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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8일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교육프로그램 - 중국연수'에 다녀왔습니다. 연수에는 30여명의 문화예술인과 문화산업업체 임직원 등이 참여했습니다. 중국 산둥성과 상하이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정에 따라 몇 차례에 나눠 연재합니다. - 기자 주

상하이 역 전경
 상하이 역 전경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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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는 아침 6시 5분에 상하이(上海)역에 도착했다. 산둥성(山東省) 타이산(泰山)역에서 8시간을 달려온 열차가 승객들을 쏟아냈다. 일행을 따라 내려섰는데, 낯익은 얼굴이 역내 통로의 좌우에서 반갑게 웃고 있다. 한류스타 장동건을 모델로 한 광고판이었다.

버스에 오르자 한국만화가협회 이상홍 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한국만화의 중국시장 진출을 위해 5년 전 중국에 와 연구·조사 작업 등을 벌여오고 있다. 이번 상하이 연수 일정도 그가 현지에서 준비했다.

상하이역 내 지하통로 좌우 벽면에는 한류스타 장동건을 모델로 한 광고판이 줄지어 있었다.
 상하이역 내 지하통로 좌우 벽면에는 한류스타 장동건을 모델로 한 광고판이 줄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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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올림픽이 끝났으니 이제 상하이 엑스포 타임이다. 그동안 올림픽 때문에 대외적으로 엑스포 홍보를 자제해왔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엑스포가 시작된 셈이다. 지금까지 여행한 산둥 지역이 콘텐츠의 보고라면 이를 풀 수 있는 큰 시장이 바로 상하이다. 글로벌 비즈니스가 가능한 새로운 대중문화 시장으로 상하이를 주목하기 바란다."

실제로 중국은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엑스포 세일즈에 나섰다. 지난 8월 25일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양슝(楊雄) 상하이시 수석부시장 등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이명박 대통령, 한승수 국무총리 등을 잇달아 만난 후진타오 주석은 "성과 있는 회담을 통해 양국간 엑스포 분야 협력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중국인의 관심과 세계인의 눈길은 이제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이동하고 있다.

"상하이는 개발을 멈춘 적이 없는 도시"

상하이도 서울 못지 않게 교통체증이 심했다.
 상하이도 서울 못지 않게 교통체증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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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숙소인 호텔에 짐을 풀고 아침 식사를 했다. 식당에선 한국가요를 번안한 노래가 흘러나왔고, 로비에선 <거울연가> 주제곡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우리 일행 때문에 일부러 튼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한류의 열기가 완전히 식지는 않은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중심지로 출발했다. 대부분 직장인이 출근을 마쳤을 시간임에도 도로는 차량들로 붐볐다. 이상홍 팀장은 "차량이 넘치는 까닭에 상하이에선 신차 등록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번호판을 경매하기도 하는데, 번호판 값이 차량 값보다 비싼 경우도 있다고 한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8자가 4개 들어간 번호판이라면 웬만한 차 10대 값과 맞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하이 도심의 공사 현장. 오른 편의 건물들은 조계 시절 지어졌다.
 상하이 도심의 공사 현장. 오른 편의 건물들은 조계 시절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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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고층건물 숲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도심 곳곳에서 건축·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상홍 팀장은 "상하이는 개발이 멈춘 적이 없는 도시"라고 했다. 조창완 알자여행 대표도 "베이징은 1년마다 한 번씩 바뀐다는 느낌이 드는데, 상하이는 3개월마다 바뀐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서울 촌놈'인 나로서는, 서울 면적(605㎢)의 10배(6341㎢)가 넘는 상하이의 창 밖 풍경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2001년 상하이를 방문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이 천지개벽을 이뤘다"며 감탄할 만했다.

와이탄, 중서합벽(中西合璧)의 표본

오늘날 중국의 '경제수도'로 불리는 상하이는 명나라 때까지만 해도 양쯔강(揚子江) 하구의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의 패전에 따른 난징(南京)조약(1842년)으로 개항되면서 상하이의 운명은 바뀌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 다퉈 조계지를 만들고, 공장과 함께 은행·상사 등 경제 침략의 첨병기지들을 세웠다. 이후 상하이는 중국 1백년 근현대사의 격동을 겪으며 압축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덩샤오핑(鄧小平) 전 주석은 개항의 유산인 상하이를 개혁·개방의 중심으로 삼았다. 덩샤오핑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천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1992년)를 전후한 시기에 매년 춘절(음력설)을 보낸 곳도 바로 상하이였다. 상하이교통대학 출신으로 상하이 시장과 당서기를 지낸 장쩌민(江澤民)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방(上海幇)도 그 무렵 톈안먼(天安門) 사태(1989년)를 계기로 중앙정치 무대의 실세로 등장했다.

