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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은은하게 성가반주가 흐르는 성당에서

부활절을 앞두고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많은 신자와 함께 앉아서

무엇을 고백해야 할지 곰곰 생각한다

너와의 관계를 고백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한동안 너를 마음에 두었었다고 고백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너에게 보낸 이메일을 떠올려보고

너와 나눈 전화통화를 생각해보며

혹시 우리 사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닐까

미풍양식을 저버리고 인륜에 어긋나고 하느님 뜻을 어긴 것이 아닐까

잠시 후 신부님 앞에 모든 걸 고백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사춘기 소년의 들뜬 마음으로 너를 생각하며 보낸 몇 해가

아내를 배반한 것이 되는지 가정에 소홀한 것이 되는지

남의 여자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에 어긋나는 것인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에 해당이 되는 것인지

아름다운 사랑일 수도 있는데

나는 애써 황혼녘 로맨스그레이를 떠올려본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도 세상엔 있는데

잠시 후 고백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너를 생각하며 보낸 지난 몇 해가

아름다운 시간 기쁨으로 충만했던 시간이었는데

하느님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너와 나의 일을 고백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자세를 바로 하여 앉는다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실거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아내를 배반한 것이 되는지

너를 생각하며 사는 것 자체가 이미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하느님은 다 아시고 지켜보고 계실 거야

하느님, 저의 로맨스그레이를 잘 지켜보시다가

나중엔 마음 푹 놓으시고 그동안 공연히 마음을 졸였노라고

이젠 마음이 푹 놓인다고 말씀이라도 해 주십시오

혹시 제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면 합당한 벌을 내려주십시요

아니 무서운 벌을 내리기 전에 제가 홀로 들길을 걷는 시간

조용히 다가와 다정한 음성으로 말씀이라도 해 주십시오

푸른 산천 아름다운 들녘에서 저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최일화

 

시작노트

세상엔 천차만별의 사랑의 형태가 있습니다. 나는 나의 우정을 종종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 곰곰 생각을 해봅니다. 이것이 사랑이야 우정이야? 아내를 배반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느님은 이것을 허락하실까 금지하실까? 나는 아무런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올해도 부활절을 앞둔 사순시기 또 한 번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 최일화 기자는 시인이며 수필가다. 현재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시집에 <우리사랑이 성숙하는 날까지>(1985) <어머니>(1998) 에세이집에 <태양의 계절>(2005)이 있다. 


태그:#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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