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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동이라, 동네 이름이 참 아름답네요. 이 동네가 장미꽃으로 유명했던 곳인가 보죠?"

"천만에요, 장미꽃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쌀 창고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일제가 우리 농민들로부터 수탈한 쌀을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보관했던 쌀 창고 말입니다."

 

지난 22일 낮 12시 경이었다. 서울을 출발한 여행사 버스가 군산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때맞춰 40대 후반의 여행사 여성가이드가 군산 장미동에서 조기매운탕으로 점심을 먹을 예정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었다. 장미동이라는 이름에서 선뜻 떠오른 이미지는 장미꽃이었다. 그래서 군산에서 몇 년간 근무했다는 옆자리의 일행에게 물었던 것이다.

 

장미동은 장미꽃이 많아서 생긴 이름 아닌가요?

 

그런데 장미꽃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닌가. 버스는 곧 낡은 창고 같은 건물들이 있는 거리를 지나 제법 넓은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버스에서 내려 앞장선 가이드를 따라 점심이 예약된 식당으로 향했다.

 

주차장을 나서 조금 걷자 곧 바닷가다. 넓은 강줄기처럼 보이는 저 건너편이 장항이었다. 바닷가 거리는 썰렁한 모습이었다. 구름다리 끝에 있는 선착장에는 작은 연락선 한 척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항과 이곳을 오가는 배라고 한다. 바다는 썰물로 물이 빠져 치부처럼 지저분한 갯벌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이 동네가 옛날에는 굉장히 번창했던 곳인데 지금은 많이 퇴락했지요."

 

바닷가에는 겨우 두 척의 배가 매어있을 뿐이었다.

 

"이쪽이 군산 내항인데 지금은 대부분 신항인 외항으로 옮겨간 상태지요."

 

항구의 기능을 상실한 바닷가는 찾는 사람이나 배가 거의 없고 텅 빈 모습이었다.

 

자그마한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아주머니가 반색을 한다. 한꺼번에 30여 명의 손님이 몰려들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식당인들 손님이 많을 턱이 있겠는가. 점심시간이었지만 손님은 우리 일행들 뿐이었다.

 

"아! 맛있다! 찌개 국물 맛이 끝내주는 걸"

 

밥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금방 나온 조기찌개 맛을 본 일행이 맛있다고 입맛을 쩝 다신다. 허술하고 초라한 식당이었지만 음식 맛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조기찌개 뿐만 아니라 조개젓이며 김치와 나물도 맛이 좋았다.

 

주인인 듯 보이는 아주머니와 또 한 명의 아주머니가 부지런히 시중을 들고 있었다. 처음 들어설 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던 다른 사람들도 음식맛과 친절하고 상냥한 손님 대접에 만족한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서울과는 달리 이곳 식당에서는 커피 대접을 하지 않습니다. 커피 드실 분들은 주차장 옆 건어물 가게에 가시면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점심을 먹은 다음 커피를 찾자 여행사 가이드 아주머니가 다시 안내를 한다. 그냥 문밖으로 나왔다. 길거리와 선착장은 여전히 조용한 모습이었다. 승선장 입구의 작은 박스 안에 있는 근무자가 멀건 눈빛으로 우리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번성했던 거리는 썰렁한 정적만 감돌고

 

"사진만 찍지 말고 이것 좀 사가세요, 아주 싸게 드릴 테니까."

 

주차장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가게 앞에서는 생선을 펴놓고 말리고 있었다. 생선으로 날아드는 파리를 쫓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막대기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자 가게를 지키고 있던 할머니가 말린 생선을 권했지만 별로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많지 않아 거리는 여전히 한산한 모습이었다. 주차장 맞은 편 길 건너에는 창고처럼 생긴 건물 몇 채가 서 있었는데 아주 낡은 모습이었다. 그 건물 중의 한 채는 생선시장 간판을 달고 있었지만 문이 닫혀있었다.

 

"그 건물 오래된 거예요, 왜정 때 쌀 창고로 쓰였던 건물일 걸요."

 

역시 그랬다. 마침 길가에 나와 있던 맞은편 가게 주인에게 물으니 일제 때의 쌀을 보관하던 창고였다는 것이었다. 쌀 창고가 많아서 붙여진 동네이름 장미동에 일제 때 사용하던 쌀 창고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몇 번씩 보수하고, 개축하여 쓰고 있는 건물들이겠지만, 창고 건물 두 채는 나란히 서 있었는데 지붕이며 벽체, 그리고 전체적인 모습이 옛날 창고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건물들이 바로 군산항에서 가까운 곡창지역인 옥구와 김제 만경평야, 부안과 정읍, 고창, 그리고 논산과 강경 일대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보관했던 창고들이었다.

