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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진 터에 층층건물로 지은 중대사
 경사진 터에 층층건물로 지은 중대사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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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추워! 옷 더 껴입어야 되겠는 걸."
"여긴 벌써 겨울이네 겨울, 저 나무들 좀 봐? 모두 벌거벗었잖아?"

버스에서 내린 등산객들이 서둘러 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산에 오를 때면 으레 간편하게 입고 시작해야 땀을 적게 흘립니다. 그래서 가벼운 복장으로 내렸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난 토요일(10월 25일)에 찾은 강원도 오대산은 이미 겨울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어느 산악회를 따라 오대산 노인봉과 동대산 사이에 있는 진고개 마루턱에 오전 10시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회원들은 곧장 첫 번째 봉우리인 동대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진고개와 등산길엔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날씨는 맑았습니다. 조금 오르다가 뒤돌아본 진고개 위로 두둥실 떠오른 흰 구름이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지요. 그런데 상당히 차가운 바람이 너무 거셌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등산, 그러나 아! 힘들다, 머나먼 비로봉

고운 단풍을 기대했었는데 단풍은 고사하고 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도 보기 어려웠지요. 바짝 마른 낙엽만 강풍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등산로 주변은 물론 바라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황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등산 시점인 진고개와 맑은 하늘의 흰구름
 등산 시점인 진고개와 맑은 하늘의 흰구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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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코스는 첫 번째 봉우리인 동대산을 올라 두로봉으로, 두로봉에서 두로령을 거쳐 상왕봉, 그리고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올랐다가 상원사를 거쳐 두 번째 중간 주차장까지 18키로미터를 주파하는 코스였습니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중에서 네 개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월정사와 상원사를 반원으로 감싸 안고 도는 산행이었지요.

"오늘 코스가 길고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시각이 10시니까 오후 2시까지 두로령을 넘지 못하는 분은 두로령에서 상왕봉으로 오르지 말고 곧장 상원사로 하산하셔야 합니다. 두로령 오후 2십니다, 2시. 아셨죠?"

산악회장은 오후 2시를 몇 번이나 강조하며 못을 박았습니다. 회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올랐습니다. 그런데 오대산은 처음부터 그리 만만하게 품을 열지 않았습니다. 동대산을 오르기가 여간 힘겨운 게 아니었습니다.

급경사 길인데다 계단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산행 거리가 나무 멀어 우리 일행 다섯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두로령에서 상원사로 하산하기로 작정했고, 또 한 사람은 처음부터 버스를 타고 상원사로 가 비로봉에 올랐다가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저멀리 바라보이는 봉우리가 노인봉
 저멀리 바라보이는 봉우리가 노인봉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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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세 사람은 앞선 사람들을 따라 힘겹게 동대산에 올랐습니다. 동대산 정상은 강풍이 더욱 심했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헤집으며 몰아치는 바람소리가 흡사 괴물의 아우성처럼 들렸습니다. 첫 번째 봉우리에 올랐지만 아주 잠깐 앉아 간식을 먹고 일어났습니다. 잠깐만 앉아 있어도 추위가 엄습하여 오래 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맑은 하늘과 멀리 가까이 바라보이는 산줄기는 힘찬 모습으로 솟구치고 흘러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한반도의 등뼈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의 우람하고 장엄한 모습이었지요. 조금 전에 산행을 시작한 진고개 너머 노인봉이 아련합니다.

"이거 내리막길이네, 이렇게 많이 내려가면 다음 봉우리 오르기가 힘들 텐데."

동대산에서 두로봉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가 능선을 따라 걷는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능선을 따라 약간 올라갔다가 더 많이 내려가는 능선 중간에는 두 개의 하얀 바위가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차돌백이였습니다.

이 차돌백이가 해발 1200미터, 동대산으로부터 233미터를 내려온 것입니다. 길은 다시 완만한 내리막 경사입니다. 능선 4거리인 신선목이에 도착하니 이곳은 해발 1120미터였습니다. 앞으로 오를 두로봉이 그만큼 높아진 셈입니다.

