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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태지다. 90년대만큼의 '강도'는 아니지만 음반시장의 상황을 상대적으로 비교하자면 오히려 놀랄 정도다. 4년 만의 컴백. 그리고 10만 장의 사전주문량 완전 매진. 놀랍다. 서태지는 흥행에 대한 절대 보증수표임을 또 한 번 증명했다.

하지만 서태지가 '슈퍼스타'임은 분명하지만 그가 '절대적으로 사랑받는' 가수가 갖추어야 할 능력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노골적으로 말해 서태지의 가창력에 '최고'의 타이틀을 붙이기는 좀 그렇다. 그가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 능력을 가졌다고도 할 수 없다. 또 무대 매너가 '가장으뜸'이라고도 할 수 없다.

물론 그가 보여준 능력의 놀라움은 이미 16년 전에 검증된 것이다. 하지만 음악은 결국 주관적인 '공명'의 문제 아닌가? 내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지의 흥행은 언제나 절대적이다. 도대체 왜일까?

철저한 '승자'의 이미지로 문화적 공명에 성공한 서태지

많은 이들이 이미 분석했는것처럼 '서태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그에게 모든것을 의탁했던 마니아들이 충분한 소비력을 갖춘 계층으로 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창 활동하던 1992-1995년의 가요계, 더욱 넓게 1990년대 가요계 전반에는 서태지를 제외하고도 나름 10대들의 마음을 울리는 여러 가수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회용'이었고 서태지는 장수하고 있다. 즉 서태지와 팬들의 '문화적 공명'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서태지 자체의 이미지가 아니라 '다른 가수와의 경쟁체계에서 항상 승리하는' 비교우위적 '영웅'으로서 서태지가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중고등학생들의 '서태지 사랑'은 상당히 분석적이었다. 모두가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애정'을 단순한 '빠순이, 빠돌이'로 취급당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태지가 대단한' 이유를 여러 각도에서 제시했다.

서태지에게 '혁명'이라는 단어가 별다른 제약없이 응용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팬들의 '의미주기'가 과잉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들은 '음악'을 '정서'로서 사랑한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에 '철학'을 부여하고, '사회와 자신의 관계'를 음악 속에 대입했다.

그들의 이러한 '의미주기'는 서태지와 다른 가수들과의 '경쟁체제'를 고의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일조한다. 즉 '난 서태지가 좋아~', '넌 넥스트를 좋아해라~'라는 자기만족의 의미가 아니라 "서태지가 넥스트보다 좋은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겠다는 일종의 비교우위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 고등학교 교실에서는 서태지, 신해철, 이현도 등을 비교하는 토론장이 늘상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서태지가 약간의 우위를 차지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 '우위'가 절대적인 능력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 서태지의 팬들이 각인한 '서태지'는 단순히 '우상'의 의미가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월등한 대장'의 존재였다. 그리고 이렇게 힘든 싸움의 승전보는 오랫동안 기억된다. 이건 스포츠에서 '기록경기'보다 '대항경기'에 월등한 자본의 집적성이 형성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서태지'가 대단한 것을 떠나서 서태지를 '대단하게' 증명하였던 자신에 대한 만족이 바로 '서태지 열풍'의 핵심코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팬들 스스로의 '증명'을 만족시켜 줄 것이다. 자신의 분석이 '올바르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처럼 세상에 기쁜 일은 없다.

서태지는 그러한 '상생'의 코드다. 아마도 서태지는 그의 음악성을 떠나서 팬들과 그렇게 '공명'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무조건 흥행하는 것이다. 음악성은 두번째 문제라는 것이다.

철저한 '학습성'이 강요되는 서태지 음악 듣기

그의 음악성을 살펴보자. 물론 내가 전문가가 아니기에 음악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음악적 평가요소'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접근되는지에 주목하자. 우선 음악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중음악에 '절대적 수준'의 음악성을 고려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대중음악에서 음악성을 따지는 것은 특정한 시대적 조건에 따라 대중들과 호흡하는 음악적 트렌드를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즉 서태지 음악이 '절대적으로 높은 수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모순이다. 그럼에도 서태지의 '높은 음악성'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를 좋아한다.

여기에는 서태지 팬들이 '서태지 음악'을 어떻게 향유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태지 팬들은 '서태지 음악'을 '의무적으로 구입'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마치 음악성에 상관없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구입했다는 '광신도'의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부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태지 팬들은 그의 음악이 '수준'이 있기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그 음악적 수준은 어떻게 확인되는 것일까?

서태지 음악듣기의 핵심은 '반복학습'이다. 이것은 16년 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서태지팬들만의 '서태지 음악듣기' 방법이다. <난 알아요>도 그랬다. <하여가>는 더욱 그랬다. <교실 이데아>는 심각했다. <컴백홈>은 무슨말인지 들리지도 않았다. <울트라맨>은 팝송인줄 알았다.

이렇게 서태지 음악의 '첫대면'은 항상 생소했다. 대중음악에 있어서 이러한 '생소함'은 곧 대중과 멀어지는 절대적 이유가 된다. 하지만 서태지 음악은 달랐다. "계속 들어보면! 달라진다!"는 모종의 압박이 늘상 존재했다.

<난 알아요>가 처음 등장했을때 이를 비평했던 평론가들이 있었던 것처럼, <하여가>에서 뜬금없는 태평소 소리에 흥행실패를 점쳤다는 언론들이 있었던 것처럼, 서태지 음악은 순간의 감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의 가치를 '논리적으로' 이해할때까지는 서태지음악은 듣고 또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단순히 '서태지 음악'을 폄하하다가는 언제나 논리적으로 패배했다.

음악에 대한 '반복듣기'가 강요된다는 것. 이는 심각한 문제다. 음악은 '감성'에 의존하는 것인데 이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함을 어떻게 강요한다 말인가? 하지만 서태지 음악듣기는 달랐다. 서태지 팬들은 이를 '즐거운 자율학습'으로 받아들였다. 팬들은 그렇게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들었다. 그러면서 '의미'를 찾아갔다. 그렇게 서태지음악은 학습된다.

문화적 '감성'을 자극해야 될 대중가요가 학습적 '논리'를 자극하면서 서태지 음악은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수학공식, 혹은 영어단어 같은 개념으로 팬들에게 각인된다. 이것은 '내가 잃어버려도 되는 그런 감각적인 단순함'이 아니라 '영원히 간직해야 하는 소중함'을 말한다. 서태지 팬들에게 '서태지 음악'은 일종의 '지식'이다.

서태지음악은 이런 것이다. 자연스럽게 '의미를 찾아가주는' 팬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의 음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팬들은 자신의 해석이 옳았음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찾는것에 더욱 더 집착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대장을 지킬 것이다.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아이돌 팬들과 다르다는 것은 그들이 훨씬 '세련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가장 본질적인 차이다.

덧붙이는 글 | http://blog.daum.net/och7896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서태지, #서태지와아이들, #문화적공명, #서태지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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