상하이 와이탄의 근대 건축물군. 십리양장이란 별명 그대로다.
 상하이 와이탄의 근대 건축물군. 십리양장이란 별명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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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력의 바탕에 정치력의 날개까지 단 상하이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프랑스의 파리지앵이나 미국의 뉴요커처럼, 그저 중국인이 아니라 상하이런(上海人) 또는 상하이니즈(Shanghainese)라 스스로를 부른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텃세도 있다. 상하이 안내를 맡은 옌볜(延邊) 출신인 조선족 가이드는 "처음 상하이에 왔을 때 상하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무시당했다"고 말했다.

버스는 덩샤오핑이 새해를 맞으며 개혁·개방을 구상하던 와이탄(外灘) 거리에 우리 일행을 내려놓았다. 상하이는 도시 가운데를 흐르는 황푸강(黄浦江)의 동서로 크게 푸동(浦東)과 푸시(浦西) 지역으로 나뉜다. 와이탄은 푸시 쪽 강변 거리로 조계 시절 제국주의 열강들의 은행·상사 건물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다. 지금도 약 1.5km에 이르는 거리에 고딕·바로크·르네상스·신고전주의 등 다양한 풍격의 당시 석조건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와이탄은 '세계건축박물관' 또는 '십리양장(十里洋場)'이란 별명 그대로였다. 유중하 교수(연세대 중문학과)는 "동과 서가 만나는 데 이런 동네가 없다"며 "중서합벽(中西合璧)의 표본과 같은 지역"이라고 했다. 헤어질 때 징표로 쪼개 나눠 가지는 옥처럼 중국과 서양의 문물이 어울려 독특한 풍취를 풍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 교수는 또 조계 시절 건물들을 가리키며 "저 건물 하나하나마다 모두 콘텐츠가 감춰져 있다"고 덧붙였다.

건물마다 콘텐츠가 감춰져 있는 곳

현재 허핑판뎬(和平飯店) 남쪽 빌딩을 이루고 있는 건물은 조계 시절 팰리스호텔이었다. 마약애호가들의 성지로 1909년 세계아편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1911년 쑨원(孫文)이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임시대총통으로 추대되고,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결혼식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현재 상하이시 대외무역국이 들어 있는 곳은 영국계 종합상사인 이화양행(怡和洋行)의 사옥이었다. 당시 이화양행은 아편 무역과 불법 무기거래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화양행은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상사로 인천에도 진출했다. 공산화 이후 홍콩으로 거점을 옮겼다.

와이탄에서 가장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상하이총회(上海總會) 건물은 조계 시절 영국 부호들의 비밀 고급 매춘클럽으로 사용됐다. 당시 직업여성이 아닌 모든 여자들과 중국인은 출입이 금지됐다. 돔형 옥상이 두드러진 타이 방콕은행 건물은 중국 최초로 전화교환소가 설치돼 있던 곳이다. 현재 상하이호텔 건물에는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 사령부가 주둔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첫 상하이 시장을 지낸 천이 동상이 와이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가운데 보이는 길이 난징루 입구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첫 상하이 시장을 지낸 천이 동상이 와이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가운데 보이는 길이 난징루 입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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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보험회사 AIA 지점 건물은 조계 시절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자신문인 <노스차이나데일리>의 건물이었다. <노스차이나데일리>는 1932년 상하이 홍코우공원(虹口公園)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세계에 알린 신문이기도 하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르칭치촨(日清汽船) 사옥은 현재 화사(華夏)은행이 사용하고 있다. 옥상에 카페가 있어 와이탄의 멋진 야경을 즐길 수 있다.

영국계 홍콩상하이은행(HSBC) 본점 건물에는 현재 상하이푸둥발전은행이 들어 있다. 또 러시아가 청나라 거래하기 위해 세운 로청은행(露淸銀行) 상하이지점 건물은 현재 상하이 외환교역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세관업무를 담당하던 상하이해관(海關) 건물만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업무를 보고 있다. 런던의 빅벤(Big Ben)을 본 딴 시계탑이 인상적이다.

