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45킬로미터. 집에서 서점까지 달려야 하는 거리입니다.
책 몇 권을 사러 가는 길 치고는 너무 멀지요. 봄내 벼르고 벼르던 서점 가는 날. 11년 무사고 운전자를 놔두고 운전대를 초보인 제가 잡았습니다.

2층에서 1층 운동장으로 후다닥 뛰어내려갔던 아이들을 계단은 아직 기억할 것 같습니다.
 2층에서 1층 운동장으로 후다닥 뛰어내려갔던 아이들을 계단은 아직 기억할 것 같습니다.
ⓒ 정진영

관련사진보기


초보, 드디어 2단 기어를 써보다

춘천에서 단양군 매포까지는 길이 단순합니다.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그대로 직진입니다. 남은 거리 숫자가 작아질수록 초보 운전자의 등에는 땀이 배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고개마루에서 하산하는 길. 시속 10킬로미터 이하로 엉금엉금 내려오는데, 첩첩이 겹쳐진 산들이 한 줄씩 사라집니다. 몇 번인가 좌로 우로 바삐 움직이니 바로 앞 산자락만 남습니다. 면허를 딴 지 한 달만에 처음으로 2단 기어를 써 봅니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리 새한서점.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리 새한서점.
ⓒ 정진영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쓰는 네비게이션의 가장 큰 단점은 "목적지 주변에 도착했습니다"라는 멘트를 끝으로 더 이상 안내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간판이 없는 서점에 처음 가는 길. 엉뚱한 방향으로 가다가 불법 유턴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물어 물어 찾아간 적성초등학교

양방향 소통이 불가능한 좁은 산길을 막 빠져나온 코란도 아저씨에게 새한서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여쭤봤습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두어번 갸우뚱하더니 "새한서점? 서점은 잘 모르겠고, 적성초등학교에 도서관이 있긴 있어요" 합니다.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새한서점을 도서관으로 알고 있나 봅니다.

새한서점 이금석 사장님. 곧 적성초등학교를 떠나 사람들이 책과 함께 쉬어갈 수 있도록 물가에 새 터전을 마련하신다고 합니다.
 새한서점 이금석 사장님. 곧 적성초등학교를 떠나 사람들이 책과 함께 쉬어갈 수 있도록 물가에 새 터전을 마련하신다고 합니다.
ⓒ 정진영

관련사진보기


폐교를 통으로 사용하는 새한서점은 쿠하네 엄마 아빠가 연애할 때 자주 가던 데이트 코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용돈이 넉넉치 않은 대학생 커플에게 몇 천 원의 문화비만 내면 장시간 자리를 차지해도 눈치 주지 않는 '민들레 영토'와 고대 앞에 있던 2층짜리 큰 헌책방 새한서점, 시내 한복판에서 공짜로 그림 구경 할 수 있는 인사동 갤러리들 만큼 좋은 장소도 드물었지요. 그 중에서도 새한서점에 가면 쿠하엄마가 좋아하는 책들이 반값도 안 되는 가격표를 달고 있어 젊은 연인에게 좋은 '선물가게'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고대앞 새한서점에서 봤던 장면입니다. 책장 밑으로 나 있던 새한서점 통로에서 명상책에 빠져 있던 남자친구에게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아...고대앞 새한서점에서 봤던 장면입니다. 책장 밑으로 나 있던 새한서점 통로에서 명상책에 빠져 있던 남자친구에게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 정진영

관련사진보기


당시 새한서점의 책장은 벽이자 문이기도 했습니다. 책장 사이를 문짝 크기로 비워두어 마치 열려진 좁은 문 같았습니다. 철학 책장 뒤로 심리학 책장이 나오고, 미술사 책장을 지나가면 여행이나 운동에 대한 책들이 나타납니다. 적성초등학교로 옮긴 새한서점은 교실로 먼저 대분류를 하고, 교실 안에서 다시 예의 그 책장 통로로 다른 종류의 책들을 연결합니다.

