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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었던 곳은 운림산방. 진도에서 내가 가본 곳이라고는 달랑 운림산방뿐이었다. 그것도 한 십여년 전이었으니 내 기억과 실제가 맞아떨어질지 자못 궁금했다. 그러나 우리는 쌍계사를 먼저 가 보기로 했다. 쌍계사에 간 기억은 전혀 없는데, 가는 길이 아주 아름다웠다. 운림산방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얼굴을 내미는 작은 절이 있었다. 양쪽으로 계곡이 있어 이름이 쌍계사라는 소박한 절이었다.

쌍계사 들어가는 길...
▲ 쌍계사 쌍계사 들어가는 길...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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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전경...
▲ 쌍계사 쌍계사 전경...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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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팀이 우리보다 앞서 걸어가고 있었고 절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라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 다시 개축했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는 노란국화가 한 줄로 피어 있었다. 작지만 오래된 절답게 고풍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운림산방을 짓기 전부터 있던 절이니 소치 선생은 가끔 이 절을 넘겨다 보기도 하고 이 절 옆으로 해서 산책도 했을 것이다.

상록수림 가는 길..
▲ 상록수림 상록수림 가는 길..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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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을 걸어 들어가면 수림이 워낙 빽빽해서 대낮에도 침침하다.
▲ 상록수림 오솔길을 걸어 들어가면 수림이 워낙 빽빽해서 대낮에도 침침하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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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상록수림이 나온다. 수림이 어찌나 빽빽한지 방금 정오가 지난 시간인데도 어둑어둑한 저녁 때처럼 음침하다. 그리 굵지 않은 수목이 하늘로 길게 목을 빼고 있는 자태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키큰 생물처럼 느껴졌다. 매년 하는 아름다운 길로 지정해도 좋을만큼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길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줄 아는 대가

운림산방은 생소한 느낌이었다. 낯익은 곳이라고는 뜰아래 자리 잡은 연못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소치 선생의 숨결은 여전히 가슴에 와 닿았다. 조선시대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 선생이 말년에 거처하며 수많은 족적을 남겼던 운림산방. 그도 예술가인지라 실제와 마음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의 선면산수화에는 이곳이 깊은 산중으로 나타나 있다.

소치의 초가는 보이지 않지만 기와집과 연못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다.
▲ 운림산방 소치의 초가는 보이지 않지만 기와집과 연못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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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소치는 그의 작업실에 들어 앉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으면서 깊은 산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스승인 초의선사의 일지암과 동일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곳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니 청년 때의 기분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말이다. 그와 같은 마음은 그가 쓴 소치 실록에 나온다.

첨찰산은 옥주(沃洲, 진도의 옛이름)의 모든 산중에 조봉(祖峯)이다.
그 아래 동부가 넓은데 그곳에 쌍계사가 있고 쌍계사 남쪽에 운림골이 있어,
그곳에 맑은 집을 짓고 이름을 운림산방이라 하였다.
마음이 스스로 기뻤고 내 성품에 맞았다.


소치가 기거했던 집. 오른쪽은 살림집인 안채이고, 바로 앞으로 보이는 집은 소치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던 사랑채.
▲ 운림산방 소치가 기거했던 집. 오른쪽은 살림집인 안채이고, 바로 앞으로 보이는 집은 소치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던 사랑채.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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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선생이 운림잡저 서문에 적은 글이다. 그 당시 이곳이 뛰어난 명승지는 아니었을 거다. 다만 그가 들어앉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해 터를 잡아 집을 짓고 기뻐했으며, 이곳을 무척 사랑하고 아끼면서 산책도 하고 스스로의 마음도 달래었을 것이다.

또한 이 운림산방 주변의 풍경 10곳을 골라 운림 10경이라 부르며 즐겼다고도 하니, 그는 스스로의 삶을 즐길 줄 아는 멋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봐도 풍경은 충분히 아름답지만 어느 풍경이든지 보는 사람 마음에 따라 절경이 되기도 하고 절해 고도가 되기도 하는 법,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눈도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거라는 생각에서다.