그 같은 역사를 간직한 와이탄의 건물들 위로 지금은 오성홍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과 그 앞 중산둥이루(中山東一路)를 바삐 지나치는 차량들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최초의 상하이시장을 지낸 천이(陈毅)의 동상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국의 미래를 상징하는 푸둥의 마천루

<백범일지>의 2권은 백범 김구 선생이 "1919년 2월(음) 어느날, 영국 상인 죠지 쇼우(Jeorge Show)의 윤선(輪船)을 타고 동행 15인과 함께 4일간의 항해 끝에 상해 포동 선창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선생은 이어 "안동현에서 배를 탈 때 얼음덩이가 쌓인 것을 보았는데, 불란서 조계지에 상륙할 때는 거리의 가로수에 녹음이 우거져 있"고, "옷을 입고도 배 안에서는 추위로 고생을 하였는데 이제는 등과 얼굴에 땀이 난다"고 적었다.

상하이 와이탄을 찾은 날은 9월말임에도 햇살이 무척 뜨거웠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부채로 뙤약볕을 가리고 있다.
 상하이 와이탄을 찾은 날은 9월말임에도 햇살이 무척 뜨거웠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부채로 뙤약볕을 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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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탄에선 산둥성과 달리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와이탄에선 산둥성과 달리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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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이 와이탄을 찾은 날도 9월 말임에도 등과 얼굴에 땀이 흐를 정도로 햇살이 따가웠다. 가이드는 "삼복보다 오늘이 더 더운 것 같다"고 말했다. 평일 오전에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이지는 않았다. 몇몇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관광객들로 보였는데, 여성들은 대개 양산을 썼고, 부채로 햇살을 가린 중국인 노인들도 보였다. 산둥성에선 보기 힘들었던 서양 관광객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푸둥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마천루. 왼쪽 뾰족한 탑이 둥팡밍주다.
 푸둥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마천루. 왼쪽 뾰족한 탑이 둥팡밍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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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푸강을 둘러보았지만 백범이 망국의 설움과 독립의 꿈을 품고 첫발을 디뎠던 곳을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강 위로 유람선, 그리고 엑스포 홍보를 위한 대형 멀티비전을 세운 배가 유유히 흘러갈 뿐이었다. 엑스포 선박의 정면에는 엑스포 슬로건인 'Better City Better Life'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오른쪽 병 따개 모양의 건물이 모리빌딩이다. 그 앞 강 위로 엑스포 홍보 선박이 지나가고 있다.
 오른쪽 병 따개 모양의 건물이 모리빌딩이다. 그 앞 강 위로 엑스포 홍보 선박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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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편으로는 푸둥의 화려한 마천루들이 상하이의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그려내고 있다. 푸시가 구시가지라면 푸둥은 신시가지로 중국과 상하이의 미래가 거기에 있다.

특히 상하이의 랜드마크인 둥팡밍주(東方明珠)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전망대와 상가 등을 겸한 방송탑이다. 높이 468m로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거침없이 성장하고 있는 상하이의 오늘을 상징하는 듯했다. 다음날 그곳에 올라 상하이시를 내려볼 예정이다.

둥팡밍주의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그보다 더 높은 푸른 건물이 서 있다. 일본의 부동산재벌인 모리그룹이 세운 지상 101층의 빌딩으로 현재 상하이에서 가장 높은 건물(높이 492m)이다. 영화 <미션임파서블3>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상하이국제금융센터가 입주해 있다. 건물 윗부분의 역사다리 꼴의 빈 공간 때문에 병따개를 닮은 모습이었다. 태풍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그리 했다는데, 애초 원형으로 설계됐으나 일장기를 연상시킨다고 중국정부가 끝내 허가를 내주지 않아 결국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 쇼핑 일번가' 난징루(南京路)

와이탄에서 지하보도를 건너 난징루(南京路)로 들어섰다. 영화 <색, 계>에 등장했던 보석상 거리가 바로 이곳이다. '중국 쇼핑 일번가'라는 명성답게 백화점, 레스토랑, 패션매장 등이 즐비하다. 숲을 이룬 네온사인과 광고판들, 그리고 그 사이를 흘러가는 인파들… 명동과 분위기는 비슷한데 더 크고 더 화려했다.

상하이 난징루. '중국 쇼핑 일번가'라는 명성답게 백화점 등 화려한 매장들이 즐비했다.
 상하이 난징루. '중국 쇼핑 일번가'라는 명성답게 백화점 등 화려한 매장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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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루 일부 구간은 보행도로로 차가 다니지 않았다. 대신 관광용 꼬마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시간 절약도 할 겸 꼬마열차를 타고 난징루를 관통했다. 화사한 옷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또 쇼핑과 관광에 지친 사람들은 화단 턱이나 벤치에 앉아 쉬고 있다. 그때 남루한 옷차림의 한 걸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손을 벌였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남긴 그림자의 한 자락이었다.

