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싱그러운 뒷동산 숲길
ⓒ 이승철
"당신은 나이가 들어도 웬 아침잠이 그렇게 많은지 몰라."

아내가 또 잔소리를 한다. 그러나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이 내겐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몇 번의 잔소리를 듣다보니 이젠 이게 아니다 싶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기로 했다.

전에 직장에 나갈 때는 일이 생기면 부지런히 새벽에 일찍 일어나 출근을 했었다. 그러나 정년퇴직을 한 후론 그럴 일이 없어져 몸도 마음도 더욱 늘어졌는지도 모른다. 하긴 작년까지 몇 달 동안 아내와 함께 새벽기도회에 다닌 적도 있었지만 그 뒤로는 늦잠이 몸에 배고 말았다.

그러다가 부쩍 해가 일찍 뜨는 6월 중순 들어 아내의 잔소리를 핑계 삼아 아침 일찍 일어나 뒷동산 산책을 하기로 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내가 마음먹고 일찍 일어난 시간이 새벽 6시. 그렇게 첫날 뒷동산에 올랐다. 그런데 모처럼 일찍 일어난 나와는 달리 뒷동산 공원엔 이미 운동을 끝내고 쉬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못 보던 분이시네, 근처에 사십니까?"

모두 낯선 얼굴들이라 쑥스러워 한쪽으로 돌아서서 가벼운 맨손체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노인 한 분이 내 곁으로 다가오며 알은체를 한다.

"네, 바로 산 밑에 있는 아파트에 삽니다. 아침산책은 오늘 처음 나왔습니다."

나이 많아 보이는 노인이 먼저 말을 걸었으니 공손하게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 노인은 73세라고 했다. 우리집보다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이웃동네에 살고 있는 노인인데 매일아침 이 숲까지 아침산책을 나온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매일 나오세요, 얼마나 공기도 맑고 상쾌합니까?"

노인은 내게 매일 아침 일찍 나오라고 당부를 한다. 그런데 이 노인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팔굽혀펴기를 한 번에 80개를 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철봉 매달리기도 5개를 거뜬히 한다.

"참 대단하십니다. 건강하셔서 아주 오래오래 사시겠습니다. 백수를 넘기시겠는데요."

진심이었다. 공연한 공치사가 아니라, 나보다도 월등한 체력에 감동하여 한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을 받는다.

"오래 살기 위해 운동하는 것 아닙니다. 너무 오래 살면 자식들에게 짐이 되니까 적당히 살아야지요. 그저 사는 날 동안이라도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지요."

▲ 배드민턴 하는 사람들
ⓒ 이승철
▲ 숲속에서 아침 운동하는 사람들
ⓒ 이승철
노인의 얼굴은 매우 밝고 행복해 보였다. 몇 년 전까지 일을 했었지만 70세부터 일에서 손을 떼었다고 한다. 단독주택을 한 채 소유하고 있는데 월세가 조금씩 나오는 것으로 할머니와 둘이 그럭저럭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자식들이 용돈은 넉넉히 주느냐고 물으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웃는다. 3남매를 두었는데 생일이나 명절 때면 용돈을 조금씩 주고 간다는 것이었다.

"자식들도 아이들 교육시키랴, 집 장만하랴, 허리가 휘잖아요? 많은 용돈 기대할 수 있나요? 허허허."

노인이 유쾌하게 웃음보를 터뜨린다. 보통 키에 하얀 머리카락이 머리의 옆과 뒤쪽에만 보이는 대머리 노인은 여전히 밝은 표정이다.

