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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150포기 절이라는데,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듯한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배추 150포기 절이라는데,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듯한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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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에서 살고 있는 나의 시어머니는 매일 저녁 8시 25분 KBS1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을 보시면서 가끔 신음 비슷하게 낮은 소리를 내곤 한다. 그리고 한마디씩 내뱉는다.

"에이그~ 독한 년, 내가 봐도 징그럽다."

드라마 속 시어머니의 일그러진 초상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요즘 드라마를 보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는 바야흐로 21세기. 최초의 한국인 우주인도 탄생했고 전자여권으로 외국을 넘나드는 때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드라마 속 시어머니는 1960년대 드라마 <여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아니 그보다 더 악랄하고 교활하다.

<여로>보다 더 악랄하고 교활한 '시어머니'

KBS 아침드라마 <큰언니>에서 인수(오승은 분)의 시어머니(김동주 분)는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들이 결혼하자 며느리를 내쫓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인수가 결혼 전에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아낸 시어머니가 이를 빌미로 인수를 아예 집에서 내쫓으려는 것. 그것도 혼전에 낳은 아들과 눈물겨운 상봉을 하도록 도와주는 척하며 실은 한꺼번에 내쫓으려는 '악랄'하고 '치밀'한 작전까지 구상했다. 그뿐인가. 인수가 자신의 손주를 임신 중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시어머니는 오로지 며느리를 내쫓을 궁리로 바쁘다. 며느리는 내쫓되 뱃속 아기만 나중에 쏙 데려올 심산이다.

아들에 대한 시어머니의 사랑이 아무리 지극하기로서니 '인간적으로' 말이 안 되는 설정이다. 너무나 지나친 설정과 극단적인 상황 전개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기보다 짜증과 불쾌함만을 자아낼 뿐이다. 

<큰언니>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 방영되었던 KBS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의 한 장면. 김장 150포기 소금을 절여 놓으라는 시어머니(양금석 분)의 '생'억지에도 묵묵히 이를 수행하는 새벽(윤아 분)이의 모습이 나왔다.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세상에 갓 시집 온 어린 며느리에게,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배추 150포기를 절여 놓으라고 명령하는 시어머니가 어디 있냔 말이다. 또 시킨다고 밤새 낑낑대며 배추를 절이는 며느리가 있을 리도 만무하다.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지 못한 것은 당연. 드라마 홈페이지 시청자소감 게시판에는 이 내용에 대한 불평불만이 폭주했다. 

얼마 전 종영한 SBS 일일드라마 <애자 언니 민자>에 이어 방영 중인 <아내의 유혹>에서도 이런 '뿔 달린' 시어머니가 대활약을 보여주고 계시다. 7년째 아이가 없는 며느리에게 하는 말 '뽄새'하고는. 새삼 세상의 모든 '며느리'라는 존재의 위대성에 감탄하게 된다. 어쩌면 그렇게도 무섭고도 독한 시어머니라는 존재를 견뎌낼 수 있는 건지.

드라마 속 시어머니들이 '독해' 보이는 이유

<아내의 유혹>에서 '뿔달린' 시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교빈(변우민)의 어머니, 금보라(아래 왼쪽).
 <아내의 유혹>에서 '뿔달린' 시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교빈(변우민)의 어머니, 금보라(아래 왼쪽).
ⓒ SBS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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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드라마 속 시어머니는 항상 '뿔 달린' 존재다. 그들은 항상 며느리에게 '의기양양'하게 잘못을 해도 되레 큰소리를 치며, 때론 말도 안 되는 걸로 생트집을 잡는다. 방송국에는 극중 시어머니의 악랄함이 더할수록 시청률도 올라간다는 '설'이라도 있는 건지, 시어머니들의 행동은 갈수록 거침이 없다.

문제는 이러한 드라마가 왜곡된 시어머니상을 만들고 조장한다는 데 있다. 시어머니하면 무조건 '뿔난' 시어머니, 무섭고, 차갑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에는 드라마 속 시어머니의 역할이 지대했다.

물론 시어머니의 존재는 껄끄럽다. 당연히 갈등도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드라마 속 시어머니에게는 그러한 갈등과 마찰 이면에 마땅히 지탱해줘야 할 시어머니의 인간적인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대사와 표정은 하나 같이 똑같다. 박제화되어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숨결은 죄다 빼버리고 차가운 인상만 박아놓은 셈이다. 드라마 속 시어머니들이 '독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드라마 속 고부관계에는 갈등을 푸는 과정이 없다. 그리하여 시어머니는 일방적으로 '독한 년'이 되고 며느리는 대책없이 '당하는 년'이 된다. 시어머니라는 이름만 살아있고 진정한 캐릭터는 죽은 꼴이다. 이제 그런 식상한 모습은 더 이상 보기 싫다. 좀 더 치열하고 사람 냄새 물씬나는 그런 시어머니,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런 고부간의 모습을 보고 싶다.

홧김에 며느리에게 배추 150포기를 절이라고 했다면 나중에 조금 후회하거나 자신이 너무 지나쳤음을 깨닫는 장면이 나와줘야 하거나, 아니면 하룻밤 사이에 150포기를 어떻게 절이냐며, "어머님 너무하세요"라고 항변하는 며느리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꿈꾸는 고부관계는...

사실 나 역시 시어머니가 못마땅하고 불편할 때가 많다. 그건 시어머니 처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며느리인 내가 부족하고 괘씸했던 적도 많았을 것이며 그로 인한 갈등도 있었다. 어느 때는 마치 드라마 속 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재연된 적도 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갈등을 일으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 사는 일에 어찌 갈등만 있을까. 싸우면 화해도 하는 법이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언짢은 일도 있는 법이다. 상대에게 고마웠다가도 이내 섭섭해지고 그러다가 또 다시 풀리고 그리고 또 다시 불편해지고. 그렇게 갈등의 매듭이 몇 번이나 풀렸다 꼬였다는 반복하는 게 인생이다. 그 매듭은 '고부'라는 관계가 존재하는 한, 아니 인생이 계속되는 한 몇 번이고 계속 풀렸다 꼬였다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꿈꾸는 고부 관계는 이런 것이다. 시어머니한테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난 뒤, 신랑한테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기보다는 "어머니, 저 서운해요"라고 말한 뒤 시어머니와 소주 한 잔 하는 며느리. 딸들에게 혹은 자신의 남편에게 며느리 뒷담화를 하기보다는 직접 불러다 잘못을 조목조목 일러주고, 대신 따뜻한 밥 한 끼 해먹여서 돌려보내는 시어머니. 이것이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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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부관계, #너는 내운명, #큰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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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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