난징루 보행도로에서 운행하는 꼬마열차.
 난징루 보행도로에서 운행하는 꼬마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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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열차를 함께 탄 김명인 교수(인하대 국어교육과)는 "10년 전 상하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에 비하면 빅뱅이라고밖에 표현을 못 하겠다"면서 "중국의 변화 속도가 무섭다. 특히 그 변화가 중앙에 의해 컨트롤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아디다스 광고판. 영웅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듯싶어 보기에 불편했다.
 아디다스 광고판. 영웅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듯싶어 보기에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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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베이징올림픽에 맞춰 제작했다는 아디다스의 대형그림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운동복을 입은 중국 스포츠스타들을 군중이 떠받쳐 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중국인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 그림이 영웅주의와 집단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읽혀 불편했다. 중앙이 '컨트롤'할 수 있는 기제의 바탕에는 혹시 그런 사상이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도시계획전시관에서 기가 질리다

꼬마열차를 내려 난징루의 중심에 있는 지하보도를 건너자 왼편에 런민공원(人民公園)이 나타났다. 영국인 조계 시절 경마장이었던 곳이다. 도박, 격투기, 무도회 등이 열렸던 부근의 '따스지에(大世界)'와 함께 상하이 유흥의 중심을 이뤘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엔 도박과 경마가 금지되며 경마장은 공원으로, 경마장 클럽하우스는 상하이미술관으로, 그리고 따스지에는 복합 놀이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런민공원 입구. 뒷편으로 신세계백화점과 삼성 로고가 보인다.
 런민공원 입구. 뒷편으로 신세계백화점과 삼성 로고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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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민공원은 런민따도우(人民大道)를 사이에 두고 런민광장(人民廣場)과 마주하고 있는데, 그 도로 곁에 서 있는 현대식 건물이 상하이도시계획전시관이다. 중국의 경제 수도를 넘어 아시아의 경제 수도를 꿈꾸는 상하이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2010년 엑스포를 맞아 엑스포 전시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전시관 건물에 걸린 액정시계가 '583'이란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엑스포 개최까지 583일이 남았다는 뜻이다. 입구에선 사람 인(人)자를 형상화한 엑스포 마스코트인 '하이바오(海寶)'가 우리 일행을 환영했다.

상하이도시계획전시관 1층 로비에 세워져 있는 푸둥의 마천루.
 상하이도시계획전시관 1층 로비에 세워져 있는 푸둥의 마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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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1층에선 푸동 지역 마천루의 금색 조형물을 만날 수 있고, 2층에는 조계 시절 상하이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과거와 현재의 풍경을 비교해 보여주는 사진첩이 흥미로웠다. 3층부터는 주로 엑스포 관련 전시를 하고 있는데, 전시장 설계도와 전시관 등을 그림, 전광판, 영상, 모형 등을 통해 안내하고 있다.

미래의 상하이시를 미니어처로 제작해놓았다. 그 섬세함과 규모에 기가 질렸다.
 미래의 상하이시를 미니어처로 제작해놓았다. 그 섬세함과 규모에 기가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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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놀라운 건 4층에 있는 미니어처였다. 엑스포 이후 미래의 상하이시 전체 모습을 미니어처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엄청난 규모에 기가 질렸다. 일행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아"하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세계 최대 규모의 미니어처로 기네스북에 등록돼 있다고 한다. 대체 중국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걸 만들 엄두를 낼 수 있을까.

'아름답게 빛나는, 함께하는, 참여하는 엑스포(精彩世博 共同世博 參與世博)'를 통해 '상하이 하늘은 파랗게 물은 맑게 땅은 푸르게 집은 아름답게(上海的 天更藍 水更淸 地更綠 居更佳)' 만들어 'Better City Better Life'를 이뤄내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의지가 단지 전시장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표어들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장정 시절 동굴에서 출발한 신화슈디엔(新華書店)

