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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숭례문 화재현장 보수작업을 위한 가림막 설치가 진행중인 가운데 검게 불타버린 숭례문을 찾아 아쉬움을 달래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13일 숭례문 화재현장 보수작업을 위한 가림막 설치가 진행중인 가운데 검게 불타버린 숭례문을 찾아 아쉬움을 달래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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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이 죽었다. 격동의 세대를 살아온 뭇 인간들을 차별하지 않고 넉넉히 감싸 안아주던 그 아름답고 풍만하던 가슴. 높은 사람들이 행차하여도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무례하게 잔불을 놓아도 하나 같이 따스한 눈길을 보내 주던 남대문. 남녀노소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고향집 같던 남대문. 그래서 그대의 죽음이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우아한 박물관 조명 아래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노터치" 사인을 연방 보내오는 고고한 문화재도 아니고 시간을 돌려놓을 수 있는 여유를 강요하는 화려한 고궁도 아니면서 어느 문화재 보다 높은 품격을 간직해오던 그대, 남대문의 죽음에 이 땅의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슬퍼한다.

그러나 슬프고 애도하는 마음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킨 사건은 인과 관계를 분명하게 따져서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한다.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사태는 본질적인 사항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구를 문책하여 하느냐, 정신과적 진단이 무엇이냐, 국상으로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등 주장들은 난무하지만 형식적 문제에 대한 반성은 없는 것 같다.

국가적 재난이 있을 때마다 항상 반복되는 범주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신분석가 H.S. Sullivan은 상담을 내용(content)와 과정(process)으로 나누고 전문적 상담가들이 우선 익혀야 할 것은 내용 보다는 과정이라고 했다. 과정은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변화에 예민하지 못한 정신분석가는 전문가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남대문 방화 사건은 어떤 변화를 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이 사건에 임하는 우리세대의 자세여야 할 것이다.

남대문은 순국한 것이다. 결코 한 사람의 방화에 의해, 담당 공무원의 태만에 의해 저질러진 문제는 아니다. 그러한 식의 접근 방식은 사건을 대충 마무리하고 넘어가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인격이 이상한 사람들과 정신병자들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반사회적 인격자라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는 바 사회가 있는 곳에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필연이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뿐이다. 그것도 이론상 그러하다는 말이다.

사회가 구성되는 순간 반사회적 인격자는 동시에 만들어진다. 그것이 사회다. 요약하면 남대문 방화사건이 일어날 개연성은 숭례문이 지어진 날부터 늘 있어왔다는 것. 그래도 방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적 장치들이 작동하여 왔고 무슨 불만이 있더라도 그 구조물을 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심리가 지속되어왔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건의 본질은 무엇이 그러한 사회적 장치들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반사회적 인격자들 또는 불만 세력들이 내부의 심리적 저항선을 넘어 극단적 행동에 이르게 되었는가이다.

현재 숭례문은 세종 때인 1447년에 개축되어진 것이라 하니 60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 때에는 숭례문이 성벽과 연결되어, 도성 내부 출입을 관장하는 주요 관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항상 삼엄하게 경비되어 왔다. 그래서 난리를 제외하고는 방화로 소실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일본 식민지 하에서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방화는 꿈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

이러한 과정들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남대문을 지켜 왔던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해방 이후 비참한 내란도 겪었고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사회구성원들이 많은 상처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남대문이 반세기 이상 통합의 상징으로 꿋꿋하게 서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 우리가 방심했다. 절대 불 질러지지 않을 곳이라 생각했던 곳. 성역이라 굳게 믿었던 공간에서 패륜적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이 단순히 불만의 문제라면, 그리고 접근 용이성의 문제라면 라면을 끓여 먹고 잔불을 지피던 노숙자들에게 방화에 대한 동기와 기회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고 평범한 이웃이라고 하지 않는가? 물론 개인 정신 병리를 따질 수야 있겠지만, 이러한 방식의 원인 규명은 “암 걸린 사람이 빨리 죽더라”는 것과 같이 뻔한 결과를 말해주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 죄야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들을 단죄 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사회는 계속 곪아 갈 것이다. 그것은 희생양을 바치고 하늘의 용서를 비는 원시적 제사에 다름 아니다.

사회적 사건은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남대문은 장렬히 순국하면서, 이 사회의 음침한 구석구석을 밝혀 주려 하였던 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사회 문제들이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숭례문 방화범...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이방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첫째, 소통의 기호들을 무시한다. 둘째, 너무나 이기적이고 모든 것을 돈 문제로 환원한다. 셋째, 화를 참지 못한다. 넷째, 권위나 사회적 합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섯째, 겉으로는 멀쩡하게 행동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당연히 여기에는 사건의 방화범이 포함된다. 또 연쇄 살인범, 유괴범, 강간범.

그런데 정말 심각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이방인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 사회 병리가 개인의 도덕성을 압도하고 마비시키는 시대를 현대인들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극단적 범죄자들이 범죄 후에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그 섬뜩함을 어떻게 해석하여 할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사회화의 정신 내적 대응물은 '초자아'다. 초자아는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도덕적 이상을 말한다. 평범한 이웃들이 극단적 범죄자 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그들 극단적 범죄자들이 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점점 근접해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국보1호 지존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의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남대문처럼 서로를 인정하고 비판 없이 껴안아 줄 수 있는 사랑 능력의 부재. 그것이 오늘 우리 사회 최대의 비극이다. 사람과 사람 간에, 세대와 세대 간에 사랑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에 우리는 산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새로운 이방인들은 주체의 외부에도 존재하지만, 우리들 자신의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적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에 있다. 이기심과 공격성에 가득 찬 원초적 인간을 보듬어 한 윤리적 존재로 만들어내는 일은 가정과 사회의 몫이다. 정치 공학적으로 말하자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사회적 장치는 개인적 욕망을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국보 1호가 불에 타 주저앉았다. 불에 타 흉한 몰골을 하고 있는 남대문은 우리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사회적 장치에 대해 심히 회의하여야 함을 토로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 조형물의 매력은 역사를 관통하여 사회구성원들을 묶어주는 힘에 있다. 칼 융의 문법으로 말하자면, 조국 또는 민족 콤플렉스를 불러일으키는 상징물이다. 콤플렉스를 강력히 정신 에너지를 응집할 수 있는 정신 지대라고 정의할 때 국보 1호 남대문 방화 사건은 당연히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국상과 같은 정서적 공감대를 사회구성원들에게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주체가 의식하지 못하는 콤플렉스는 엉뚱한 방향으로 개인 또는 사회를 몰고 갈 위험이 늘 있기 때문에 정교한 조절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금을 걷자는 이명박 당선자 측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하다. 한껏 고조되고 있는 조국 또는 국민 통합을 향한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국민에게 비젼을 보여 주어야 할 통치자의 자질에 의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상처를 받은 민중들의 움직임을 좀 더 정밀히 분석하고 세심하게 배려하여야 할 시간이다.

지금 우리들은 중요한 시기에 있는 것 같다. 가부장 시대의 종언이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뚜렷한 정신적 구심점이 없다는 것을 남대문 방화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단일 민족과 국민 통합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국보 1호가 개인적 원한에 의해 불태워질 수도 있는 사회가 온 것이다. 절대 침범할 수 없었던 공간이 유린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을 남대문 방화 사건은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 사건은 또한 수많은 권위들이 허물어진 우리사회에게 국민들을 통합 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를 서둘러야 함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한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이방인들, 그리고 앞에서 질주하게 될 이방인들. 그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태그:#숭례문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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