보고 지워버리는 인스턴트식 사랑에 익숙해져버린 요즘, 용준은 손에 익을수록 더 아름다운 사진이 찍히는 필름 카메라 같은 존재이다. 남은 필름 개수를 세어 아끼고 아껴 좋은 사진만 나올 수 있도록 골라 찍고, 낡은 사진관 의자에 앉아 현상을 기다리며 잘 나왔을까, 어떤 사진이 나올까 초조하게 기다리던 즐거움. 그리고 사진을 소중하게 한 장 한 장 앨범에 끼우고, 몇 번이나 앨범을 펼치면서 흐뭇해했던 기억. 용준과 고향사진관은 낡은 필름 사진처럼 늘 그 자리에서 추억을 되새길 수 있게 한다.

그렇기에 효에 대한 의미가 퇴색된 요즘, 용준의 이야기가 더욱 애틋하기만 하다. 17년 동안 묵묵히 식물인간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를 돌보며 자식의 도리를 다한 용준.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해체되어가는 요즘, '아버지가 되어보니 아버지를 알겠더라'는 용준의 말이 사무친다.

손때 묻은 필름 카메라처럼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가가 발휘되는 친구 용준의 죽음은 마치 디지털 시대에 사라져가는 필름 카메라의 안녕을 고하는 것과 같다. 익숙한 것들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고향사진관>은 말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밖에 없음을.

조선선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고장 경북 영주시, 그곳엔 고향사진관이 있다. 그리고 그곳 문을 열면 환하게 웃으며 맞아줄 용준이 있을 것만 같다. 작가 김정현이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연을 맺어 훌륭한 인생의 조언자로 곁을 지켜준 친구. 친구들이 하나둘씩 꿈을 찾아 고향을 떠날 때도 묵묵히 남아 고향을 지켜주던 친구. 고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가 바로 주인공 용준이다.

쓰러지신 아버지를 17년 동안이나 헌신적으로 모시며, 청춘을 오로지 가족을 위해 쏟아 부었던 용준. 희수연을 치르신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그제야 용준은 자신이 아버지를 모신 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자신이 의지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아직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또 다른 가족이 있음을 깨닫고 마음을 추스른다.

영주시에서 주겠다는 효자, 효부상을, 이것은 마땅히 자식의 도리라며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던 아름다운 사람. 자신의 몸을 갉아먹고 있는 암세포 앞에서도 홀로 남으실 어머니와 자신을 의지하는 가족들을 먼저 걱정했던 사람이 바로 아름다운 친구 용준이다.

고향사진관은 언제든 돌아와도 따뜻하게 맞아주는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그리고 비록 고향사진관을 지키던 용준은 없지만 그곳만은 언제나 따뜻하게 고향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소설가 김정현 선생은 1957년 소백산 자락의 경북 영주시 출생으로 1991년 <함정>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1996년 <아버지>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들어섰다. 이 작품은 경제위기와 가족의 해체 등 당시의 어려운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국내에 '아버지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영화화되기도 했다.

작가는 지난 2002년부터 중국에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함정>(전3권) <전야> <무섬신화> <길 없는 사람들>(전3권) <외사랑> <아들아 아들아> <여자> <어머니>가 있으며 에세이<아버지의 편지> <아프가니스탄, 그 절망과 희망의 사이에서> <중국 읽기>등이 있다. 고향사진관을 탈고한 이후 현재 가칭<중국인 이야기> 집필을 준비하고 있다.


고향 사진관

김정현 지음, 은행나무(2008)


태그:#김정현 , #아버지 , #영주시 , #고향사진관,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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