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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마흔을 넘긴 데이빗 캐머런 보수당수.
ⓒ 보수당 홈페이지
토니 블레어 총리가 오는 6월 27일 사퇴를 예고하면서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의 총리 취임을 앞두고 있는 영국 정치권에 때 아닌 '블레어 후계자' 논쟁이 일고 있다.

그러나 10년 임기를 마치고 퇴장을 눈앞에 둔 블레어의 후계자를 자처한 사람은 정작 일찌감치 차기 총리로 '낙점'된 고든 브라운 장관이 아니라 야당인 보수당의 데이빗 캐머런 당수다.

현직 야당 당수가 물러나는 여당 총리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나서는 것도 우습지만, 여론조사에서 노동당 차기 총리를 제치고 1위를 달리던 보수당수가 인기 하락 끝에 결국 중도 사퇴를 택한 노동당 출신 총리를 계승하겠다고 나선 일은 더더욱 이해 못할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중도논쟁이 '블레어 후계자' 논란 촉발

'블레어 후계자 논쟁'에 불을 붙인 사람은 보수당의 예비내각 재무장관직을 맡고 있는 조지 오스본 의원이었다. 캐머런 당수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오스본 의원은 지난 6월초 데이빗 캐머런이야말로 토니 블레어의 계승자라고 말해 고든 브라운 진영을 당혹스럽게 했다.

오스본 의원에 따르면 보수당이 차기 정부의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 교육 및 의료개혁 정책이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 정부가 추진해온 개혁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오스본 의원은 차기 총리 취임을 앞둔 고든 브라운 장관에 대해서는 블레어가 추진해온 개혁정책을 되돌리려 한다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결국 보수당의 데이빗 캐머런 당수가 줄곧 내세워온 '개혁 보수' 노선, 즉 기존의 전통 보수당 노선을 탈피한 중도노선이 블레어 총리가 내세운 '신노동(new labour)' 노선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블레어의 후계자는 브라운 장관이 아니라 캐머런 당수라는 것이다.

물론 보수당 노선의 개혁을 위해서는 좌파적 아이디어를 일부 수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당 지도부 경선 당시의 공약이 말해주듯 데이빗 캐머런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보수당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캐머런 당수는 취임 이후 '보수당이 런던 금융가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세간의 시선을 불식하기 위해 연신 대기업을 향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보수당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감세 정책도 섣불리 꺼내들지 않았다.

진보진영의 단골메뉴였던 환경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 아예 푸른 나무를 집어넣은 당 로고를 새로 만들었고(이 로고가 처음 등장했을 때 BBC의 길거리 인터뷰에 응한 시민 중 상당수가 '녹색당 로고일 것'이라고 답변했다) 캐머런 당수 자신은 걸핏하면 점퍼 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했다. 노동당 의원들한테도 인기를 잃은 블레어 총리가 임기 말 교육개혁안 통과에 어려움을 겪자 이를 전폭 지지해 국회 통과를 밀어붙인 것도 캐머런 당수가 이끄는 보수당이었다.

보수당의 이러한 변신에 대해 한편에서는 '이미지 정치'에만 치중한다는 비아냥이 잇따랐고 또 한편에서는 전통적 지지층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특히 보수당의 전통적 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정책구상이 선보일 때마다 당내 우파세력의 비난이 잇따랐다.

▲ '녹색당을 연상케 한다'는 평가를 받은 보수당의 새로운 로고.
ⓒ 보수당 홈페이지

보수당 중진들 '노동당 2중대냐' 볼멘소리

당내 일부 중진들은 아예 갓 마흔 살을 넘긴 젊은 당수가 주도하는 '노동당 따라 하기'에 불쾌한 심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꿈 깨라'는 것이다. 일부 의원들은 노동당의 상징색이 빨간색이라는 점에 빗대 '우리가 파란색 노동당이냐'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한다. 이른바 '노동당 2중대'론이다. 그러나 당내 비난이 일 때마다 캐머런은 '그래서 얻은 것이 뭐냐, 총선에 세 번 연거푸 진 것밖에 더 있느냐'며 반대파를 압박했다.

이렇게 데이빗 캐머런 당수가 취임 이후 선보인 중도노선을 감안하면 블레어 후계자 논쟁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2005년 보수당수 경선 과정에서 데이빗 캐머런이 일부 언론사 중역들과 함께한 저녁 자리에서 '내가 블레어의 후계자'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보수당 예비내각의 재무장관이라는 핵심 요직을 맡고 있는 측근의원이 나서 '데이빗 캐머런=블레어 계승자'라는 구호를 내건 데는 무엇보다 다음번 총선에서 맞대결할 것이 확실시되는 노동당의 고든 브라운 차기 총리와 대립각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오스본 의원은 "고든 브라운 장관뿐 아니라 브라운 내각의 전면에 포진할 측근 인사들이 하나같이 블레어 개혁에 반대해왔다"고 공격했다. 오스본 의원이 노동당의 브라운 장관보다 보수당의 캐머런 당수가 블레어 총리와 더욱 닮은꼴이라며 밝힌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1) 자립형 사립고 성격의 '아카데미'를 계속 증설하자는 블레어 구상에 대해 캐머런은 적극 찬성, 브라운은 조건부 찬성.
(2) 부유층 과세와 세액 공제 확대에 반대하는 블레어 총리의 세제 정책에 대해 캐머런은 적극 찬성, 브라운은 세액 공제 확대 필요성 강조.
(3) 의료전달 체계를 개혁하는 데 민간서비스 구상을 도입하자는 블레어 정책에 대해 캐머런은 적극 지지, 브라운은 유보적 방침.