"운동은 이렇게 하는 것이 최고예요, 비용도 전혀 들지 않고… 저 사람들도 다 가난한 사람들이라 이렇게 돈 들지 않는 아침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나지막한 뒷동산은 6월의 짙푸른 숲이 우거져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운동 나온 사람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노인들과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다. 젊은 사람들은 일터로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운동을 나올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을 하는 모습도 다양했다. 숲 속 공터에 마련된 배드민턴장에서는 복식 4팀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전 중이다. 또 다른 공터에서는 빙 둘러서서 기체조를 하는 모습이었고, 아주머니들 몇은 산길을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어떤 노인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쿵쿵 부딪히는 모습이고, 50대로 보이는 두 명의 남성은 공터를 빙빙 돌며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부부는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며 남편의 구령에 맞춰 맨손체조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노인들과 어울려 적당히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길가 연립주택의 창가에는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작고 푸른 포도송이를 매달고 있는 모습이 예쁘다. 또 다른 연립주택은 담장이 둘러 있는 작은 마당이 바라보인다.

▲ 손바닥만한 마당 귀퉁이의 텃밭
ⓒ 이승철
▲ 화분에 키운 할머니의 상추와 고추
ⓒ 이승철
그런데 그 마당가에서 할머니 한 분이 무엇인가를 뜯고 있었다. 다가가 살펴보니 상추다. 창문 밑 마당가에는 몇 개의 커다란 화분에 상추와 고추를 키우고 있었는데 아주 싱싱한 모습이다. 또 마당 한 귀퉁이에도 손바닥만큼 작은 상추밭을 가꾸어 놓은 모습이 예쁘다.

할머니는 마침 화분에서 자란 상추의 잎을 뜯고 있었다. 예쁜 상추밭과 화분을 사진으로 몇 컷 담았다. 그러자 상추를 뜯고 있던 할머니가 그런 건 뭐하려고 사진을 찍느냐고 묻는다. 할머니가 가꾸어 놓은 상추밭과 화분들이 정말 예뻐서 사진을 찍었노라고 하자 "별걸 다 예쁘다고 한다"면서 웃는다.

그런데 상추를 뜯는 할머니의 손놀림이 약간 어색해 보인다. 살펴보니 한쪽 손에 장애가 있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그 손에는 뜯은 상추를 조금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힘들게 상추를 뜯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이렇게 상추밭과 화분을 만들고 가꾸셨나요?"

한쪽 손밖에 못쓰시는 할머니가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내가 물어보았다.

"별로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내가 시나브로 이렇게 가꾸었지요."

짐작했던 것처럼 한쪽 손이 장애인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서 가꾼 상추밭과 화분이었다.

화분에 심어 가꾼 화분에서는 고추도 몇 개씩 열려 있는 모습이 귀엽다. 조금 더 자라면 된장찌개 끓일 때 몇 개 따다가 숭숭 썰어 넣으면 맛이 좋을 것 같다고 하자 할머니가 빙긋 웃는다.

할머니를 따라 나온 작고 하얀 강아지가 귀여워 잠깐 어르다가 돌아서 나오자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 웬일인가 싶어 뒤돌아서니 할머니가 한줌 쥐고 있던 상추를 내 앞으로 내민다.

"이거 같다가 점심 때 상추쌈해서 드셔보우, 이래봬도 농약을 하지 않은 거니까 무공해 식품이라오. 가까운데 사신다니까 그냥 이렇게 드려도 되겠지요?"

비록 한줌의 상추였지만 장애인 할머니가 힘들여 가꾼 것이라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선뜻 받아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머뭇거리며 할머니의 얼굴을 보니 정말 순박해 보이는 표정에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하자 "뭘요, 이렇게 조금밖에 안 되는데…." 할머니는 오히려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돌아선다.

▲ 할머니가 나누어 준 상추
ⓒ 이승철
집으로 돌아와 상추를 든 손을 아내 앞에 내밀자 "웬 상추냐?"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참 귀한 상추"라며 할머니의 말처럼 점심에 상추쌈을 해먹자고 한다.

아침 운동 길에서 할머니가 정겨운 마음으로 나누어준 상추 때문이었을까? 이날따라 내 기분도 한층 넉넉해진 느낌이었다. 아내가 깨끗이 씻어서 작은 그릇에 담아 놓은 할머니의 상추에서는 싱그러운 초록빛 정이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뒷산, #아침운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