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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바치는 전복죽, 이 죽을 먹고 건강을 되찾았으면!
 아내에게 바치는 전복죽, 이 죽을 먹고 건강을 되찾았으면!
ⓒ 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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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에 가까운 나이에 책을 읽으려니, 머리가 맑지 못한 탓인지 한두 번 읽어서는 내용이 통 와 닿지를 않습니다. 지난해 직장 승진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고 다시 공부를 한답시고 책상에 앉아 있으려니, 무엇보다 아이들보기가 부끄러워서 '올해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어제도 거실에서 책을 보다가 그만 잠이 들었나 봅니다.

[새벽 5시] 맑은 정신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창문을 열고 새벽공기를 온 가슴으로 받아들입니다. 세수를 하고 아이들 이불을 덮어주고 마지막으로 아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이상합니다. 얼굴은 창백한데, 몸이 불덩입니다. 아내는 가는 신음소리도 토해냅니다. 이 무능한 남편은 아내가 아픈 데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나는 아내의 몸을 차게 식히고, 온몸을 맛사지합니다. 동네 병원은 오전 9시가 넘어야 문을 여는데, 큰일입니다.

[새벽 6시] 아이들을 깨워서는 빵으로 아침밥을 대신하게 하고 큰애를 학교까지 태워주고 왔는데, 아내는 여전히 누워 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병원에 가라'고 당부를 하고 집을 나섭니다. 아내는 오히려 '빈속으로 출근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목소리를 흐립니다.

출근을 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몇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받지를 않습니다. 아마 병원에 갔나 봅니다. 어쩌면 아내의 몸살은 이 못난 남편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동료들에게 뒤처진 것도, 매일 남편의 도시락을 싸야 하는 것도 아내에겐 부담이 될 테니까요.

할인매장에서 손질한 싱싱한 전복, 5마리를 16400원에 샀다.
 할인매장에서 손질한 싱싱한 전복, 5마리를 16400원에 샀다.
ⓒ 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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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점심시간입니다. 나는 급히 차 시동을 걸었습니다. 몸이 허할 때는 '전복죽이 좋다'는 구순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서 도중에 동네 할인점에 들렀습니다. 그 곳에서 다행히 '3마리에 9800원'으로 할인판매 중인 전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크기는 조금 작아도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어서, 나는 5마리를 1만6400원에 샀습니다. 마트의 젊은 남자직원은 깨끗하게 솔질을 한 뒤 해감을 걷어내고 내장을 분리해 줍니다. 나는 매장 아주머니에게 전복죽을 끓이는 법에 대해 자세히 묻습니다.

일정한 크기로 썰어 놓은 전복 - 왼쪽은 내장이다.
 일정한 크기로 썰어 놓은 전복 - 왼쪽은 내장이다.
ⓒ 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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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15분]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내는 여전히 누워 있습니다. 나는 먼저 쌀을 씻어서 물에 불려놓고 전복을 다시 깨끗한 물로 씻습니다. 그리고 급히 컴퓨터를 켜고는 '전복죽 끓이는 법'을 찾습니다. 다행히 어떤 분의 블로그에 그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씻은 전복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아 놓고 프라이팬을 꺼냅니다. 전기밭솥에도 죽 끓이는 기능은 있다고 하는데 미덥지 못하고 정성이 덜한 듯해서 프라이팬을 선택했습니다.

프라이팬에 불린 쌀과 전복살(주의할 점은 이때 내장부분은 넣지 않는다 것)을 넣고 자작하게 물을 부은 뒤 참기름을 가볍게 두른 후 중불에 볶습니다. 약한 불에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시간에 쫓기는 나는 중불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주걱으로 자주 저어주자 바닥에 눌어붙지는 않았습니다. 이때 취향에 따라 당근과 파 등의 채소를 넣기도 한답니다. 물기가 잦아들고 쌀이 토닥토닥 튀는 소리가 나면 불을 끕니다.

물을 자잘하게 부어 불린 쌀과 전복을 앉혀서 참기름을 두르고 볶는다.
 물을 자잘하게 부어 불린 쌀과 전복을 앉혀서 참기름을 두르고 볶는다.
ⓒ 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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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25분] 이제 볶은 쌀과 전복에 그 4배 정도의 물을 붓습니다. '내장에는 조금 비린 맛이 있지만 몸에도 좋고 죽의 색깔도 내게 한다'는 매장 아주머니의 말에 따라 전복 내장도 함께 넣었습니다. 이제 중불에서 10여분 정도 더 끓이면 됩니다. 나는 열심히 나무주걱으로 죽을 저으며 소금으로 간을 맞춥니다. 제법 뻑뻑해지면서 파르스름한 색과 구수한 향이 코끝을 간질입니다.

[낮 12시 40분] 드디어 죽이 완성됐습니다. 나는 작은 보자기에 죽을 담으면서 '나의 천사'를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 미처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아내가 모았던 돈을 몽땅 털어 세간살이를 사고 빚을 얻어 전셋방 얻었습니다. 당시 나는 덮던 이불과 쓰던 다리미, 수저 2벌만 가져왔고요. 그게 벌써 17년도 넘었습니다. '아이를 잘 키워야 된다'며 억지로 직장을 그만두게 하고 그 퇴직금으로 마련한 차도 11년이 지나 자주 고장이 나는데, 그 이후 가정이란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는 아내에게 어찌 생채기가 없을 수 있을까요.

아내는 '입맛이 없다'며 겨우 세 모금만 넘기고는 숟가락을 놓습니다. 나는 억지로 몇 술을 더 뜨게 하는데 아내는 고개를 저으면서 자리에 눕습니다. 아내는 '고맙다'며 내 손을 꼭 잡습니다. 거친 아내의 손을 잡는데 따뜻한 기운이 시린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야 맙니다. 이번 일요일에는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어서 아내가 가고 싶다고 하던 '서해 낙조'를 보고 오렵니다.

[낮 12시 50분] 나는 급히 차에 올라 직장으로 향합니다. 1시간의 점심시간이 지나고 이제부터는 다시 어제같은 일상이 계속되겠지요.

[전복죽 후기] 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아이들이 "전복죽이 맛있어서 큰아이는 세 그릇, 작은 아이는 두 그릇이나 먹었다"며 "혹시 OO네 죽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아내는 죽 때문은 아니겠지만 몸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 보입니다. 아내는 '아이들이 아버지가 점심 때 짬을 내어서 급하게 끓인 죽인 줄 짐작이나 하겠느냐'며 작게 소리내어 웃습니다.


태그:#전복죽, #아픈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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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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