동대산 정상에서 필자
 동대산 정상에서 필자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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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길을 한 참을 더 걷자 드디어 두로봉이 저만큼 우람한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시 봉우리를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몸이 많이 지쳐 피로가 전신으로 엄습합니다. 벌써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떫은 도토리를 삶아 먹었던 춥고 배고팠던 추억이 깃든 봉우리

"여긴 봉우리 표지석도 안보이네. 주변은 온통 도토리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정말 그러네, 이만한 높이면 나무들이 별로 없는 게 정상인데. 소백산도 그렇고."

두로봉은 1421미터나 되는 높은 봉우리였지만 특별한 표지가 없었습니다. 비슷한 높이의 소백산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풍경이었지요. 나무가 거의 없는 황량한 소백산의 모습과는 달리 도토리나무와 제법 키가 큰 나무들도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래. 바로 이 봉우리야. 두로봉이었었지, 건빵과 도토리를 주워 삶아 밥 대신 먹었던 곳이."

이 두로봉은 참 춥고, 힘들고, 배고팠던 내 군대시절의 추억이 깃든 곳입니다. 그러니까 1968년 그해 겨울. 몹시 춥고 눈 쌓인 이 봉우리에 내가 있었지요. 북한의 124군 부대 120명이 남한에 침투하여 우리 부대가 바로 이 오대산에서 작전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능선길에서 만난 하얀 보석같은 바위 차돌백이
 능선길에서 만난 하얀 보석같은 바위 차돌백이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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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봉우리에서 밤을 지낸 그날 아침에도 오늘처럼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쳤던 것입니다. 전날 오후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강풍은 다음 날 오전동안 계속 불었습니다. 결국 강풍 때문에 헬기가 뜨지 못해 식량보급을 받지 못한 우리들은 비상식량인 건빵과 눈 속을 뒤져 주운 도토리를 삶아 밥 대신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은 위생병이었던 내가 배속된 중대의 소대장인 어느 소위의 생일날이기도 했습니다. 생일 밥상이 눈 녹인 물에 삶아낸 도토리와 건빵죽이 된 것이지요. 그 소대장도 어쩌면 이 두로봉에서 먹었던 그날 아침의 도토리와 건빵죽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 이거 또 내려가잖아. 오대산 어느 한 봉우리도 만만한 곳이 없구먼."

두로봉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길은 다시 내리막길이었습니다. 길가에는 여기저기 오래된 주목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은 이렇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비로봉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아름답고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내려가자 비포장도로가 나타났습니다. 오대산을 가로지른 두로령 고갯길이었습니다. 시계는 오후 1시 40분이었습니다. 산악회장이 정한 오후 2시보다 20분 먼저 도착한 것입니다. 상왕봉을 거쳐 비로봉에 올랐다가 내려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 셈이었습니다.

필자의 군대생활 추억이 깃든 두로봉 정상 풍경
 필자의 군대생활 추억이 깃든 두로봉 정상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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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령을 건너자 바로 오르막길입니다. 상왕봉으로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바람막이가 된 곳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을 때 같은 산악회원 몇 명이 올라왔습니다. 우리들 뒤에 아직 몇 명이 더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꼴찌가 아니라니 안심하고 비로봉으로 올라가기로 했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전까지 그렇게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검은 구름이 뒤덮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앞쪽인 비로봉 쪽의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하더니 곧 거센 바람 속에 안개 같은 이슬비가 섞여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강풍 속에 싸락눈 맞으며 오른 상왕봉과 비로봉

그렇다고 뒤돌아 설 수는 없었습니다. 다행이 비는 그리 많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왕봉으로 오르는 길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왕봉에 거의 올랐을 즈음해서 얼굴에 부딪히며 내리는 이슬비의 감촉이 달라졌습니다. 부드러움에서 아픔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비가 아니라 싸락눈이네, 싸락눈!"
"그럼 이게 첫눈이잖아? 오대산에서 첫눈을 맞는 거네. 허허허."

