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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식견 부족한 사람이 누구인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 맞는지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어보기까지 했습니다. 지난 6일 교육과학기술위원회 국정 감사장에서 한나라당의 이른바 개혁성향 소장파라는 정두언 의원이 이른바 '좌편향' 교과서 저자들을 몰아세우는 장면은 흑백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빨갱이 사냥' 그 자체였습니다.

 

교과서에 대한 자신의 독법을 옳다고 미리 단정지어놓고 저자들의 시각을 편향되었다고 심문하는 듯한 모습은 학문과 교육, 나아가 역사에 대한 모독입니다. 아무리 적국이라지만 교과서에 출처와 저자를 당당히 밝히고 인용한 것을 두고 '친북'이라는 게 이 무슨 황당한 논리입니까.

 

더욱이 국회의원이라는 힘을 이용해 제대로 된 항변권조차 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다그치는 행태는 요즘 초등학교의 교실에서조차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전문 식견이 부족한 정치인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 하나하나를 해석하고 외려 역사학자를 가르치려드는 모습에서는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그치지 않아도 정 의원의 역사 인식을 정확히 반영한 듯 보이는 교과서가 '대안교과서'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중에 나와 있어 얼마든지 검증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워낙 관심을 끈 책인 까닭에 교사를 비롯해 역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서점에서 구입하거나 빌려 읽어보았을 것이니, 여전히 '검증중'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든 그러한 과정에서 교과서마다의 서술 내용을 두고 역사학자들끼리 치열한 토론을 통해 정밀하지 못하거나 왜곡이 심한 주장은 저절로 도태될 것이고, 역사적 보편성과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합리적인 학설은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온전히 학계의 몫으로 남아야 합니다.

 

역사가 뭔지는 알기나 하나?

 

다른 과목도 아닌 역사 교육의 고갱이는 서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줄 아는 열린 사고와 비판적 능력을 키우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에겐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도 일본측이 볼 때는 테러리스트일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해줘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승리자인 왕건을 추켜세우기 위해 당대의 또 다른 영웅이었던 견훤과 궁예가 각각 지렁이와 폭군이 되어야만 하는 역사 서술의 '법칙'도 깨달아야 하고, 외로움에 잠못 이루고 술 마시기 좋아하는 범부의 모습을 한 성웅 이순신도 만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편협한 역사의식을 뛰어넘기 위한 가장 기초 단계입니다. 기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정작 역사 과목을 그토록 중시하는 중국 교과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곧, 피상적인 암기 수준에서 벗어나 안중근 의사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라도 (비록 적국일지라도) 주변 여러 나라의 교과서를 들춰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필요한 학습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시각이 충돌할 때,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눈에는 불꽃이 튑니다. 여러 자료를 쌓아놓고 읽어가면서 어떤 주장과 서술이 더 타당한지 각자 판단하게 되고, 한판 논쟁이 붙으면서 아이들은 제대로 된 공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른바 똑같은 시각으로 서술된 '순혈주의' 교과서로는 그 어떤 효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논쟁이 과열되다 보면 교사가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듣다보면 어쭙잖은 것들도 있고, 근거조차 없는 황당한 주장도 많지만, 아이들의 다양한 의견들은 어떻든 돌고 돌아 나름대로 타당한 지점에 수렴되는데, 대개는 교과서의 서술과 비슷합니다. 비록 각종 시험에 얽매이게 되면서 이러한 공부를 할 기회조차 많지 않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역사는 그런대로 여전히 유용한 과목 중 하나입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다양한 시각을 지닌 교과서를 추천하지는 못할망정 학계와 국가의 검정까지 받은 멀쩡한 교과서를 '좌편향'이라는 정치적인 이유로 문제 삼는 것은 심각한 역사의 퇴행이자 역사교육에 대한 도발입니다. 교육과학기술부뿐만 아니라 지역 교육청마다 내건 핵심 표어인 '창의적 인재 육성'을 기대하기란 백년하청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 과목이 유용한 이유 '열린 시각'

 

대학 시절 교수님의 추천으로 '북역(北譯) 삼국유사'를 읽으며 시각에 따라 해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배웠고, 북한 역사학계의 주장에도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역사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소중한 기회였으며, 역사 교사로서의 책무를 깊이 느끼게 한 자극제이기도 했습니다.

 

북한 교과서를 인용했다고 해서, 북한 학계의 연구 결과물을 읽었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단언컨대 철부지 아이들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려 저는 우리의 것들과 비교하고 대조하며 공부를 해오면서 대한민국을 더욱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정통성은 권력의 힘으로 우긴다고 확립되는 게 아닙니다. 민족에 대한 자긍심 역시 당위를 외치고 강요한다고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다양한 꽃들이 제각각 뽐내듯 어우러진 꽃밭이 아름답듯, 서로 다른 사상과 시각이 공존하는 가운데 경쟁해야만 건강하고 튼실한 역사의식을 지닐 수 있습니다.

 

정 의원의 인식대로라면 10년 넘게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온 저는 지금껏 '친북 교육'을 해온 것이며, 곧 아이들 앞에서 '이적 행위'를 일삼은 꼴이 됩니다. 이런 황당하기 그지없는 '고백'을 해야 하는 지금, 과연 21세기가 맞나요?

덧붙이는 글 | 워낙 '무서운'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현역 국회의원에 대한 이러한 비판글조차 빌미가 돼 해코지 당하지 않을까 적잖이 걱정됩니다. 말하자면, 검열 중에도 가장 무섭다는 '자기검열'인 셈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세상으로 회귀하게 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좌편향교과서, #정두언 의원, #김한종 교수, #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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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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