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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 사이를 가로 질러 큰 도로가 있고, 그 너머 자그마한 냇가를 지나 야트막한 산 아래로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장항선 기찻길이 동네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는 시골에서 유년을 보냈다.

칙칙폭폭 흔쾌한 리듬에 맞춰 오르락내리락 기차가 고개를 내밀면 냇둑을 따라 기차 꼬리를 잡아보겠다며 손을 흔들고 뛰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가끔 기차 안 친절한 사람들은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도회지 친척집에 놀러 갈 형편도 못 되던 어린 시절, 저 기차 안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사람들이 타고 다닐까? 늘 동경에 쌓여 칸 수를 세어보기도 하고 방학숙제로 기차 타고 어디 가는 것 마냥 기차를 그려 보기도 했다.

'비둘기호', 파란 옷을 입은 이 정겨운 이름. 완행열차와의 추억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중학교 3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드디어 그 열차를 타야만 하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엄마는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은행에 취직하길 원하셨고,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이 쉽게 깨지지 않아서 고집을 부려 충남 천안으로 연합고사를 보러 가기로 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드디어 연합고사 전날, 몇몇 친구들과 인솔 선생님 뒤를 졸졸 따르며 콩닥콩닥 뛰는 가슴으로 충남 광천역에 와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어릴 적 품었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먼저 앉는 게 임자인 기다란 의자에 엉덩이 끼고 촘촘히 끼어 앉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자리가 없으면 보따리를 바닥에 놓고 털썩 주저앉아 가는 사람도 태반이었다. 얼떨결에 완행열차의 맛을 오며 가며 본 후, 천안 시내에 있는 여고로 배정을 받고 엄마의 걱정은 하루하루 늘어만 갔다.

천안의 자취 집으로 떠나야 할 2월 막바지, 한기가 쉽게 가시지 않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책상 겸 밥상으로 쓸 다리 네 개 접혀지는 자그마한 상과 간단한 세간살이, 이불 한 채, 자식한테 져 준 엄마께서 만들어 준 밑반찬 통 몇 개를 손수레에 싣고 20여 분 거리의 기차역으로 나섰다.

앞에선 끌고 뒤에선 밀며 가던 그 길, 찬바람이 불었지만 아버지의 든든한 등과 꿈이 있었기에 춥지 않았다. 한 보따리의 짐과 아버지와 난 완행열차에 올랐지만 마냥 신나는 일만은 아니었다. 어려운 형편인데도 묵묵하게 내 편이 되어 주신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을 흘끔거리며 혼자 잘 해낼 수 있을까는 걱정이 앞섰다. 천안역까지 3시간 정도 걸리는 기차 안은 바늘방석 같았다.

동떨어진 생활이 낯설고 힘들어 주말마다 다 먹은 반찬통을 보자기에 싸서 오후 1시 10분쯤 장항선 열차를 타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빨리 집에 가고픈 자취생들의 뜀박질로 천안 시내는 술렁거렸다.

그 시간 완행열차는 반찬통을 든 자취생들의 수다로 왁자지껄하며 진풍경이 펼쳐졌다. 철커덕철커덕, 내 꿈을 싣고 달리던 기차 그 안에서 난 행복한 상상에 젖곤 했다. 까만 눈동자의 아이들이 나만 바라보는 모습을….

그 다음 날인 일요일 오후 3시쯤, 잠잠하던 장항선 상행선 기차는 어제 내려갔던 자취생들의 물결로 가득했다. 양손에는 반찬이 가득 든 반찬통이 들려있었고, 그 냄새로 기차 안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렇게 3년간 나의 처진 어깨와 꿈을 싣고 달려 주었던 완행열차. 결국 가정 형편상 꿈을 접어야만 했다.

손때 묻은 짐들을 가져가기 위해 아버지께서 올라오셨다. 보따리에 선생님이 되겠다던 꿈도 꼭꼭 묶어 장항선에 싣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제 사셨는지 바나나 우유와 찐빵을 건네시는 아버지, 비록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열심히 공부했고 묵묵하신 아버지의 큰 사랑을 맘껏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 그렇게 애용하던 파란 띠를 두른 비둘기호, 초록 띠를 두른 통일호는 추억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젠 빨그스레한 무궁화호도 뜸해지고 거의 새마을호를 이용해야 한다. 더 빠르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 자부하는 초고속 열차(KTX) 틈에 난 가끔 내 꿈을 싣고 달렸던 완행열차를 기억한다. 그리고 사춘기 시절 그 마음으로 다시 타보고도 싶고 그립기도 하다.

자가용 탓에 기차를 탈 일이 지극히 없었는데, 작년에 4, 5학년 두 아들과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친정 나들이를 갔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영등포역까지 오느라 시달린 아이들은 작은 불평이 있었는데, 기차를 타서 자기 번호를 찾아 좌석에 앉고서는 불평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설레는지 다리 발판도 내려 보고 의자도 기울여 보는 등 술렁 대기 시작했다.

뒤이어 쫓아온 홍익회 아저씨의 이동 슈퍼. 아이들은 삶은 계란을 집었다가 구운 계란을 집었다가 음료수, 오징어를 집는 둥 난리 법석을 떨었다. 그래도 묵묵히 기다려 주시던 홍익회 아저씨, 그 아저씨 마음이 바로 완행열차였다.

완행열차는 그랬다. 간이역에 서서 다른 기차를 기다렸다가 보내고 나서야 경적 울리며 갈 길을 가는 열차. 그 안에 사람들도 그냥 기다린다는 거, 여유로움을 알게 해 주는 기차였던 거 같다. 우리도 살면서 너무 촉박하게 내달리지 말고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 줄 수 있는 완행열차 철학을 가졌으면 싶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아이들도 기차에 대한 추억 거리를 마음에 새길 수 있었고, 아빠 차로만 외가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비록 조금 고생은 하더라도 기차로 외가를 갔다 왔다는 기억이 오래 남을 수 있어서 좋은 친정 나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 입니다.


태그:#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광천역, #천안역, #비둘기호, #완행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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