정말 싸락눈이었습니다. 일행들이 너털웃음을 웃었습니다. 오대산에 올라 첫눈을 맞게 된 것이 신기하고 기뻤기 때문이지요. 거센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싸락눈 때문에 눈 뜨기가 어려웠지만 상왕봉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비로봉으로 향했습니다.

능선길에서 만난 거목의 기괴한 모습
 능선길에서 만난 거목의 기괴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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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길은 완전히 안개와 바람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희부연 안개 속으로 싸락눈과 안개비가 섞여 내리기도 하고 번갈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옷은 후줄근하게 젖어들었지만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좋지 않은 날씨 중에도 등산객들은 많은 편이어서 맞은편에서 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앗, 따가워! 여긴 바람과 싸락눈이 더욱 드세구먼."

어둑어둑한 능선길을 걷다가 오르막길로 접어든 얼마 후 드디어 비로봉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비로봉 정상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너도나도 '오대산 비로봉 해발 1563미터'라 쓰인 정상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너무 흐린 날씨 때문에 배경은 매우 흐렸습니다.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 일행들과 정상주 한 잔씩을 마시고 돌아서니 왼쪽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지난번 설악산 등산 후 오색지구로 내려가는 급경사 돌계단 길에서 아팠던 무릎이었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없었습니다. 아픔을 참고 내려갈 수밖에.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오대산 주목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오대산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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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봉 정상에서나 하산길에선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없었습니다. 안개와 이슬비로 뒤덮인 시야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픈 다리를 끌며 조심조심 내려왔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다른 산악회원들에게 걱정과 폐를 끼칠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내려오자 적멸보궁이 나타났습니다. 적멸보궁 입구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연등들도 이슬비에 젖어들고 있었지요. 적멸보궁은 내려가는 길에서 다시 위쪽으로 100여 미터 정도 올라간 지점이어서 아픈 다리 때문에 포기하고 그냥 하산하기로 했습니다.

특이하고 멋진 층층건물 중대사 아래 황금빛 상원사가 있었네

길은 계속 급경사였습니다. 두 굽이를 돌아서자 멋진 건축물들이 나타났습니다. 옛날에는 없었던 건물이었습니다. 아직 상원사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 같은데 이곳이 도대체 어디쯤일까? 언덕 밑 샘가에서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으니 중대사라고 합니다.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과 상왕봉 표지석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과 상왕봉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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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사라? 기억이 납니다. 옛날엔 허름한 한 채의 초가 절집이 있었던 곳. 그 중대사가 아주 멋진 건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비스듬한 급경사 터에 층층이 다섯 채의 건물을 짓고 그 한 편에 회랑까지 만들어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아주 특이한 절집구조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밑에서 올려다보는 절집건물은 정말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몇 번인가 뒤돌아보며 중대사를 내려와 잠간 더내려오자 멀지 않은 아래 지점에 상원사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40여년 만에 찾은 상원사도 옛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크고 산뜻하게 새로 지은 건물들이 많았습니다. 옛날 그 소박했던 법당이며 작은 요사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특히 눈길을 붙잡은 것은 대웅전인 문수전의 지붕이었습니다. 누런 황금색으로 빛나는 지붕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몹시 낯설었지요.

금빛 찬란한 상원사 문수전 지붕
 금빛 찬란한 상원사 문수전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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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36호인 '상원사 동종'으로 유명한 이 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원래의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절입니다. 옛 건물들은 거의 없어지고 지금 보는 건물들은 대부분 근래에 지어진 건물들이었습니다.

일행 두 사람은 황금빛 문수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섰습니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중간 주차장까지는 아직도 3키로미터를 더 걸어 내려가야 했습니다. 상원사 입구 도로는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포장이 아닌 특별한 흙길이어서 걷는 감촉이 매우 좋았습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5시, 진고개 산행시점으로부터 18키로미터 거리에 7시간이 걸렸습니다. 아픈 다리를 끌며 내려온 힘든 산행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오대산, #100대 명산, #층층건물,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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