다음으로 중국 최대의 도서 유통 채널이자 서점인 신화슈디엔(新華書店)을 찾았다. 신화슈디엔은 중국공산당의 옌안(延安) 시절 칭량산(淸凉山) 동굴에서 출발한 '국민서점'이다. 서점의 이름 역시 마오쩌둥(毛澤東)이 썼다. 하나의 국가 기관으로 공산화 이후 독점적 지위를 누렸으나 개혁·개방 이후 서점 체제도 변화를 맞아, 현재는 전체 도서 유통의 50% 정도만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상하이의 신화슈디엔 입구. 간판은 마오쩌둥의 글씨다.
 상하이의 신화슈디엔 입구. 간판은 마오쩌둥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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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신화슈디엔은 8층 건물이었다. 1층은 입구부터 좌우로 각 분야별 신간과 베스트셀러가 진열돼 있다. 한국의 대형서점 매장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책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올림픽의 꿈 광영의 길> <푸틴시대 2000-2008> <Beyond Wall Street> <금전전쟁(金錢戰爭)> <전망중국(展望中國) 2008> 등의 책 제목이 눈에 띄었다. 중앙 통로 끝에는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한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인상중국(印象中國)>이란 책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린이책 코너엔 <쓰촨대지진 영웅소년>이란 책이 매대 위에 놓여 있었다. 아마도 쓰촨(四川)지진 때 친구들을 구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듯했다. 소년영웅 가운데 한 명인 린하오(林浩·9) 소년은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때 중국선수단의 기수 야오밍(姚明) 옆에서 오성홍기와 올림픽기를 흔들며 등장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역시 '영웅주의'일까.

상하이에선 거리 곳곳에 서적을 판매하고 있는 노점상들도 만날 수 있다. 주로 잡지를 판매한다.
 상하이에선 거리 곳곳에 서적을 판매하고 있는 노점상들도 만날 수 있다. 주로 잡지를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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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왼편은 요리, 건강, 미용 등과 관련한 책들로 매장을 꾸몄다. 중국인들에게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웰빙'은 관심을 끄는 주제인 듯했다. 바로 그 옆에는 안경점이 들어와 있었다. 서점과 안경점이라니, 꽤 어울리는 궁합이 아닌가.

시간이 부족해 여러 층을 둘러보진 못하고, 한글로 씌어진 <상하이여행 휴대용 가이드>(상하이인민미술출판사 펴냄) 등 상하이 관련 책자를 2권 사들고 나왔다. 서점을 나오자 빗방울이 조금씩 뿌렸다. 어느새 서점 입구엔 우산장수들이 장사진을 펼치고 있었다.

대한민국상해문화원, 한중 문화교류의 가교

대한민국상하이문화원 하현봉 원장이 임시정부 전시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한민국상하이문화원 하현봉 원장이 임시정부 전시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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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찾은 곳은 쉬자후이(徐家匯) 지역에 있는 대한민국상해문화원이었다. 하현봉 원장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한 국가 내에 복수로 문화원을 연 곳은 미국과 중국뿐이다. 상하이에는 베이징에 이어 지난해 7월 12일 개원했다. 한국의 문화예술과 관광지 등을 알리며 한·중 문화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현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한국요리, 태권도 강좌도 열고 있다.

상하이문화원 임시정부 전시실에선 윤봉길 의사의 의거 당시 촬영된 영상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었다.
 상하이문화원 임시정부 전시실에선 윤봉길 의사의 의거 당시 촬영된 영상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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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은 건물의 3개 층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1층에선 마침 한국 핸드페인팅 도자기 초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2층에는 임시정부 상설 전시실을 두고 상하이와 충칭(重慶) 시절의 임시정부 역사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이봉창·윤봉길 의사에 대한 안내판이 따로 마련돼 있다. 한 곳에선 윤봉길 의사의 거사 당시 영상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2층에는 4000여 권의 책과 한국음악 CD, 한국영화 DVD를 갖춘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다. 멀티미디어실 등에서 볼 수도 있고 대여도 가능하다. 하 원장은 "별도로 허가를 받지 않을 경우 한국책을 5권 이상 가지고 들어오면 공항 검색대에서 빼앗는다"고 말했다. 중국정부의 '개방'이 모든 부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 듯싶다.

3층에선 '한국 공간디자인의 오늘'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고, 또 200석 규모의 공연실이 갖춰져 있었다. 하 원장의 얘기에 따르면, 1주일에 약 500명 정도가 문화원을 방문하고 있다고 했다. 이희재·박제동 화백은 한국 유학생들과 만남을 위해 남고, 나머지 일행은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를 떴다.

