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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지 않았다. 내가 읽은 김훈 소설은 '칼의 노래', '현의 노래', '화장'이다.

그리고 그를 다룬 기사나 인터뷰를 읽다보면 눈에 걸리는 문장들이 몇 개 있다.

"밥벌이를 하기 귀찮다."

"자전거나 실컷 탔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문제는 사람들이 혼자 지내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비록 '남한산성'을 읽지는 않았지만 위에 읽어본 소설들과 그의 문장들을 곰곰이 따져보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언젠가 어떤 사진작가가 모든 사진작가는 결국 자기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술가는 어쩌면 전부 결국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을 감안하자면 김훈 소설의 화자들은 전부 김훈의 분신이거나 김훈이 동일시하는 역사 속의 인물들일 텐데 이들은 전부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위기에 처한 중년의 남자들이다. 이들은 위기를 불러일으킨 주체들이 아니라 발생한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도록 명령받거나 요구받는 주체들이다. 12척의 전선으로 왜군을 막아야 하는 이순신이 그렇고, 신라의 사다함과 월명태자의 공격을 받아 무너져가는 가야국의 악사 우륵이 그렇고, 아내가 투병생활을 하는 과정에 회사의 사활이 걸린 신제품의 판매전략을 짜야하는 '화장'의 화자가 그렇다.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가치를 실현하거나 개인의 세계에 빠져들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순신과 우륵처럼 원래 자기 임무에 충실하거나 엉뚱하게도 별로 매력없는 여인 추은주를 막연하게 흠모하게 된다. 한쪽은 꿈을 잊어버리고 다른 한쪽은 백일몽을 꾸는 셈이다. '남한산성'에 나오는 주인공들, 최명길과 김상헌은 아마 이순신과 우륵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역사의 실존인물이며 이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는 역사에 다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선택을 내리게 되기까지 그들의 심리를 작가 김훈이 추론하여 적은 것이 이들 역사소설의 대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훈의 역사소설 배경들은 하나같이 국난을 겪는 상황이다. 임진왜란, 가야의 멸망, 병자호란. 이런 위기상황은 1997년 경제위기와 비슷한 상황인데, 이 위기상황에 처한 주인공들은 자기 희생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는 메시아적인 주체가 되려 하지 않는다. '칼의 노래'를 예를 들자면 이순신은 군인정신이 강하고 강직하지만 그가 충성을 다할수록 임금은 그를 더 의심하고 외려 그의 경쟁자인 원균을 두둔하고 그의 공을 깎아내릴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장계나 편지와 같은 겉으로 드러난 문서에서는 충성스러운 신하인 듯 글을 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군신관계에서 보여야 할 예의 표현일 뿐이고, '개인' 이순신은 상황에 대해 때로는 냉소적이고 때로는 절망하면서 전투를 준비해나간다. 즉, 그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는 실제 상황에서 자기가 군인이고 신하라는 처지, 실존에 충실한 것이지 결코 자기를 버리고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처지는 경제위기에서 정리해고 상황에 몰린 중년남자들의 내면과 비슷하다. 나는 회사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정리해고 상황에 내몰렸다. 그 상황에서 나는 회사와 이 자본주의 체계를 뒤집어엎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그냥 내 일을 수행할 것인가.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주조는 바로 이런 중년남자의 무기력함이다. 자식 이면이 왜군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이순신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자식을 건사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중년남자의 불안과 비슷하다.

한편 현대를 배경으로 한 '화장'이 김훈, 그리고 김훈의 같은 세대들의 모습에 더 가까울 것이다. '화장'의 화자가 상상적으로만 성적인 일탈을 꿈꾸지만 그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 불륜을 저지른다든가 바람을 핀다든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일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일탈은 그의 소년시대, 즉 가장이나 사회적 중견으로서의 책임이 없던 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와 관련이 있다. 위에서 그가 한 '밥벌이의 귀찮음'이나 '자전거 여행'이 바로 그런 바람을 드러내는 문장들이다.

나는 그의 마지막의 문장 '혼자 있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서 발생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혼자 있지 않고 계속 누구와 같이 있으려 하거나 끼리끼리 모여서 작당하는 것은 혼자 있기를 두려워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혼자 놀 수 있는 거리가 없어서 누구와 같이 놀아야만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김훈의 질타일 수도 있다.

김훈의 소설들이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이런 요인들이 작용할 것이다. 혼자 놀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에 대한 반감. 열심히 일했지만 계속 위기에 처해있는 내 처지에 대한 불안감. 즉, 김훈은 역사소설을 통해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소설을 통해 현대 한국의 중년남성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사이월드 미니홈피와 시네21의 개인 블로그 '사과애'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칼의 노래

김훈 지음, 문학동네(2012)


태그:#김훈, #칼의 노래, #현의 노래, #화장,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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