초의선사의 영향을 받은 소치 허유

자연을 즐길 줄 아는 그의 마음마저도 스승인 초의선사의 영향일지 모른다.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흡족해 했듯, 그가 운림산방을 짓고 기뻐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전시관 앞에는 초의선사에게 선물 받았다는 가녀린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2대 나무가 수령(187)이 다하자 뿌리 나누기로 기른 나무라는데 친절하게 설명문까지 붙어 있었다. 그만큼 소치와 초의선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일지암이라는 이 나무는 소치 선생이 초의선사에게 선물 받은 나무로 2대 나무가 죽자(187년) 뿌리 나누기로 다시 기른 나무다.
▲ 일지암(나무 이름) 일지암이라는 이 나무는 소치 선생이 초의선사에게 선물 받은 나무로 2대 나무가 죽자(187년) 뿌리 나누기로 다시 기른 나무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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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를 상상하면 늘 나무 지게를 지고 있는 그를 떠올린다. 잔반 출신으로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그때 그는 아마 들에 가서 일을 하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그림 몇 점을 들고 가슴에 푸른 꿈을 품은 채, 초의선사를 찾아가고 초의선사에게 그림이나 선(禪)에 대해 또는 삶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경지를 넓혀 나갔을 그. 그러다 일지암에 아주 머무르게 되고 추사에게 사사 받는 길도 열린다.

그의 나이 33세 때부터 추사 김정희 선생에게 정식으로 사사를 받았다. 추사는 중국 원나라 4대 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라 했는데, 허유가 그와 견줄만하다고 '소치'라고 불렀다 한다. 곧 소치는 초의에게도 추사에게도 자랑거리가 된다.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지인들에게 할 정도로 소치의 재주를 아끼고 칭찬했다고 한다.

산 밑에 바로 붙어 있는 소치 기념관. 이 건물 안에 소치 가문 4대를 잇는 그림이 전시돼 있다.
▲ 소치 기념관 산 밑에 바로 붙어 있는 소치 기념관. 이 건물 안에 소치 가문 4대를 잇는 그림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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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4대를 잇는 그림 전시

소치 기념관에는 그로 시작하는 후손 4대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처음 소치는 맏아들 허은에게 자신의 화업을 전수하려 했으나 불행히도 그는 19세에 요절하였고, 넷째이며 막내인 미산 허형이 그의 뒤를 이었다. 허형은 마마자국이 있는 얼굴로 한 번 선전(鮮展)에 입상하였으나, 그의 작품은 다소 진부하고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주 중요한 그의 넷째 아들 허건(남농)과 허백련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다섯째 아들 허림은 전통적인 회화 예술에 토점화의 기법을 접목, 독창적인 회화기법을 선보이며 선전했으나 26세로 요절. 허림의 아들인 임전 허문이 구름과 안개를 그리는 독특한 화풍으로 소치 가문의 4대 화업을 이어가고 있다. 소치가문의 혈연적 직계는 아니지만 허백련은 미산 허형의 사사를 받았으며 소치의 예술적 직계혈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정통적인 예술가로 남종화에 한 발 더 가까이 몰입해 들어간 인물이었다.

소치 선생을 모신 사당.
▲ 사당 소치 선생을 모신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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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선생의 영정.
▲ 영정 소치 선생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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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집안에서 시작한 그림은 지금까지 국전 입상자가 무려 150명이 넘을 정도로 놀라운 화맥을 구축했다. 지도를 받는다는 건 그 사람의 화풍을 이어받는다는 것이지 그 사람과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었다. 전시되어 있는 그림을 보고 있자니 언뜻 같은 화풍이지만 후대로 내려올 수록 구도나 색감이 기운차고 과감하게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시대에 따라 기법도 다양해지고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도 강렬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소치 기념관에서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제법 차가워져 있었다. 소치는 이곳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사후 자손들이 이곳을 떠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내보였다 한다. 행여 자손들이 이 벽촌에 묻혀 버릴까 경계한 것이다. 실제로 허형은 한동안 이 집을 떠나 있었고, 너무 가난해 그의 아들 허건은 중학교도 못마쳤다 한다.

그러나 폐허 속에 버려져 있던 운림산방을 복원한 것은 어렵게 자신의 재능을 일으켜 세운 남농 허건이었다고. 한 가지 재능이 4대를 내려오면서 손자가 할아버지의 화업을 잇고 아름답던 할아버지의 유토피아를 재건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기와 집에 가려진 소치의 초가도 한층 빛이 나 보였다. 손자가 복원했다는 의미로 인해.


태그:#첨찰산, #운림산방, #쌍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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