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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들어가는 17세기 동서교류사로의 여행.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들어가는 17세기 동서교류사로의 여행.
ⓒ 추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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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르메르의 그림 안에는 사회적 콘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 코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가 태어나고 그림을 그린 네덜란드는 데카르트가 '가능성의 집합소'라 부를 정도로 동서양의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티머시 브룩이 쓴 <베르메르의 모자>(추수밭 펴냄)'는 예술책과 역사책의 장점을 두루 갖췄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비버 펠트, 중국 도자기, 세계지도, 은화 등이 어떻게 네덜란드 델프트의 거실까지 들어오게 됐는지 설명해주는 역사 책이면서, 책을 읽고 나면 베르메르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되는 예술서적이기도 하다.

미술사와 역사의 경계에서 17세기 교역망의 확장 과정을 그림 속에 등장한 소품의 유입경로로 안내해준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동서양 사람들의 세계화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 무역 발전의 빛과 그림자, 난파와 대량학살의 비극, 세계 기후 변화의 패턴 등을 통해 17세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티머시 브룩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소녀의 얼굴보다 진주 귀고리에,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는 집안으로 옮겨진 남녀의 데이트보다 장교가 쓴 화려한 모자에 주목해보길 권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들이 아니라 어쩌면 화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을 17세기의 역사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베르메르의 시대는 군대가 시민 사회로, 군주제가 공화제로, 가톨릭이 칼뱅주의로, 상점이 회사로, 제국이 국가로, 전쟁이 교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58쪽)

베르메르가 남긴 유일한 풍경화의 주제는 델프트 남동쪽 항구이다. 이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라인 강에 다다른다. 수문 왼쪽의 빨간 타일 지붕은 동인도회사의 사무실과 창고의 지붕이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동양의 문물이 빠르게 유입됐다.

델프트의 풍경, 1659-60.
 델프트의 풍경, 1659-60.
ⓒ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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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를 지배하던 열정은 '동양과 서양을 잇는 미지의 바닷길'을 찾는 것이었다. 여행과 만남과 새로운 지식을 통해 과거에는 갈 수 없었던 거리를 줄이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원하는 세계를 찾아나섰다. 세계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베르메르처럼 고향에만 머물던 화가들까지도 변화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림 속 인물은 포목상이기도 했고, 측량 기사이기도 했고, 망원경 개발자이기도 했고, 베르메르 가족의 친구이기도 했던 안토니 반 레벤후크로 추정된다. 터키 카펫이 전경을 채우고 있는 이 그림에는 빌렘 블라외가 그린 유럽 해도와 헨드리크 혼디우스가 제작한 지구의가 놓여 있다.

생각에 잠긴 지리학자는 진지한 자세로 전 세계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지리적 지식을 이용하여 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애쓰는 모습이다.  

중국에서는 유럽에서처럼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지도록 수정하고 다듬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평면이라는 전통적 우주관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여전히 통했다. 중국 상인들은 배를 타고 지구를 돌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리학자, 1668년
 지리학자, 1668년
ⓒ 슈테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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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국에는 베르메르의 지리학자처럼 누군가에게 실제로 필요한 유용한 지식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외부 세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통합하길 원하고, 또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게 어찌보면 당연했다.

원근감을 가볍게 왜곡하여 진홍색 제복을 입은 장교와 젊은 여성 사이의 대화에 시각적 활력을 주고 있는 이 그림에서 눈여겨 볼 지점은 군인의 모자다. 장교가 쓰고 있는 모자는 캐나다 동부 삼림지대에서 포획한 비버의 가죽 펠트로 제작된 것이다.

16세기 유럽의 모자 장인들은 양모를 사용해 펠트를 만들었는데, 이는 비버 펠트에 비해 거칠고 엉기는 성질이 부족했기 때문에 모자를 만들기에 썩 좋지 않았다. 16세기 말이 되면 비버 펠트를 시베리아로부터 공급받았지만 육로로 운송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때 등장한 창구가 캐나다였다. 원주민들은 비버 가죽 한 장과 칼 스무 자루를 맞바꿨다. 캐나다는 유럽인들에게 중국으로 가는 길이었고, 비버 펠트로 만든 베르메르의 모자는 그 과정에서 얻게 된 선물이었다. 그리고 유럽 남자들의 유행을 위해 많은 원주민이 전쟁과 기아로 희생되었다.  

이 외에도 책에는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에 등장하는 중국접시가 어떻게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델프트의 거실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 <저울을 든 여인>을 통해서는 은화가 갖는 의미와 그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자세한 배경설명이 나온다. 또한 담뱃대를 물고 있는 중국 신선을 처음으로 그린 델프트 접시에서는 흡연의 역사를, 베르메르와 동시대 인물인 핸드리크 반 데르 부르흐의 <카드놀이>에서는 전지구적 이동의 소용돌이에 희생된 사람들의 사연을 이끌어낸다.

장교와 웃는 소녀, 1657-1659년
 장교와 웃는 소녀, 1657-1659년
ⓒ 프릭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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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을 세계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저자는 말한다.

"한 지역의 역사가 다른 모든 지역으로 우리를 연결해주고, 결국에는 전 세계의 역사와 연결해준다는 걸 안다면, 위대한 업적이든 비극적인 대학살이든 어느 하나 우리 유산이 아닌 게 없다. 우리는 이미 생태적으로 이렇게 사고하는 방식을 배우고 있다. 사실 우리 시대의 지구 온난화는 어떤 면에서 베르메르 시대의 전 지구적 혹한으로 인한 대재앙의 영향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고, 심지어 이러한 변화가 전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313쪽)

17세기 무역과 이동이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추적하는 이 책에는 다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마닐라 총독 세바스티안 코르쿠에라, 중국인 <장물지>의 저자 원전헝, 델프트에 살았던 얀 베르메르 등 당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인간은 혼자 떨어진 섬이 아니라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라는 저자의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베르메르의 말년을 통해 17세기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17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전례 없이 많은 그림들이 거래됐다고 한다. 전 세계 박물관에 17세기 네덜란드 작품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1672년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베르메르의 수입원이던 미술 시장이 무너졌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베르메르는 그림을 의뢰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빌리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의 한 상인에게 마지막으로 빌린 돈은 은화 1000길더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한다. 그 상인은 아마 베르메르의 그림을 선물(先物)로 거래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활고는 그의 영감을 앗아갔을 것이다. 이 시기에 그린 베르메르 후기 작품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세 작품은 모두 수줍은 듯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이다. 그 중 하나만 전작과 같은 탁월함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베르메르는 1675년 12월, 마흔 세 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저자는 아마도 치명적인 감염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베르메르는 델프트 풍경화에 등장하는, 첨탑이 있는 구교회에 묻혔다. 먼저 죽은 아이들 셋과 함께.

무역으로 호황을 누리던 델프트의 위대한 화가 베르메르의 삶은 경제적 몰락과 함께 끝이 났지만, 무역과 여행과 전쟁이 열어놓은 문은 여전히 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베르메르의 모자 -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본 17세기 동서문명교류사

티모시 브룩 지음, 박인균 옮김, 추수밭(청림출판)(2008)


태그:#베르메르, #17세기, #동서교류, #무역,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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