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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1학년 입학식 후 수련회에서 경현이(오른쪽에서 두번째)와 함께 한 친구들(왼쪽부터 원석, 창수, 종혁).
ⓒ 임정훈
경현이는 지난 2월 9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의 제자입니다. 성격도 밝고 목소리도 우렁차고 아주 쾌활한 녀석입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아이들보다 보는 능력(視力)이 많이 부족합니다. 시각 장애 3급이거든요.

저도 안경을 벗으면 한 치의 절반도 못 보고, 뵈는 거라고는 뿌연 안개뿐인 사람이지만 경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어떤 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상상을 하거나 경현이의 말을 통해 짐작을 할 뿐입니다.

@BRI@지난 2004년 경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특수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일반학교를 선택한 건 경현이의 뜻이었습니다. 장애학생을 특수학교에서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학교에서 일반학생과 공학(共學)시키는 교육을 가리키는 통합교육을 경현이가 선택한 것입니다.

저는 경현이의 이름보다 '특수교육대상자'라는 길고 어색한 단어를 먼저 만나야했습니다. 그리고는 경현이의 담임을 맡게 됐지요.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입학식을 마치면 곧장 신입생 수련회를 떠납니다.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인 셈입니다. 경현이를 가까이서 만난 건 바로 그 수련회에 가서 아이들에게 방 배정을 하면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미 경현이가 시각 장애를 가진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처음 시작하는 고교 생활이 불편하지 않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담임이라는 이름으로 마땅히 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더군요.

교육부 차원에서 혹은 지자체나 학교 단위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펴는 것 말고는 생색내기에 가까운 배려일 뿐이겠더라고요.

일반학교에서도 장애 학생 맞을 준비 돼 있어야

▲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졸업할 때까지 기훈이(서 있는 학생)와 함께 지내게 된다. 빨간 동그라미 속의 학생이 경현.
ⓒ 임정훈
아이들도 저마다 다른 중학교에서 모인 상황이라 어색한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었지만 경현이에게 친구를 붙여주는 일이 급선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누군가 경현이와 함께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이 불편한 친구를 돕는 일에 아이들이 선뜻 나설까하는 걱정이 내심 가득했습니다.

그때 주저 없이 상덕이가 손을 번쩍 들며 자신이 함께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잘 지내기를 바란다며 두 녀석을 짝 지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서너 명의 아이들도 경현이를 도와 함께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이 순수한 우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기에 함께 잘 지내도록 부탁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경현이의 고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각장애를 가진 학생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일반학교(물론 다른 장애학생에 대한 준비도 없습니다만)에서 경현이가 생활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배율이 높은 돋보기 두 개를 책에 대고, 눈에는 역시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끼고 있어도 진도를 따라잡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 점자를 배운 후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특별 주문 제작해서 선물해 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읽고 있는 경현이.
ⓒ 임정훈
▲ 원본은 그리 두껍지 않은 한 권 짜리인데 점자책으로 만들면 엄청난 두께의 두 권짜리 책이 된다. 주문 제작이다보니 값도 보통 책의 2-3배에 이른다.
ⓒ 임정훈
또 학교 안의 낯선 길들을 익히는 데에도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잘 보이지 않으니 걸음걸이의 숫자로 학교 안의 건물들을 익혔습니다. 화장실은 교실에서 왼쪽으로 나가서 00걸음, 급식실은 어느 방향으로 00걸음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 때마다 친구들이 옆에서 경현이를 부축하듯 하고 다녔지요.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일 이니까요.

학년이 바뀌고 문·이과로 나뉘면서 경현이와 함께 하던 친구들도 계열이 나뉘고 반이 엇갈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는 기훈이가 경현이랑 함께 지내게 됩니다. 물론 기훈이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그 사이 경현이는 시력이 더 나빠져서 마침내 점자를 배우게 됩니다. 학교에서도 경현이가 점자를 배우러 가야하는 날에는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점자를 다 익힌 경현이에게 물었더니 돋보기 서너 개로 힘들게 책을 읽는 것보다 손으로 점자를 읽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다고 하더군요.

다만 점자로 된 교재나 읽을거리가 별로 많지 않다는 게 문제지요. 점자출판사는 물론 제대로 된 국공립 점자도서관 하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고 합니다.

'특수교육대상자'라는 이름에 갇힌 세상의 편견 사라졌으면

기훈이를 비롯한 친구들이 3년 동안 함께 한 덕분에 경현이는 고교 생활이 외롭거나 우울하지 않았습니다. 혹 아이들이 경현이를 '왕따'라도 시키면 어쩌나 했던 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신체적 특수성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 한 적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친구들이 힘이 돼 주었습니다.

지난 졸업식에서 경현이와 기훈이는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경현이는 3년 동안 다른 친구들 못지않게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기 때문이고, 기훈이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빛나는 우정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졸업식장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따뜻한 박수로 두 친구를 축하해주었습니다. 비록 단상에 함께 오르지는 못했지만 경현이와 함께 한 모든 친구들이 그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 졸업식을 마치고 경현이와 기훈이가 함께 했다. 비록 진학할 대학은 다르지만 졸업 후에도 이들의 우정은 변함없을 것이다.
ⓒ 임정훈
이제 경현이는 대학생(나사렛대 점자문헌정보학과)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가깝게 지낸 기훈이를 비롯한 친구들이 모두 다른 대학으로 진학을 합니다. 그러나 고교 친구들과의 우정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대학생이 된 경현이의 당당하고 멋진 모습과, 여전히 계속될 친구들과의 아름다운 우정을 저는 지켜볼 것입니다.

일반학교에서는 모든 조건이 부족하고 부실했지만 대학에 가서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경현이가 공부도 하며 우정을 쌓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수교육대상자’라는 이름에 갇힌 세상의 편견도 사라졌으면 합니다. 정부 기관에서도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되도록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기대합니다.

졸업식장 뒤편에서 경현이의 수상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경현이 아버님의 마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경현이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우리는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 수밖에는 없으니까요.

▲ 졸업식에서 단상에 올라가 상을 받는 경현이와 기훈이
ⓒ 임정훈

▲ 졸업식에서 특별상을 받고 단상을 내려오는 경현이와 그를 부축하는 기훈이. 졸업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박수를 받았다.
ⓒ 임정훈

태그:#시각장애인, #졸업식, #점자책, #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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