이렇게만 보면 노동당 내 좌파와 전통적 지지자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당 노선을 오른쪽으로 끌어당긴 블레어나 '보수당을 팔아먹는다'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노동당 출신 총리의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나선 캐머런 당수 간에 적지 않은 공통점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것만으로는 야당 당수가 느닷없이 여당 총리를 계승하겠다고 나선 것을 충분히 설명하기 힘들어 보인다. 인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블레어의 이름값에 기대어 표를 얻겠다고 한들 부동표를 얼마나 모을지도 불투명한데다 기존 보수당 지지자의 이반이라는 위험성마저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 토니 블레어 총리와 6월 27일 차기 총리로 취임하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오른쪽).
ⓒ AP=연합뉴스

보수당의 '노동당 흔들기' 전략

오히려 당수를 맡아 차기 총리 취임을 준비하는 고든 브라운 장관의 노동당 속사정을 관찰하면 보수당이 이번 후계자 논쟁을 통해 의도하는 노림수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여다보인다.

노동당 내에서 고든 브라운 차기 총리와 호흡을 맞출 부총리 경선에서 접전을 벌인 6명의 의원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너도나도 '블레어 때리기'에 가세했다. 어떤 후보들은 블레어 10년 동안 외면해온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가치를 다시 입에 올리는가 하면, 또 다른 후보는 블레어 총리가 트레이드마크처럼 내세우는 공공개혁이 지나치게 앞서나가고 있다고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블레어 때리기'에 나선 6명의 부총리 후보 중 4명이 현직 각료라는 점이다. 노동당의 인기 회복을 위해 어느 정도의 '블레어 차별화'는 불가피한 일. 그러나 부총리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블레어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자 급기야 고든 브라운 장관이 나서 부총리 후보들에게 '오버하지 말라'는 공개경고를 내리기까지 했다.

보수당이 당내 전통적 지지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블레어 계승론'을 꺼낸 데는 바로 이러한 노동당 내의 복잡한 역학관계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인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블레어와 차별화 전략에 '올인'한 노동당 내 차기 주자들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브라운 대 캐머런'으로 전개될 차기 총선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다음번 영국 총선을, 교육 및 의료정책에서 블레어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는 '참신한' 데이빗 캐머런과 여전히 '구시대적' 노동당 이념으로 회귀하려는 고든 브라운의 대결로 몰아가겠다는 속셈을 드러내보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당 진영에서는 당내 경선 일정 때문에 보수당의 이러한 구도 설정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다. 지금 급한 것은 보수당과 논쟁이 아니라 내각 구성 등 브라운 정부의 진용을 새로 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브라운 진영은 차기 내각 구성을 놓고 난맥상마저 보이고 있다. 제3당인 자유민주당의 당수까지 지낸 중진의원 패디 애시다운에게 각료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던 사실이 공개되면서 브라운 장관이 곤경에 빠진 것이다. 브라운 캠프 측은 이러한 사실이 공개된 뒤에도 여전히 자유민주당 소속 의원 한두 명을 차기 브라운 내각에 영입할 수 있다고 공언하며 '문제될 것이 없다'는 태도다.

▲ 고든 브라운 차기 총리와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보수당 차기 주자 데이빗 캐머런의 전략을 보도한 BBC 뉴스.
ⓒ BBC

여전히 불분명한 보수당 노선

하지만 당 안팎의 여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당장 진보 성향의 일간지 <가디언>은 브라운 장관이 노정객을 영입하려한 시도를 빗댄 '브라운 드림팀'이라는 가상 내각 시나리오를 실어 브라운 장관을 비꼬기도 했다. 이 '드림팀'에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영화배우 숀 코네리,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세골란 루아얄 같은 '흘러간 인물'들이 모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고든 브라운이 총리 취임 첫 작품으로 선보일 초대 내각이 '잡탕 내각'이 될 것이라며 냉소적 비판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노동당 내에 이러한 속사정이 있긴 하지만 '블레어 후계자론'을 앞세운 보수당의 '노동당 흔들기'가 성공을 거둘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데이빗 캐머런 당수의 '개혁 보수' 노선이 아직 확고한 당내 지지를 얻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데다 때로는 '개혁 보수'의 실체가 도대체 뭐냐는 의구심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브라운 장관이 블레어 총리와 바통 터치를 하면서 나타난 일종의 '브라운 효과'로 캐머런의 지지율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보수당은 말한다. 자신들의 중도 노선은 블레어의 '신노동(new labour)'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범한 실패에서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그리고 보수당의 원칙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원칙을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해 나가겠다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러한 수사 자체가 안 그래도 '이미지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데이빗 캐머런 자신만큼이나 겉은 화려하고 실체는 불분명한 정책 노선을 방증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보수당의 신장개업 전략이 단순히 '노동당 따라 하기'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태그:#고든 브라운, #데이빗 캐머런, #토니 블레어, #영국 보수당, #영국 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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