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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는 민주화 이후 오히려 담론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이슈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아예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거나 간혹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갈등만 증폭되는 현상도 보입니다. 담론의 복원을 위해 어느 때보다 건전하고 창의적인 언론활동이 요청되는 시기입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매체창업 또는 칼럼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우리 사회의 건전한 담론형성과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해온 분들이 진행하는 '저널리즘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들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이 쓴 기사를 이번 학기에는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기자 주>

 

커리어우먼의 아이콘(초상), 영어의 달인, 재능과 적극성을 겸비한 '알파 걸'…. 세계 212개국, 1억 5000만 명 이상이 시청하는 뉴스 채널 CNN의 서울 지국장 손지애씨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삼풍백화점 붕괴부터 북핵 협상, 2002년 월드컵, 황우석 박사 논문조작 파문 그리고 최근 삼성특검에 이르기까지 격동하는 한국에 세계인의 눈과 귀가 쏠릴 때, 거기엔 늘 '손지애 특파원'이 있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은 지난 18일 <저널리즘 특강>에 손 지국장을 초청, '외신기자의 눈으로 본 한국 언론 선진화의 과제'를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한국인이면서 미국 언론의 특파원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그가 바라본 한국 언론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는 "독자들에게 신용을 잃은 한국 언론이 안타깝다"는 걱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어떤 신문이 전달하는 얘기에 독자가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보도와 비평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는 믿음은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독자의 믿음을 너무 잃은 것 같아요. 국민의 50퍼센트는 어떤 언론을 바이블(성경)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는 그 언론을 새빨간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요. 그건 언론과 국민 모두에게 치명적인 일입니다."

 

손 지국장은 한국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진실하게 보도한다는 원칙 등 언론 윤리를 철저히 지켜나가야 이런 상황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스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필요

 

인터넷, 정보화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 누구나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그것을 생산, 재생산할 수 있는 시대에 전통적인 미디어가 여전히 존재 가치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손 지국장은 "같은 뉴스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어떤 소식을 전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시청자를 충분히 이해시키고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것이다.

 

CNN은 얼마 전 황우석 사건 일 주년 특집방송에서 복제 개 '스너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황우석 박사가 체세포 복제를 통해 탄생시킨 스너피의 오늘을 보여주며 황 박사 사건의 의미를 짚어가자,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딱딱한 논문 얘기가 중심이 됐다면 그런 호응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자라면 사람 가슴을 뛰게 만드는 기사를 써야

 

"기자는 시청자의 심금을 울려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손 지국장은 5살의 이라크 소년 유세프 얘기를 예로 들었다. 어느 날 복면을 한 괴한이 집 밖에서 놀고 있던 유세프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심한 화상을 입고 겨우 목숨만 건진 유세프의 참극을 CNN의 바그다드 특파원이 취재했다. 이 기사는 전 세계인의 공분과 동정을 이끌어냈고, 많은 사람들이 거액을 기부해 유세프 재단이 만들어졌다. 유세프는 미국으로 건너가 화상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기자가 거창한 일도 할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손 지국장은 또 완전히 묻힐 뻔 했던 노근리 사건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려 퓰리처상을 받은 AP통신 한국 특파원 최상훈 기자의 예를 들며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기사'를 쓰기 위해 기자들이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뉴스거리의 덩어리

 

손 지국장은 "외신의 눈으로 봤을 때 한국은 뉴스거리의 덩어리"라고 말했다. 우선 남북 대치 상황이 외신의 관심을 끈다. 한국인 스스로는 50년 넘게 이어진 군사적 긴장에 많이 무감각해져 있지만, 외국인들은 다르다. 특히 핵무기를 둘러싼 북한의 움직임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된다. 그래서 CNN 한국 지사의 뉴스 보도 1순위는 늘 북한 관련 뉴스다.

 

세계 13위 규모인 한국 경제와 이미 '글로벌 플레이어(Global Player)'가 된 한국 대기업들의 동향도 외국인의 중요한 관심사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불구속 기소된 일도 외신이 주목한 뉴스입니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이죠."

 

기상천외한 사건 사고가 많다는 것도 한국에 주재한 외신 기자들이 바쁜 이유다.

 

"95년 CNN 한국 특파원으로 발령을 받고 서울 지사 문을 공식적으로 열기 이틀 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났습니다. 운전 중에 라디오에서 그 소식을 듣고 바로 차를 돌렸어요. 사무실에서 카메라 기자 등 다른 직원들을 태우고 현장으로 가는데, 퇴근 시간이라 차가 어찌나 막히는지 반대편 도로를 역주행해서 달렸습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마음을 엄청나게 졸였는데, 나중에 보니 다른 언론사 차들과 앰뷸런스까지 우리 뒤를 따라오더군요."

 

이렇게 경황없이 시작된 사고 현장 취재는 최근의 숭례문 화재 사건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채롭게 이어졌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들을 세계에 전해야 하는 '한국인 손지애'는 좀 부끄러울 때도 있지 않았을까?

 

"승려들이 이권을 둘러싸고 혈투를 벌인 조계사 사건 때는 리포트를 하면서 정말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리포트를 마치고 나니 본사에서 ‘어휴, 재키 찬(성룡)이 따로 없구만’하고 농담들을 하더군요. 그래도 한국인으로서의 감정 보다는 세계인이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배경 설명을 충실히 하는 데 더 신경을 썼습니다."

 

손 국장은 '한국인 손지애'와 'CNN의 손지애'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일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한국에는 약 250명의 외신기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 80%가 한국인이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전달하는 일을 한국인만큼 잘 할 외국인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인 특파원들도 영어는 원어민처럼 잘 해야 한다. 손 국장은 초등학교 때 4년 정도 미국에 살았던 경험 밖에 없지만 중고등학교 대학을 거치는 동안 치열하게 실력을 갈고 닦아 '영어로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 됐다고 한다.

 

최근까지 외신기자클럽회장을 맡기도 했던 손 지국장은 "정부의 업무 브리핑이 내신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문제"라며 "외신에게도 개방적인 태도로 동등하게 대해 줄 것"을 주문했다.

 

글로벌 뉴스 채널인 CNN은 의도적으로 외국(foreign)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뉴스를 전하는 채널에서 누가 내국인이고 누가 외국인인가를 구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비무장지대(DMZ)를 둘러보는 외국인 관광객 얘기를 보도할 때, 비한국인(non-Korean)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손 국장은 이런 전 세계적 채널을 만든 테드 터너 회장의 사업 구상이 사실은 조그마한 '불만'에서 출발했다고 소개했다. "하루 종일 뉴스만 볼 수 있는 방송이 있으면 좋겠는데…"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뉴욕 양키즈의 경기 결과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24시간 뉴스 채널 CNN과 CNN 인터내셔널을 만드는 씨앗이 됐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각이 전 세계 언론의 판도를 바꾼 것입니다. 여러분도 뭔가 불편한 것이 있을 때, 이렇게 고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적극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 보면 어떨까요? 의외로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덧붙이는 글 | 한국언론의 새로운 표준과 가치를 모색해보려는 '저널리즘 특강'에 독자 여러분, 특히 언론인과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서울에서 진행되는 특강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분은 사전에 연락해주시면(043-649-1148) 제한적이나마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특강일정표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홈페이지(http://journalism.semyung.ac.kr)에 게시돼 있습니다.


태그:#세명저널리즘스쿨, #CNN, #손지애, #외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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