 

부산, 목포와 함께 한 때는 번성했던 항구 중의 하나가 군산항이다. 그래서 항구를 끼고 있는 장미동 일대는 일제시대와 1980년대까지 번창했던 지역이었다. 물론 일제 때는 쌀 창고와 그 쌀을 실어가기 위한 빈번한 화물선 입출항에 따른 선원들과 쌀을 배에 싣는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으로 쌀을 반출하는 대표적인 항구는 목포항과 군산항이었다. 목포항이 전남지방에서 생산된 쌀을 실어가는 항구였다면 군산항은 전북지방과 충남 남부지방의 쌀을 실어가는 항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일제가 수탈한 우리 쌀을 실어가기 위해 세운 쌀 창고들

 

쌀은 조선인 농민들에 의해 생산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본인 지주들의 논에서 생산된 것들도 많았다. 그 일본인 지주들은 당연히 동양척식회사를 통하여 우리 조선인들에게서 빼앗은 농토를 차지한 경제침탈의 앞잡이들이었다. 조선인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기고 피눈물을 흘리며 만주로 떠나거나 일본인 지주 밑에서 소작농이 되어 어렵고 서러운 삶을 이어갔다.

 

군산항은 선원이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인근 일본인 지주들이 자주 드나드는 사교장의 기능까지 하게 되었다. 돈 많은 부자 지주들의 사교장이요, 선박들의 입출항이 많아짐에 따라 술집과 음식점, 숙박업 등의 유흥서비스업이 번성했던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장미동이 흥청거리는 동안 이곳 쌀 창고들은 가득가득 채워져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모두 가난으로 찌든 조선인 농민들의 피눈물이었고, 나라 잃은 백성들의 비통한 절규가 서리서리 배어있는 쌀이요 창고들이었다. 

 

광복 후에도 이곳 군산항은 다른 항구들 못지않게 물동량이 많은 편이어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중심에 바로 이 장미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군산 내항에 토사가 쌓이면서 항구의 기능이 떨어지자 결국 항구는 외항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장미동 일대는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옛날에는 군산의 대표적인 중심거리였던 이곳이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한적한 동네가 되고 만 것이다. 조용한 거리를 걸어 버스가 주차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돌아가다가 길가의 건어물 가게로 들어가 보았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 40대 중반의 남자가 커피 마시러 오셨느냐며 자판기 앞으로 안내한다. 여행사 가이드가 말했던 그 건어물 가게였다. 그가 뽑아준 커피를 마시며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관광객 몇 사람이 마른 멸치와 다른 건어물을 사들고 나온다.

 

그런데 정작 장사가 잘 되는 곳은 가게 문밖 주차장 쪽에 있는 먹갈치 판매 좌판이었다. 서해에서 잡힌 갈치를 소금에 약간 절인 중간 크기의 먹갈치가 10마리에 12000원씩에 팔리고 있었다.

 

쓰라린 역사를 접고 밝은 거리로 발돋움하는 동네

 

"저 사람 이곳에서 몇 년 째 갈치 장사하는 사람입니다. 이 먹갈치 맛이 아주 좋아요."

 

그런데 이 좌판은 상당히 유명한 곳이어서 벌써 몇 번째 이곳에서 먹갈치를 사갔다는 사람이 또 갈치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 중의 한사람도 두 번째라고 했다. 좌판의 먹갈치는 순식간에 10여 명의 사람들에게 팔렸다. 갈치는 머리와 꼬리를 잘라내고 두 토막을 내어 종이와 비닐로 포장한 다음 얼음을 채운 스티로폼 상자에 담겨 버스 짐칸으로 옮겨졌다.

 

"이 장미동이 진짜 멋진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것 같습니다. 일제 때 금융침탈의 역할을 했던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국가지정 문화재로 등록 되었답니다."

"동네에 문화재 한 개 생겼다고 뭐 대단할 것 있습니까"

 

"물론 아니죠? 이 동네가 쌀 창고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창고 외에도 일제 때 지어진 건물들이 제법 많거든요, 군산 세관도 그렇고. 그래서 이 동네를 관광지역으로 개발한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동네에 '근대 역사박물관'을 세운다고 합니다."

 

일제의 우리 쌀 수탈 전진기지였던 장미동이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원이 생기고, 광장이 들어서고, 박물관도 세워지고, 거리가 밝은 모습으로 개발의 시동을 걸고 있다는 것이었다.

 

악랄한 일제에 의해 쓰라린 역사의 흔적이 남은 장미동, 그 장미동이 장미꽃처럼 밝고 아름다운 동네로 다시 태어난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행들은 다음 코스인 선유도를 향해 여행사 버스에 올랐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군산항, #일제의 수탈, #쌀 창고, #장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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