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녀의 자주색 옷고름은 당화였다. 당화(唐貨), 이거 아무나 수중에 넣을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당화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수입명품이다. 세계의 중심 명나라에서 들어온 물건이었다. 당나라가 망한 지 언제이건만 대륙에서 들어온 물건을 당화라 했다. 사내들은 명나라에 꾸뻑 죽었고 사대부 여자들은 당화에 쪽을 못 썼다. 공기놀이를 하던 그녀가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어린 자식 품에 품고 자란 자식 손목 쥐고

신주상자 등에 지고 칠십쌍친(七十雙親) 어이하리.

잡거니 붙들거니 촌촌이 거려가셔.

 

장안 백만가(百萬家) 연진(煙塵)이 되여 잇고

일우고성(一隅孤城)의 우리 님군 싸엿난데

양도군병(兩道軍兵) 함몰하고 외원병(外援兵)이 끈처시니

슬프다 이 시절 막극다 우리 님군

죄상 곳 혜여내면 다 버힐 놈이로다.

-<해동유요(海東遺謠)>

 

그녀가 부른 노래는 병자난리가(丙子亂離歌)였다. 누가 지었는지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를 노래였으나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나갔다. 도성이 불타고 재만 남았다는 구절도 가슴 아리지만 마지막이 압권이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뜻이다. 명분에 휩싸여 갑론을박 세월 보내면서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 조사하면 다 나오고, 죄다 목을 베어 버릴 놈이다 는 뜻이다.

 

'목 벨 놈'에 자신의 아버지가 포함되었는지 안됐는지 이 여자의 기억엔 없다. 예전에는 알았지만 지금은 지워졌다. 입력장치 고장인지 출력장치 에러인지 알 수 없다. 공기놀이도 재미가 없는지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한 움큼 주운 콩을 하늘을 향하여 뿌리며 중얼거렸다.

 

"공기돌이 미쳤나봐."

 

그녀는 동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어기적거렸다. 그 여자를 뒤따라가던 미친개가 찢어진 치맛자락을 물었다. 놀란 여자가 뛰었다. 쫘아악 하는 소리가 적막에 싸인 종로를 갈랐다. 임금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조선 사대부들이 신주단지 모시듯이 모셨던 조선의 절개가 찢어지는 소리였다.

 

전란을 당하면 피해를 보는 것은 아이와 여자들이다. 어린이라는 개념이 없던 그 시절. 아이는 또 낳으면 되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아이들은 헐벗고 굶주려야 했고 여자들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정승 판서 대감댁 여자들은 물론 후궁과 궁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능욕을 피하여 자결한 여자도 있었고 강제로 당한 여자도 있었다. 집단폭행에 미쳐버린 여자도 있었다. 그 여자는 장동 김대감 댁 막내딸이었다.

 

채찍이 춤을 추고 피가 튀었다

매타작에는 양반과 상놈이 없었다

 

배오개 싸전을 지났다. 오늘날의 종로 5가 어름이다. 창을 꼬나 쥔 청나라 군사가 한 무리의 포로를 끌고 지나갔다. 사로잡힌 백성들이다. 오라에 묶여 있는 모습이 두름에 묶여 있는 굴비 같았다. 임금의 환궁행차를 발견한 포로들이 묶인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임금님이시여! 나라님이시여 우리를 살려주소서."

 

애끓는 절규였다. 포로들의 행렬도 나아가지 못하고 임금 행차도 나아가지 못하고 엉켜버렸다. 차가운 날씨에 홑옷 하나 걸친 포로들의 눈빛은 애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며칠 째 씻지 못한 얼굴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너희들 때문에 이 녀석들이 가려 하지 않는다."

 

청나라 군사들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이 휘두른 회초리는 만주 평원에서 말을 몰던 말채찍이었다. 그들은 조선인 포로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심양으로 끌고 가 팔아먹을 마소로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조선인 포로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으로 보였다.

 

청군이 휘두르는 채찍은 포로들만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임금을 호종한 재상과 대신들에게도 날아왔다. 노 재상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관모가 나뒹굴었다. 땅에 떨어진 관모를 짓밟으며 청군의 채찍은 계속 되었다. 청군의 가죽 채찍은 양반의 머리 위에도 떨어졌고 상놈의 머리 위에도 떨어졌다. 매타작은 반상 구별 없이 공평했다.

