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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 다운타운 인근의 주택가. 카트리나 참사가 발생한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길거리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
▲ 폐허 뉴올리언스 뉴올리언스 다운타운 인근의 주택가. 카트리나 참사가 발생한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길거리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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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년이 지났네요.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가 뉴올리언스를 유령도시로 만든 것이요. 2005년 8월 마지막 주의 뉴올리언스는 참으로 끔찍했지요. 당시 카트리나의 광폭한 물빗자루질로 유명을 달리했던 사람들만 수천명에 이르렀잖습니까.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미국의 또 다른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워싱턴과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힘세고, 화려한 미국의 뒤통수라고나 할까요.

물에 잠겨 우중충한 거리와 흉가로 변한 건물들, 지옥에서 빠져 나오려 몸부림치는 것 같았던 이재민들. 끔찍하고 안타까운 장면들이었습니다. 특히 유난히 흑인 거주자가 많은 뉴올리언스였기에 카트리나 참사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마치 제3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처럼 비쳐지기도 했습니다.

프레디 칼린도가 주택 개조회사 사무실을 겸해서 쓰고 있는 자신의 집 앞에서 뉴올리언스로 이주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과테말라 출신인 프레디는 뉴욕에 가족들을 남겨둔채, 카트리나 참사후 단신으로 뉴올리언스에 와  헐값에 집들을 매입한 뒤 고쳐서 되팔고 있다.
▲ 프레디 프레디 칼린도가 주택 개조회사 사무실을 겸해서 쓰고 있는 자신의 집 앞에서 뉴올리언스로 이주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과테말라 출신인 프레디는 뉴욕에 가족들을 남겨둔채, 카트리나 참사후 단신으로 뉴올리언스에 와 헐값에 집들을 매입한 뒤 고쳐서 되팔고 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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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는 실제로 흑인 비율이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통계 수치도 비슷할 것 같은데, 느낌만으로 따지면 워싱턴, 필라델피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흑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보스턴에서 워싱턴까지 동부 해안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아마 뉴올리언스가 흑인 인구 비율에서 수위를 달리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물론 카트리나 이전까지 얘기입니다만.

남부의 흑인들은 북동부의 흑인들과 좀 성향이 다르다고 하지요. 아마 뉴올리언스도 예외가 아닐 겁니다.

뉴올리언스의 치킨 체인점 처치스. 카트리나 수해 피해 이후 여전히 문을 닫은 채다. 시내 곳곳에서는 아직도 이 가게처럼 철문을 내려 잠그거나 판자로 못질해 둔 업소들이 많다. 처치스는 미국의 남부에 흔한 KFC와 유사한 치킨 전문 체인점이다.
▲ 문닫은 치킨 체인점 뉴올리언스의 치킨 체인점 처치스. 카트리나 수해 피해 이후 여전히 문을 닫은 채다. 시내 곳곳에서는 아직도 이 가게처럼 철문을 내려 잠그거나 판자로 못질해 둔 업소들이 많다. 처치스는 미국의 남부에 흔한 KFC와 유사한 치킨 전문 체인점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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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따라 주민들의 성향이 이렇다니, 저렇다니 말하는 것은 사실 좀 위험한 얘기입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어떻고, 경상도 사람들은 어떻다고 말하는 게 때때로 잘못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는 수가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지역적으로 차이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동부에서도 살아봤고, 남부에서도 살아본 몇 몇 미국 사람 주장은 한결같이 차이가 있다는 건데요.

대체로 남부의 흑인들이 온순하고, 좀 더 인간적이고 그렇다는 겁니다. 온순하다는 말에는 사실 백인이나 최근 급속히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아시안 중심의 사고가 스며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미국 남북전쟁에서 명확히 드러났듯 남부와 북부(혹은 북동부)의 정치적, 사회적 성향은 대체로 미국 역사의 전반부에서부터 차이를 보여왔습니다. 오늘날도 남부는 공화당의 아성이고, 북동부는 대체로 민주당 편이잖습니까.

