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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당시 청년방위대원 집단처형 사건을 증언하고 있는 강태석(80)씨
 한국전쟁당시 청년방위대원 집단처형 사건을 증언하고 있는 강태석(80)씨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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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직후 정부가 육군본부 직할이었던 청년방위대원들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집단학살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국정부가 전쟁당시 민간인 보도연맹원이 아닌 육군 소속 청년방위대원에 대한 집단학살 증언이 확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태석(80·충북 청주시 용암동)씨는 최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6·25전쟁이 터진 1950년 7월 말경 헌병들이 부대원 수십여 명 등을 경북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고가 총살했다"고 밝혔다.

강씨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 수원 방위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고향인 충북 영동군 용화면 지역 방위소위로 임명됐다. 당시 용화면 전체 청년방위대 대원들은 대략 300명.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방위군 대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징병에 나섰다. 용화면 지역방위대도 65명을 지원받아 전투에 투입하기로 했다. 강씨는 소대장으로 이들을 인솔해 영동읍으로 향했다. 그는 이 때를 1950년 7월 15일 전후로 기억했다.

영동에서 전북 무주군 지역청년방위대원들과 합류한 강씨의 대원들은 신설된 육군 제 5신병교육대에 편입돼 1주일 동안 수류탄 투척, 사격연습 등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도중 연대본부 끌려가 고문받았다"

청년방위대란?

1949년 11월 초, 당시 난립하던 청년단체의 통합을 위해 48년 결성한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주축으로 창설. 육군본부 직할로 주로 반공, 후방 치안유지에 협력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규모가 작은 면 단위에는 간부훈련학교에서 1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받게 한 후 방위소위로 임명했다.

청년방위대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던중 전쟁이 일어나 조직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지만, 대부분 장교가 현역에 편입됐고 대원들도 전열에 가담했다.

청년방위대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악화될 무렵에는 국민방위군을 조직하는 근간이 됐다.
그런데 훈련 도중 여러 대원들이 연대본부로 끌려가 보도연맹 가입 여부에 대한 추궁과 고문을 받고 돌아왔다는 것.

강씨는 "당시 일부 대원들은 신원조회 결격자들을 골라 집으로 보내주는 줄 알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답변한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며칠 후 밤 10시경. 중대 전체에 비상집결 명령이 떨어졌다. 완전무장 후 영동역에 집결했고 화물열차를 타고 다음 날 아침 경산역에서 하차, 경산중앙국민학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던 어느 날 보도연맹 가입 대원들을 모두 빼내 머리를 빡빡 깎은 뒤 6중대를 신설해 편입, 강당에 가둬 놓았다. 강당에 갇힌 6중대원들은 100여 명. 이중 충북 용화면 사람들이 20명 가량이었고 전북 무주군 설천면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강당에 격리된 지 일주일 쯤 후인 7월 말경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전원 총살당했다.

강씨는 "청년방위대교육대 정보과에 가서 육군 중령을 만나 강당에 수용된 대원들을 선처해 달라고 요구한 후 '걱정말라'는 답변을 듣고 학교로 돌아와보니 이미 대원들이 없었다"며 "방위장교에게 행방을 묻자 '헌병들이 와서 손을 엮은 뒤 트럭에 싣고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고가 총살했다'고 말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보도연맹 가입이유로 무고한 대원 총살...진상 밝혀야"

강석태옹
 강석태옹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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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얘기를 듣고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눈물까지 흘렸다"며 "죽은 대원들 중에는 국민학교 동창생을 비롯,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당시 희생된 자신의 대원 20여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군과 싸우겠다고 자원한 충직한 대원들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무고한 대원들을 총살할 수가 있느냐"며 "지금이라도 진상을 밝혀 명예회복과 함께 유가족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당시 처형된 인솔 대원들은 용화면 조동리 이갑문·장한선·박태하·정규태·박규성·이남희·양성수·이종관·강원형, 안정리 정용석, 원당리 강챙길·김삼조·박봉호·이길주·이금도·장재호 강영희, 용화리 양도영·이갑봉·최창덕, 용강리 김용한, 자계리 김해봉, 횡지리 김종진, 여의리 이시영 등이다. 

박만순 위원장 "영동군에서만 코발트광산에서 200여명 처형"

이에 대해 충북역사문화연대 박만순 운영위원장은 "조사결과 당시 영동군 11개 읍면 전체에서 영동읍과 추풍령면, 용산면을 뺀 9개 면 방위대원들이 처형된 것으로 확인됐다"며 "영동군에서만 200여명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강씨가 증언한 영동과 무주외에도 충북 옥천 등에서 끌려와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처형된 청년방위대원들도 있었다"며 "당시 보도연맹 가입 방위대원들에 대한 광범위한 집단처형이 자행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전쟁당시 헌병대 초급간부였던 김만식(85·충북 청주시 거주)씨는 지난 해 증언을 통해 "당시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보도연맹원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직접 받았다"며 학살지시가 대통령 특명에 따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강씨는 1951년 군에 입대했고 육군소위로 제대한 후 공무원 등을 역임했다.   


태그:#청년방위대, #집단학살, #이승만, #보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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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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