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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 슬인(오른쪽에서 두번째)이가 같은반 친구들과 주먹을 들어보이며 당선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큰딸 슬인(오른쪽에서 두번째)이가 같은반 친구들과 주먹을 들어보이며 당선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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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인이 아빠! 빨리 일어나서 연설문 좀 써줘요."

지난 토요일 밤늦게까지 일을 한 터라 늦잠으로 피곤함을 달래는데 아내가 목소리를 높여가며 흔들어 깨운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겨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내 이남경 여사가 아이들과 함께 제작한 벽보
 아내 이남경 여사가 아이들과 함께 제작한 벽보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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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큰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이번 금요일에 학생회장과 부회장을 뽑는데 슬인이가 부회장을 하겠다며 손을 들었대요. 누굴 닮아서 그런지"라며 나를 바라보고 눈을 흘긴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첫째 슬인이는 아래로 동생이 둘이나 있어서 그런지 남을 잘 챙기고 책임감도 강하다. 농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얼굴을 붉히는 일이 종종 발생할 정도로 순수한 초딩 고학년이다.(고슴도치 아빠가 분명하죠?)

우리 가족은 그주 일요일 온종일을 선거에 쓰일 소품을 만드는데 올인 했다. 종이접기 선생님인 아내는 실력을 발휘해 눈에 띄는 선거벽보와 홍보물을 만들고 세 아이는 그런 엄마를 거들었다.

큰딸의 프로필 사진을 촬영해 주는 것까진 문제가 없었는데 연설문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필력도 그렇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유권자는 초등학교 4~6학년인데 어떤 말을 해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거야' 난감했다.

"여러분의 머슴이 되겠습니다"

머슴론이 담긴 한 어린이 후보자의 선거벽보
 머슴론이 담긴 한 어린이 후보자의 선거벽보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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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후보자의 이력을 써넣은 벽보. 수상내역이 이채롭다.
 어린이 후보자의 이력을 써넣은 벽보. 수상내역이 이채롭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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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원할 것 같은 이런저런 공약을 생각해 봤다. ▲일제고사 폐지 ▲영어 몰입식 교육 완전금지 ▲학교폭력 추방 ▲수업시간 단축 ▲무거운 책가방 없는 학교 만들기 ▲트럼블린, 풍선나라 등 놀이시설 설치 ▲우리 친환경 농산물을 이용한 급식 확대 등을 떠올렸지만 5학년짜리 시골 초등학교 어린이 부회장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공약임이 분명했다.

왜 부회장이 되려는지 아이에게 물었다. 슬인이는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 친해지고 싶고 그 친구들과 학교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요"라는 순박한 답이 돌아왔다. 이 생각에 살을 붙여 간신히 2분 분량의 연설문을 완성해 아이 손에 들려줬다.

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해 직장 근처에 있는 큰아이 학교를 찾았다. 교문을 비롯해 아이들이 많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벽보가 붙어 있었고 아이들은 벽보를 꼼꼼히 살피는 등 관심을 내보이며 이곳을 지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무원들을 '머슴'에 비유해 공무원노조 등의 반발을 샀는데 다양한 벽보 중에는 머슴론을 들고 나온 후보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머슴은 주체적 사고를 하기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어린이가 이런 수동적 표현을 사용한 것은 어른들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실패는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인거야"

선거벽보를 관심있게 바라보는 어린이 유권자
 선거벽보를 관심있게 바라보는 어린이 유권자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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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틈 날 때마다 연설문을 읽어 2분 분량의 연설문을 외워버렸다. 또한 친한 친구들과 등하교 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이용해 피켓 등 홍보물을 앞세워 후보자를 알리며 지지를 호소했다.

어린이 후보자의 이색벽보가 눈길을 잡아끈다.
 어린이 후보자의 이색벽보가 눈길을 잡아끈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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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역할은 선거홍보물이나 연설문을 함께 만드는 것까지였다. 나머지는 모두 아이의 몫이었지만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고 하면 "출마했으니 당선 돼야죠? 깨끗하게 반칙 없이 (선거운동)하면 되잖아요."라며 제법 어른스런 답이 돌아왔다.

큰딸 슬인에게는 태어나 5학년까지 자라오면서 이번 선거가 가장 큰 도전이었다. 그만큼 아이도 이번 선거에 열정을 쏟았고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은 마음으로나마 응원을 보냈다. 아이에게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했지만 속내는 좋은 결과가 어느 때보다 기다려졌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투표가 있던 금요일(14일), 아내에게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슬인이 안됐대요. 집에 있는데 우울모드에요."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도 풀이 죽어 있었다. 위로를 해주기 위해 아이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슬인아! 그동안 열심히 했잖아. 끝까지 열심히 해준 우리딸 자랑스럽고 정말 사랑해. 지금 슬퍼할 때가 아냐 널 위해 열심히 선거운동을 도와준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당선된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는 거야. 실패는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인거야. 힘내 알았지."

"네" 전화선을 타고 눈물이 묻어 있는 슬인이의 대답이 흘러 나왔다.

"아빠 기사 쓰실려구 물어 보시는 거죠"

다음날 선거운동에 고생한 아이 친구들과 분식으로 점심을 먹고, 기분 전환을 시켜줄 요량으로 지인들이 낚시를 하고 있는 저수지로 향했다.

어린이 임원선거가 끝나고 나붙은 당선공고. 이슬인 후보는 이 공고문을 씁쓸한 미소로 바라봐야 했다.
 어린이 임원선거가 끝나고 나붙은 당선공고. 이슬인 후보는 이 공고문을 씁쓸한 미소로 바라봐야 했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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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는 차안에서 아이에게 이것저것을 물으니 "<오마이뉴스> 헉! 아빠 지금 기사쓰실려구 물어 보시는 거죠"이런다. '이런 눈치 빠른 녀석' 몇 번 취재를 당한 터라 이제는 많이 약아졌다. 자신의 낙선경험이 기사화 되는 것이 싫었는지 대답하길 꺼린다.

한참을 침묵 속에 있더니 먼저 말을 건넸다. "아빠! 이제 다 잊었어요. 열심히 도와준 친구들에게 고맙고 당선된 친구들은 저보다 더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 녀석 다 컸구나!' 마음이 놓인다.

초등학교 어린이 임원 선거에 포스터나 홍보물을 전문 광고회사에 맡겼거나 카피라이터에게 연설문을 의뢰했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한다. 또 유권자인 학생들에게 팬시용품이나 햄버거 돌리기 등의 선물공세로 표를 구걸한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출마자인 어린이들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어른들의 욕심에서 불거져 나온 부정과 반칙이다. 올바르지 못한 정치인들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한 결과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당선된 어린이는 성장해서도 부패 정치인의 전차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

18대 총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부디 이번 총선에 출마한 정치인들은 우리 아이들이 가슴속에 아름다운 꿈을 담을 수 있도록 깨끗한 행보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데리고 찾았던 저수지에서 동생 승유가 촬영해 준 사진. 슬인이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아이를 데리고 찾았던 저수지에서 동생 승유가 촬영해 준 사진. 슬인이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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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어린이 부회장 선거일은 지난 14일 이었습니다. 은둔에서 저를 구해준 유창재 기자께 감사드립니다.



태그:#이슬인, #부회장,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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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이 세 아이가 학벌과 시험성적으로 평가받는 국가가 아닌 인격으로 존중받는 나라에서 살게 하는 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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