물론 이 역시 백인이 중심인 주류적 입장을 중심으로 한 얘기입니다만, 흑인들 또한 지역적으로 상응하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북동부 흑인들은 남부의 농장 지역에서 탈출하거나, 빠져나온 사람들의 후손 또는 20세기 이후 이런 저런 이유로 농장 중심의 남부를 벗어나 공장 등 일자리가 많은 도시에서 살기를 열망한 사람이나 그 후손들이 대부분 아니겠어요.
반면 지긋 지긋했을 농장 주인들의 학대에도 불구하고, 남부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흑인들은 어떤 면에서는 순종적 성향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진취적이 아니랄지 혹은 무기력하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흑인 중심인 뉴올리언스 프렌치 쿼터의 재즈 악사들이 비를 맞으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카트리나 참사 이후 뉴올리언스에서는 흑인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중남미계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머지않아 뉴올리언스의 명물로 재즈에 이어 마리아치 악단이 추가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 거리의 악사들 흑인 중심인 뉴올리언스 프렌치 쿼터의 재즈 악사들이 비를 맞으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카트리나 참사 이후 뉴올리언스에서는 흑인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중남미계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머지않아 뉴올리언스의 명물로 재즈에 이어 마리아치 악단이 추가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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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나 참사 직후 나돈 여러 말들 가운데, 뉴올리언스가 아닌 워싱턴이나 필라델피아에서 비슷한 사고가 났다면 흑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겠냐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폭동을 염두에 둔 말이지요. 참사 후에도 한참 동안 안이했던 연방정부의 대처, 피해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어디 손 벌릴 데도 마땅찮은 흑인들의 처지를 고려하면 무슨 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무 일도 없었지요. 가게에서 먹을 것 등 소소한 물건이 없어지는 정도의 일이 있었습니다만, 극단적으로 굶주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건 '불법 행위'가 아니잖습니까. 어쨌든 카트리나 참사는 지역에 따른 흑인들의 성향 차이를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는 생각입니다.

헌데 최소한 상대적으로 말한다면, '속 좋은' 뉴올리언스의 흑인 숫자는 카트리나 참사로 인해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참사 직후 뉴올리언스를 떠난 수십만명의 흑인들중 적어도 십수만명 이상은 아직까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잖습니까. 이들 흑인들은 아마 악몽을 떠올리면 생전에 귀향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뉴올리언스 도심의 인구 공동화는 불가피한 일일까요. 뉴올리언스의 다운타운 즉 도심과 그 주변은 조금 과장하면 100% 흑인들일 정도로 이들의 밀집 거주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지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뉴올리언스에는 복구가 시작되기 전에 '새로운 이민'의 물결이 시작됐습니다. 중남미 계통 사람들이 속속 흑인들이 빠진 자리를 메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순히 일자리만 대체하는 게 아니라, 이들은 흑인들의 거주지까지도 그대로 물려받고 있습니다. 다운타운 북쪽의 주택가에서 만난 프레디 칼린도가 그런 예입니다.

40대 중반인 그는 카트리나 참사 후 부리나케 뉴욕에서 뉴올리언스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서는 반 토막도 더 난 헐한 값에 물에 빠진 집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레디는, 참사 직후 7만달러에 사들인 집이 2배도 더 뛰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역시 중남미 계통인 일꾼 서너명을 데리고 집을 사들인 후 이를 고쳐 파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고쳐놓은 가정 집 밖에 'FGB'라는 회사 간판을 달고 말이지요. 이 회사는 집을 고쳐서 팔거나, 아니면 집을 전면 수리하는 회사였습니다.

미국에서는 프레디처럼 '선구적'인 중남미 출신이 한 사람이 가게나 회사를 내면, 적어도 서너 가족의 중남미 출신이 따라 붙는다고 할 수 있지요. 똑같이 스패니시를 구사하니 말이 통하는데다, 무엇보다 일하는 문화가 비슷한 탓입니다. 흑인들과 중남미 계통은 일반 문화도 그렇고, 근로 문화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게 정설입니다.

프레디는 중미의 과테말라 출신인데, 부인과 아이들은 뉴욕에 남겨두고 본인만 왔다고 했습니다. 치안도 불안하고, 교육 환경도 좋지 않으니 뉴올리언스가 정상을 회복할 때까지 따로 생활할 계획이라는 거였습니다.

뉴올리언스 시 당국은 프레디 같은 중남미 출신이 참사 이후 1만명 정도는 유입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연방 구호 센터가 다운타운 도서관 한쪽에 세들어 있는 등 어수선한 상태인 것으로 봐 시 당국의 이런 추산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중남미 출신의 경우 상당수는 미국에서 합법 체류 신분을 얻지 못한 사람들로 당분간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도심을 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중남미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흑인 도시, 흑인들의 아성으로서 뉴올리언스의 인종 지도가 변하고 있는 겁니다. 다운타운 근처의 프렌치 쿼터로 대표되는 뉴올리언스는 미국에서 가장 프랑스다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지요. 케이준 후드로도 유명하고, 서정성 넘치는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가 상징인 곳입니다.

좋은 음식과 매력적인 문화, 뉴올리언스 특유의 따뜻함이 물론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인사가 만사이듯, 사람사는 사회의 모습은 그 곳의 구성원에 전적으로 달려있는 만큼 감자기 늘어나기 시작한 중남미계 인구로 뉴올리언스의 변화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저 카리브해에서 시작된 허리케인이 태풍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몰고온 셈 아니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미국 노숙기행 본문은 미주 중앙일보(www.koreadaily.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뉴올리언스, #허리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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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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