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도집례(都執禮) 류녕하' 류성룡 집안 종손의 이름이 써있다. 그러나 내력을 알고 보면 의성 김씨 종가에 풍산 류씨 종손의 이름이 걸려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도집례(都執禮) 류녕하' 류성룡 집안 종손의 이름이 써있다. 그러나 내력을 알고 보면 의성 김씨 종가에 풍산 류씨 종손의 이름이 걸려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 이덕은

관련사진보기


뒷건물은 유물전시관인 운장각으로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 사랑채와 운장각 뒷건물은 유물전시관인 운장각으로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 이덕은

관련사진보기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했는데 내가 그 꼴 아닌가?

한옥이 좋아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다녔으면서도 유가(儒家)의 깊은 내력과 의미를 제대로 몰랐으니 도산서원을 보고, 양동마을을 들르고 녹우당을 보았어도 그저 겉에 보이는 하드웨어에 유치한 감탄사 한마디 내지른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그 의미의 천분의 일마저 파악하고 있는지 그 또한 알 수 없다.

대구로 가는 길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는 봉정사 극락전을 들르겠다고 차머리를 안동으로 향할 때만해도 그저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안동 서후면으로 들어서면서 길 양쪽으로 보이는 학봉종택, 간재종택, 안동 권씨 재실….

'어, 이거 뭐야?', 해방 전후에 남쪽으로 월남한 가족의 일원인 나에게 조상이란 그저 명절 때 찾아 뵙고 인사하는 정도의 어른이었다. 내 초등학교 친구처럼 사돈의 팔촌까지 두루 꿰는 가계는 그저 남의 집안사 정도라고 치부할 정도로 천박한 지식밖에 없었다고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미치 안강(경주시 안강읍) 양동마을을 연상시키는, 잘 손질된 종택들은 규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 같은 무지렁이에게는 '음메 기죽어~'다. 봉정사 대웅전과 극락전을 둘러보는 사이에도 마음은 내려가다 들를 학봉종택과 간재종택에 가있다.

 수많은 손님들을 치루느라 휘어버린 것 같은 문지방이 인상적이다.
▲ 안채로 들어가는 문. 수많은 손님들을 치루느라 휘어버린 것 같은 문지방이 인상적이다.
ⓒ 이덕은

관련사진보기


학봉(鶴峯)종택은 퇴계의 제자인 의성 김씨 김성일이 살았던 곳이라 했다. 그러나 게시문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 간 그 분의 생애와 문중은 실한 고구마가 흙 속에서 엮여 나오듯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학통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에도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고 장열히 전사한 기록까지. 이러한 가풍은 일제하에서도 항일운동으로 후손들에게 맥이 이어졌다하니, 요즘과 같이 처세와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 귀감이 되지 않는다 할 수 없다.

더군다나 광주 무등산 제봉 고경명의 아들 셋중 둘을 임진왜란 중에 고경명과 함께 전장에서 잃자 셋째 아들을 학봉집안으로 보내 대를 이었다 한다. 또 나주목사로 재직 시 불모지였던 나주에 서원을 세워 영호남간의 학문교류에도 힘썼으니 정치인이랍시고 눈앞의 한표를 위해 지역에 내려가서 지역감정이나 들쑤시고 다니는 시정잡배들과는 전혀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

이렇게 학문에 출중하고 그에 걸맞게 의리가 강하며 국가에 충성하니 나라에서도 무슨 보답을 하여야 되겠는데, 이것이 '불천위(不遷位)'로 보통은 제사를 4대까지 모시지만 이렇게 특별한 경우는 4대가 지나도 신위를 사당에 영구히 모셔 제사를 지내도록 특별히 지정했다. 불천위는 주로 안동을 중심으로 많은데 앞서 언급된 고경명, 류성룡, 김성일 모두 불천위이니 유유상종이란 말이 이런데 써야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비라고 해서 여느 과객과 다를 바 없다. 흩뿌리는 제비똥이 지저분하다고 손을 내쫓을 수야 없지 않은가? 밑에 똥받이 판자를 대어 놓았다.
▲ 제비집. 제비라고 해서 여느 과객과 다를 바 없다. 흩뿌리는 제비똥이 지저분하다고 손을 내쫓을 수야 없지 않은가? 밑에 똥받이 판자를 대어 놓았다.
ⓒ 이덕은

관련사진보기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는 한지 두루말이가 눈에 띄는데 '도집례 류녕하'이하 이름이 줄줄히 적혀 있고 '무자년 3월 초3일'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종손 김시인의 49재는 아닌 것 같다. 관례(전통사회 성인의식) 같은 경우는 류성룡의 종손 류녕하씨를 초대하여 관자(冠者)를 인도하였다 하니 의성 김씨 종택에 풍산 류씨 종손 이름이 걸려 있다해도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안채는 'ㅁ'자 형태로 달처럼 휘어진 문지방을 건너 들어가면 대청마루와 방 둘이 나란히 보인다. 대청을 가로지르는 도리(천장 구조물)에는 제비가 진흙으로 집을 지었는데 그 아래에 작은 판자를 대어 오물이 떨어지지 않게 한 배려가 눈에 띈다.

지난 2월 타계한 이 집안 14대 종손 김시인은 29살의 나이에 양자 왔는데 선대 김용환은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유명하여 집안에 남아 있는 것이 변변히 없었다 한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일제의 눈을 피해 파락호로 위장하여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한다. 심지어 시댁에서 보내온 딸의 장롱값까지 군자금으로 보내서 그러한 내력을 알게 된 딸 김후웅이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서간문을 썼는데, 그것이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몰락한 집안에 종손으로 들어 온 김시인은 집안을 일으켰다. 이때 '국량이 크고 성품이 두터울 뿐 아니라 지혜가 뛰어난 성품'의 종부 조필남의 역할이 막중했다 한다. 실제로 학봉종가에서 종부의 권위는 대단했다. 정월 초하룻날 설차례를 지낸 후 이루어지는 신년세배에서는 후손 중 연장자 100여명이 어린 종부에게 맞세배하는 격식을 갖춘다 한다.

 쌓아놓은 곡식이 보인다. 파란만장한 종가의 역사만큼이나 뒷치다꺼리를 치른 종부의 땀 배인 손길이 느껴진다.
▲ 안채 부엌. 쌓아놓은 곡식이 보인다. 파란만장한 종가의 역사만큼이나 뒷치다꺼리를 치른 종부의 땀 배인 손길이 느껴진다.
ⓒ 이덕은

관련사진보기


문중 대소사를 결정할 때도 문회(門會)에서 이야기가 맺어지지 못할 때에는 바깥에서 이 소식을 들은 종부(종부라기보다는 증조할머니)가 몇 마디 의견을 전하면 그대로 결정되는 수가 많았다 하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조필남 할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대구 꽃집의 꽃이 동나 버릴 정도였다 하니 그 분의 손길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런 종가의 가풍은 현 종손인 김종길(전 삼보컴퓨터 사장)까지도 맥을 이어오고 있어 집안 행사에 아직도 1000여명씩 모인다고 하는데, 종택을 의례 고택으로 치부하며 유적 감상하듯하는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전통문화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아끼고 가꿔 길이 보존하여야 할 귀중한 자산이라 할 것이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덧붙이는 글 | 닥다리즈포토갤러리(http://yonseidc.com)



태그:#학봉종택, #불천위, #안동, #닥다리즈포토갤러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