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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주말, 친구 부부와 함께 1박 2일로 여행을 하였다.

우리의 계획은 그저 가을날의 화려한 오색 단풍잎을 보며 드라이브를 하다, 때로는 가볍게 산책도 하는 방식으로 전북 대둔산과 충북 화양계곡 그리고 경북 문경새재를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행 첫날 뜻밖에도 화양서원과 마주치게 되었다.

우암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노론이 주도해 설립
▲ 화양서원 우암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노론이 주도해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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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고려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재의 성격이 단순히 유자의 안거강학(安居講學)의 장소였던 데 반해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祀廟)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서원은 지방 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서원의 설립은 대체로 후손과 문인을 포함한 일향 사림들의 주관하에 이루어졌는데, 화양서원은 1695년(숙종 21)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 노론이 주도해 설립했으며, 다음해 사액(賜額)을 받았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은거하던 장소에 세운 서원으로 노론집권기에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송시열을 제향한 전국 44개 서원 가운데 위세가 가장 큰 서원이었다. 그러나 화양서원의 권세가 막강하여짐에 따라 백성의 폐해도 커졌다.

제수전(祭需錢) 명목으로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 군, 현에서 강제로 돈을 걷거나, 춘추제향(春秋祭享)을 지낸 뒤 원임(院任)들에게 치번(致膰)을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복주촌(福酒村)과 복주호(福酒戶)를 운영하고, 요역을 피하려는 부민(富民)으로부터 돈을 받고 피역(避役)시켜 부민이 지던 역을 가난한 백성이 대신 떠맡게 하는 폐단을 일으킨 것이다.

이쯤 되면 서원의 기능이 변질하여 교육기구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의 원성의 대상이 되는 기구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서원의 문란에 제동을 건 것이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치였으니 그동안 근 이백여년 동안 화양서원은 백성에게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는 집단으로 두려움의 존재였을 것 같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척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고 또한, 예론(禮論)에도 밝았기에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기도 한 우암 송시열, 그는 저승에서 사회로부터 지탄받아 철폐되는 화양서원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

우암 송시열이 정계은퇴 후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곳
▲ 암서재 우암 송시열이 정계은퇴 후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곳
ⓒ 양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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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앞에 있는 계곡을 건너니 암서재에 다다른다. 암서제는 조선 후기 붕당(朋黨)의 상징적인 인물로, 조정과 사림(士林)의 여론을 좌지우지했던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정계은퇴 후 은거했던 곳으로 살아생전엔 서인(西人)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집안엔 사람 사는 냄새 가득했을 법한데, 인적 끊겨 쓸쓸한 암서재엔 찾아오는 사람 반겨 맞는 이 없고 가을 바람에 가랑잎만 소리 내 우니, 나그네의 가슴엔 그저 허허로움뿐이다.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비
▲ 만동묘정비(萬東廟廟庭碑)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비
ⓒ 양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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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서원 이야기에서 바늘과 실처럼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만동묘이다.

만동묘는 1703년(숙종 29)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제사지내고자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세운 사당이다.

만동이란 물이 만 구비를 흘러 마지막에는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로서 존명의식(尊明意識)을 표현한 것이다.

만주족인 청(淸)은 명(明)을 정복하기 이전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을 일으켰는데, 이 사당은 명을 정벌하고 조선까지 침략한 청을 사상적으로 부정하려고 만든 것이다.

그러니 조선에서의 만동묘는 명에 대한 보은의 의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화양서원과 함께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 유생들의 끈질긴 건의를 받아들여 얼마 후 다시 복귀되었으나 일본강점기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하지만, 근래 만동묘의 묘정비가 출토되어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으며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문에 가까이 다가갔으나 글씨를 읽을 수가 없다. 일본 강점기 때 비문을 알아볼 수 없게 쪼아 버렸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된 사적의 모습을 보며 그 누구를 탓하랴.

열강의 각축장이 된 듯한 화양서원은 뭔가 나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었다.

나라가 강하지 않으면 언제 이런 수모를 또 겪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라가 강했으면 명의 도움도 필요 없고 청에 굴복당할 일도 없었다. 더군다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이랴.

화양서원을 나서며 한가롭던 여행길에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짐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태그:#화양서원, #암서재, #만동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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