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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법 아침·밤 공기가 싸늘한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이 오면서 몰고 온 것이 어디 찬 공기뿐이던가. 낮 시간보다 밤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골마을 사람들의 발길도 조금씩 뜸해지고 있다.
 

요즘은 저녁 때면 어김없이 몇 개 없는 가로등으로 인해 작은 시골마을 주민들은 플래시를 들고 집을 나서고 있다. 때문에 겨울이 될수록 저녁마실은 남다른 마음의 각오를 다지게 한다.

 

헌데 충남 태안군 고남에서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 분주한 발길을 옮기며 밤 마실에 재미를 붙였다고 한다.

 

도대체 어디들 가시는지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한가득이다. 마을에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하고 뒤를 쫓아가 보니 다름 아닌 작은 초등학교로 들어간다.

 

한밤중처럼 어둡기는 하지만 아직 저녁 무렵이라 ‘끼니를 해결할 때인데’ 하는 의문을 품으면서 엷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교실을 향했다.

 

"얼굴 나가면 안되는데..."

 

학교 건물로 들어서니 더욱 희한한 것은 노랫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이다. ‘노래교실이라도 운영하시나?’ 하고 문을 여니 아차하고 예상이 빗나갔음을 알아차렸다.

 

그렇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과 동네 아낙 20여명은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그것도 노래를 불러가면서. 참으로 즐거운 장면을 목격했다.

 

언제부터인가 한글학교가 전국적으로 유행처럼 번져 한글을 배우기 위해 마을의 학교나 회관을 이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곤 했다.

 

책상 위에는 색연필을 비롯한 각종 필기도구와 공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근데 특이 한 것은 손에는 노랫말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불쑥 찾아 온 것에 대한 미안함은 멀리하고 기타를 멋지게 둘러맨 40, 50대로 보이는 장년에게 '여기가 뭐하는 곳이냐'고 물으니 노래로 한글을 배우는 곳이라고 한다. 본인이 20여명을 가르치는 양승필 교사라고 말과 함께.

 

죄송한 마음은 일찍이 접었다는 생각에 취재를 요청하자 여기 저기 ‘안돼, 안돼, 얼굴 나가면 챙피해’하며 거부하신다.

 

그렇다고 발길을 돌릴 수 없는 법. 끝까지 버티면서 ‘얼굴 안 나와요’하니 양승필 교사도 도와서 ‘좋은 일인데 좀 나가도 어때요’하고 동조한다.

 

교실 뒤쪽으로 카메라를 들고 한 자리 꿰차고 앉아 수업을 들었다.

 

수업 방식은 간단했다. 먼저 노래를 불러 학생들로부터 관심을 이끌고 뒤이어 노랫말로 한글 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몇몇 아줌마들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니 주변 물건을 들고 얼굴을 가리기 바쁘다. 허나 수업에는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수업은 매일하는 것이냐고 담당교사에게 물으니 일주일에 월, 화, 목, 금 저녁 7시부터 두시간 동안 한글교실을 운영한다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3일만 하려고 했는데 학생들이 4일은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촬영을 의식하는 일부 아줌마들로 인해 초반 취재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평상시처럼 웃고 떠들면서 수업을 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

 

“선상님 계속 틀리네요. 종이 하나 더 주세요” 최고령 할머니가 손을 들고 말한다. 가까이 다가서니 ‘ㄱ’에 관련된 글자를 써야 하는 칸에 ‘ㄴ’을 쓰신 거다. 근데 이런 사람이 할머니만은 아니다. 수업을 잘 쫓아오는 분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다.

 

할머니는 “선상님이 잘 가르쳐 주면 이내 깜박하고 그러네. 나이가 먹어서 그렇지 뭐”하고 푸념하신다. 그래도 또 이내 열심히 글자를 적으신다.

 

“할머니 공부하시면서 뭐가 제일 좋으세요?”하고 물으니 “내 이름이라도 이렇게 쓸 수 있게 된다니 얼마나 기뻐”하며 또 고개를 묻고 열심히 그림 그리듯 한 글자 한 글자 적으신다.

 

“저녁은 드시고 오시는 거예요”하고 다시 물으니 “그럼 여기 올라면 빨리 먹고 오야지” 한다. 근데 옆에 계신 할머니는 “나는 오늘 못 먹고 왔어. 근데 간식 먹어서 괜찮아”하고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지으시며 대답하신다.

 

"공부는 못해도 노래는 잘혀!"

 

수업을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아줌마들이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 담당교사의 질문에 먼저 선수치기도 하고, 자신이 적은 것이 정답일 때는 ‘섰어요. 섰어요’하며 연신 대답한다.

 

노랫말 중 ‘ㄷ’자가 들어간 것을 찾으라는 담당교사의 말에 한 아주머니가 노랫말에 있지도 않은 “다방”이라고 외치자 모두 크게 실컷 웃는다. 수업시간은 내내 이렇게 화기애애하다.

 

노래를 통해 한글을 배우다 보니 학생들은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공부는 못해도 노래는 잘혀”하며 또 한 번 크게 웃는다.

 

웃고, 노래 부르고, 쓰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벌써 갈 때 되었나 하고 모두 의아해 하는 표정들이다. 나 또한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하고 의문이 들었다.

 

반장이 일어나 수업의 종료를 알리는 인사를 한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수업이 끝나고 나가면서 아까부터 카메라 때문에 신경쓰여 공부를 못하겠다던 아줌마가 한 마디 하고 간다. “기자 양반 수고했어요. 미안해요.”

 

역시 마음은 그게 아니었어. 아직 시골사람들은 창피함으로 카메라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아니에요, 고생하셨어요”하고 화답했다.

 

교실을 나와 되돌아가는 할머니들과 아낙들을 보니, 어두운 밤길로 많이 고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까 학교 교정으로 차를 몰고 들어오면서 교문이 보이지 않아 고생한 생각이 들었다. 교문에 가로등 하나 설치해 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한글학교, #태안군, #고남면,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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