중고 책을 담은 헌책방 중고 책장. "쿠하야 하나 골라봐ㅎㅎ"
 중고 책을 담은 헌책방 중고 책장. "쿠하야 하나 골라봐ㅎㅎ"
ⓒ 정진영

관련사진보기



학년별, 과목별로 자 정리된 참고서들이 빈 교실을 지키고 있네요. 인터넷 새한서점에 오시면 초중고 문제집도 살 수 있습니다.
 학년별, 과목별로 자 정리된 참고서들이 빈 교실을 지키고 있네요. 인터넷 새한서점에 오시면 초중고 문제집도 살 수 있습니다.
ⓒ 정진영

관련사진보기


안암동 터줏대감이 공기 좋은 단양군 적성면 산골짜기 농촌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인터넷 덕분입니다. 새한서점(www.shbook.co.kr) 이금석 사장님은 초로의 아저씨지만 인터넷으로 사업을 하는 '젊은 어른'이십니다. 컴퓨터를 믿고 그 많은 책 살림을 이끌고 산골 마을로 삶터를 옮기셨다는 건 정말 엄청난 용기!!!입니다.

'빨리빨리 국민성'으로 주문한 지 한나절 지나면 책을 받아볼 수 있는(오전 10시 이전에 주문하면 서울 일부 지역에 당일 총알배송 서비스가 되는 인터넷 서점까지 등장했습니다) 나라에서, 굳이 땅값 비싼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지 않아도 됐겠지만, 홈페이지만 볼 때와 직접 새한서점을 찾아와 보니 거리가 만만치 않아서 사장님의 책방 이사가 더 대단해 보입니다.

엄마가 차분히 책을 고를 동안 쿠하는 아빠와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습니다. 운동장 가에 핀 민들레를 죄다 뜯어서 홀씨를 불어대는 바람에 쿠하님 다녀 가신 자리마다 남아난 홀씨가 없습니다. 낡은 축구공과 텅 빈 운동장이 한때 8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복작거리며 다녔던 학교라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운동장에서 뛰놀던 그 아이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요?

아빠가 쿠하와 축구로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엄마는 월척을 다섯 권이나 골랐습니다.
 아빠가 쿠하와 축구로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엄마는 월척을 다섯 권이나 골랐습니다.
ⓒ 정진영

관련사진보기


텅 빈 적성초등학교에서 책의 향기를 뿜어내는 새한서점은 곧 새터를 찾아 이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현재 있는 자리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물가에 부지를 마련해, 멀리서 찾아오는 오래된 손님들이 가족과 함께 하룻밤 묵어 갈 수 있도록 꾸민다네요.

지금까지는 관사에서 주무시게 했는데, 운영비가 비싼 학교보다는 물이 보이는 자리에 더 여유 있는 공간을 마련하신다고요. 내년 가을쯤, 한 사람 더 늘어날 쿠하네 가족은 1박 2일로 다녀오게 되겠지요. 그림이 많이 들어간 디자인 책을 포함해 다섯 권이나 샀는데도 2만 원만 받으셔서, '주스라도 사 갈 것을...', 빈 손으로 찾아간 손님은 조금 미안해집니다.

오가는 길, 차 안에서 쿠하에게 새한서점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쿠하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엄마랑 아빠랑 데이트 하던 곳이라고. 아빠가 엄마한테 책 선물 하던 집이라고요. 운동장에서 노는 게 피곤했던지 녀석은 모친께서 말씀하시는 데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곧 잠들어 버립니다.

텅 빈 운동장에 쿠하가 보낸 홀씨들이 날아다닙니다.
 텅 빈 운동장에 쿠하가 보낸 홀씨들이 날아다닙니다.
ⓒ 정진영

관련사진보기


아, 갑자기 나타난 이 노란 그림이 뭐냐구요?
빨간 포스터 물감으로 큼직하게 '면허 딴 지 3일째!'이라고 자동차 뒷 유리창에 붙이고 다니려다 좀 심한 것 같아서 대신 붙인 그림입니다.

"엄마가 운전하는데, 배 속에 내 동생 까이유가 있고, 쿠하가 떠드는 그림이에요."

쿠하아빠가 직접 만들어준 픽토그램을 보고 쿠하가 하는 설명입니다.
왕초보에 임산부, 게다가 장난꾸러기 아이가 뒤에 타고 있는 이 차를 보시면 방어운전, 평소보다 더 긴 안전거리 확보 부탁드립니다. 꾸벅.

도로에서 이 그림이 붙은 차를 보시면 안전거리 확보해 주세요.
 도로에서 이 그림이 붙은 차를 보시면 안전거리 확보해 주세요.
ⓒ 정진영

관련사진보기



태그:#쿠하, #걷기 , #단양, #새한서점 , #헌책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