북한식당 간 일행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상하이 내 한 북한식당 여성 복무원들의 공연 모습.
 상하이 내 한 북한식당 여성 복무원들의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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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상하이 시내의 한 북한식당에서 먹었다. 연두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곱게 차려 입은 젊은 여성 '복무원'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하나같이 맑은 얼굴의 미녀들이었다. 계산대에 놓인 식당 안내 전단을 살펴보니 "일류급 료리사들과 최고의 호텔식 서빙, 례절교육을 받은 평양의 으뜸가는 미녀들이 손님들을 정성껏 모십니다"라고 적혀 있다.

상하이 내 한 북한식당의 여성 복무원.
 상하이 내 한 북한식당의 여성 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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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들쭉술을 곁들여 삼겹살, 순대, 떡볶이 등을 먹었다. 술은 좀 독했으나 산뜻했고, 음식도 정갈했다. 평양냉면을 시키고 잘라달라고 했다가 한 여성 복무원에게 가볍게 무안(?)을 당했다. "이가 안 좋으십니까? 이건 그냥 먹습니다." 일행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의 얼굴이 오히려 살짝 붉어졌다. 그녀의 말대로 냉면은 그리 질기지 않았다.

식사를 하던 중 식당 한 쪽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 공연이 시작됐다. 방금 전까지 음식 시중을 들던 복무원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전자기타에 아코디언, 드럼 등을 연주하며 노래와 춤을 선사했다. 공연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반갑습니다'로 시작해 '다시 만납시다'로 끝났다. 북한 대중가요 '휘파람' '심장에 남는 사랑'도 들을 수 있었다. 또 한 여성 복무원은 '돌아와요 부산항'을 트로트 창법으로 멋지게 뽑았다. 주고객인 '남쪽 사람들'을 위한 레퍼토리로 꾸민 듯했다.

자기 차례가 끝난 복무원들은 바삐 식탁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얀 뺨에 땀이 흘러내렸다. 안쓰러웠다. 일행 중 한 명이 "중국의 발전상을 보다 보니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고 말한 기억이 났다. 식당 모니터 화면에서는 '우리의 장군님 펼치는 구상…'이라는 노랫말이 흐르고 있었다. 들쭉술 때문일까. 기분이 착잡했다.

모든 일을 대담하고 통이 크게?

상하이 톈쯔방에서. 옛날 사진기들을 전시해놓은 곳도 있었다.
 상하이 톈쯔방에서. 옛날 사진기들을 전시해놓은 곳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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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끝마치고는 일행 몇 명과 함께 톈쯔팡(田子坊) 골목을 둘러보았다. 톈쯔방은 서울의 인사동처럼 갤러리와 공방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아담했지만 빨간 벽과 초록 창틀 등으로 상하이 예술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아쉽게도 늦은 시각이라 대부분 갤러리들은 문을 닫았다. 희미한 조명에 기대 창으로 갤러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있는 현대미술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피곤한 다리도 쉬고 목도 축일 겸 톈쯔방 골목 안에 있는 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 이름이 '코뮌(Commune)'이란 뭔가 심상찮다 싶었는데, 카페 안 벽면이 북한 포스터들로 장식돼 있었다. 대개는 생경한 선동 구호와 그림으로 이뤄진 정치 포스터들이었다. 영화 포스터도 있었는데, 그 사이에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연출한 <이름 없는 영웅들> 포스터도 보였다.

상하이 톈쯔방의 한 카페에서. 양주병과 마오쩌둥 인형, 그리고 북한포스터가 함께 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상하이 톈쯔방의 한 카페에서. 양주병과 마오쩌둥 인형, 그리고 북한포스터가 함께 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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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란히 걸린 두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침략자 미제에게 죽음을!'이란 구호와 함께 북한군 병사가 발로 미군 병사의 목을 짓밟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바로 그 옆 포스터에는 '평화는 지켜야 한다'는 구호에, 화분이 놓인 베란다 난간에 비둘기 두 마리 앉아 있고 푸른 창공을 비행기가 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두 포스터를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할지 난감했다.

카운터 뒤편 벽에는 칵테일용 양주병들 사이에 다양한 포즈의 마오쩌둥 인형들이 세워져 있다. 그 위에 걸린 포스터에는 '모든 일을 대담하고 통이 크게!'라는 구호가 선명했다. '천지개벽'을 이룬 상하이를 보고 간 김정일 위원장은 어떤 '통 큰' 구상을 했던 것일까. 개항을 개혁·개방으로 반전시켜 '중서합벽'의 성장을 이뤄낸 상하이에서, 공교롭게도 계속 북녘 동포의 삶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는, 중국연수 여섯 째 날이었다.


태그:#중국연수, #상하이, #와이탄, #엑스포, #북한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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