 

매타작이 끝났다. 임금행차가 창경궁을 향하여 움직였다. 매를 맞으며 뒤돌아보던 포로들의 행렬도 동대문을 향하여 움직였다. 집은 대부분 불타 무너지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직도 연기가 피워 오르는 여염(閭閻)집에서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나왔다. 나무궤짝과 농, 그리고 숟가락 젓가락 등 그릇을 가득 실은 수레였다. 청군들의 약탈 수레였다.

 

배오개(梨峴)를 넘은 임금행차는 인정(人定)이 돼서야 창경궁에 도착했다. 인정은 오늘날의 밤 10시다. 평소 같으면 종루에서 28번의 종을 울려 통행금지 시간을 알렸으나 종소리가 없었다. 종을 칠 군졸들도 없었고, 도성 4대문을 닫을 군졸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이 중건한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은 이번 전란에 소실되지 않았다. 임금이라면 당연히 정문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마음이 급하다. 불과 백 여보 북쪽에 있는 홍화문까지 갈 겨를이 없었다. 추한 몰골을 빨리 숨겨야 했다. 임금 행차는 선인문으로 들어갔다

 

도성에 대문이 있고 허드레가 나가는 수구문이 있듯이 선인문은 동궐의 사잇문이며 허드레 문이다. 폐위된 연산군이 궁에서 쫓겨날 때 나갔던 문이다. 훗날 아버지에 의해 죽음에 내몰린 사도세자가 8일 동안 뒤주에 갇혀 있던 곳이 선인문 안쪽이다. 끝내 절명한 사도세자의 시신이 장지 배봉산을 향하여 나갔던 문이 선인문이다.

 

선인문을 통과한 임금은 양화당에 들었다. 군불도 때지 않아 썰렁했다. 반겨주는 이 하나 없고 쥐들이 우글거렸다. 사람들의 인기척에 도망가지도 않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주인 없는 궁궐을 병자년 쥐띠 해에 자신들이 점령했다는 태세였다. 정축년 새해에 주인이 돌아왔지만 자신들의 세상을 내줄 수 없다는 태도다.

 

임금의 도착과 동시에 각사(各司)의 서리(胥吏)와 하례(下隷)들이 줄행랑을 쳤다. 소식을 알 길이 없는 자신들의 부모와 처자식을 찾기 위해서다. 하늘같이 받들어 모셔야 할 임금님보다도 가족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승지들이 걸레와 빗자루를 들었다. 대충 치우고 임금이 양화당에 들어갔다.

 

황제에게 바칠 여자를 골라라

 

임금을 궁으로 돌려보낸 청군은 삼전도에서 전승 축하연을 열었다. 약탈한 물자도 많고 포로로 붙잡아 온 여자들도 많으니 풍성한 잔치 분위기였다. 조선을 침공한 청나라는 에르데니와 이어(李魚)를 대동했다. 만주족 귀족출신으로 명나라 조정에 입사한 에르데니는 대륙의 낌새를 눈치 채고 청나라에 귀환한 학자였다. 이어는 홍타이지의 채홍사였다.  

 

청나라 군막에는 포로로 잡혀온 여자들이 넘쳐 났다. 도성에서 붙잡아온 여자들도 있었고, 강화도에서 붙잡혀온 여자들도 있었다. 대부분 사대부집 여자들이었다. 용골대가 1차로 걸러 낸 여자들을 이어가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였다. 황제에게 바칠 여자를 골라내기 위해서였다.

 

여진족은 하얀 피부, 검은 눈, 검은 눈썹, 작은 손, 작은 발을 미인으로 꼽았다. 여기에 덧붙여 홍타이지는 색 다른 취향이 있었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 채홍사는 역관 정명수 외에 아무도 들이지 않은 단독 군막을 운영했다.

 

이어의 군막으로 불려 들어간 여자가 얼굴을 감싸며 울며불며 나왔다. 불합격자다. 선발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텐데 울고 있었다. 불합격에 우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를 모실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 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난생 처음 당하는 모욕이 수치스러워 우는 것이었다.

 

합격한 여자는 다른 군막으로 이동했다. 그녀 역시 사색이 다 된 얼굴을 감싸고 치를 떨며 울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시신을 가리키며 "너도 이렇게 죽고 싶으냐?"라고 위협했을 때 "그래, 차라리 죽여라"라고 대들 용기가 없었던 자신이 미워 우는 것이었다. 혀라도 깨물고 죽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한 자신이 한없이 미워 흘리는 눈물이었다.


태그:#병자호란, #사도세자, #창경궁, #연산군, #채홍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