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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당시 유치원생이던 필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집으로 향했다.

 

지친 발걸음을 앞세우고 터덜거리며 들어온 집 안에는 '비디오'라고 불려지며 뭇 아이들의 꿈의 대상이던 물건이 놓여 있었다.

 

가방을 팽개치지도 않고 바로 달려나가 금방 집 앞에서 헤어졌던 친구녀석들을 목이 쉬어라 쌍방향으로 불러가며 끌어들이고는 모두가 둘러 앉은 자리에서 가슴 떨려하며 비디오 테크의 전원을 켰다 소유한 테이프라고는 비디오를 살 때 대리점 아저씨가 준 "반공홍보용" 테이프 뿐이였는데도 동네에 모든 친구들을 번갈아 불러 온갖 마음의 표시(?)를 받아가며 왕으로 군림했던 지난 시절..

 

아마 그 시절 부터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비디오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게. 지금 말로 하자면 다양한 콘텐츠 확보(비디오 테이프 부족)와 확실지 못한 수익성(비디오 보급의 흥망)이 보장되지 않기에 부정적 시각으로 본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으나 전국에 팔려나간 비디오는 영상문화 전반적인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극장에서 보고 난 뒤 굳이 명절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보고싶은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었고, 아이들은 꼭 저녁시간때에만 국한되지 않고 아무때나 만화영화를 볼 수 있게 끔 만들어버린 비디오 보급은 나아가서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이라는 신종 직종까지 창출하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은 당시 금액으로 2000원을 받고 영화 한편을 대여해 주었는데 아마 지금 금액으로 생각하면 5000원이 넘어서지 않을까? 만약 지금 그런 금액을 책정한다면 대부분의 모든 이들이 개봉하는 극장엘 가서 보고 말겠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 때 당시에는 "한번 보고, 돌려 볼 수 있다!" 라는 막강한 파워로 사람들을 현혹했기에 금액이 비싼건 느끼면서도 불만을 갖지는 않았었다. 이런 식으로 점차 발전되어 가던 비디오 시장에는 90년대 중반 한가지 강력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바로 <비디오 테이프 대여료 낮추기> 바람이였다.

 

공급이 과잉되면 경쟁이 되는 당연한 시장논리로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들은 앞다투어 가격을 낮추기 시작했고, 천원, 천오백원을 받다 급기야는 몇백원을 받고 빌려주는 대여점까지 생겨났다. 과연 그정도의 금액을 받고 운영이 될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흐뭇하게만 느껴졌던 이 바람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2002년 현재의 비디오 테이프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면서

 

들르게 되는 동네의 조그만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 이미 모든 테이프가 대여가 되버린 보고싶은 최신작 케이스들을 아쉬운 눈으로 한번씩 쳐다 본 후 나온지 제법 되지만 아직 못 본 영화를 골라내어 대여점을 나서거나 혹은 특별한 약속없이 한가한 주말을 즐기다가 문득 나른해져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집에서 입던 트레이닝복과 반팔 티셔츠 차림 그대로 나와 운좋게 보고싶은 최신작을 빌린 후 돌아간다.

 

수퍼엘 들러 이것저것 먹거리들을 한 봉다리 사서 텅빈 방안에 누워 조그맣게 아그작 소리를 내며 영화를 본다. 비록 가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돌려봐서 테이프 질이 안좋아 한참을 넘어가야 하는 경우나 아무리 장면을 넘어간다 해도 도저히 수습이 안되어 대여점을 찾게하는 다소 번거로운 일이 있어왔기는 하지만 비디오는 일반인들의 여가시간을 즐겁게 보내는데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동네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엘 가보면은 대개 새로운 코너가 생겨있다. DVD라고 일컬어지는 digital versatile disc 가 그것이다. 충분히 재밌게 보아오며 살아왔던 비디오와는 화질에서부터 차원이 다르고, 심지어 음질도 CD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하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계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어쩌다 대형 서점엘 지나가다 화면을 보면 화면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피부에 난 주근깨조차도 셀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나오는 이 기기는 앞으로 모든 영상문화에 대변화를 예고한다고 한다. 마치 10여년 전에 비디오가 우리를 이끌었던 것처럼 다시금 큰 물결을 일으킨다고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 물결을 기다리고 있다

 

혹 그 물결을 기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빠른 적응력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고 금방 그것에 익숙해질 것이다. 너무나도 선명한 화면과 웅장한 소리등에 적잖이 만족해하면서 우리를 10년 넘게 즐겁게 해준 비디오를 서서히 잊어갈 것이다. 새로운 물결이 친다는 게 상당히 기다려지면서도 현재의 이것이 떠나가지 않기를 바라는건 무슨 마음일까?

 

어린 시절, 코 묻은 동전을 세어가며 일주일 넘게 꾹꾹 참아와서 테이프 한개를 빌린 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을 겪은 것처럼 좋아하면서 집으로 달려갔던 어린 시절과 여자친구도 없이 주말마다 집에서 뒹구는 할 일 없는 나를 묵묵히 구제해 준 지난 시절이 함께 떠나가는 것 같은 건 무슨 마음일까?

 

책을 보며 자라거나, 책 조차 볼 시간이 없었던 분들은 "그깟 기계덩어리가 무슨 의미냐?"라고 물으실 지도 모르지만, 가슴속에 뜻모르게 뚫리는 하얀 공백은 무얼까? 아마 나와 비슷한 시기를 보낸 이들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 큰 공백은 아니다. 그리 넓지도 않은 공백이고, DVD라는 새로운 기기로 충분히 혹은 더 훌륭하게 메꿀수도 있는 공백이다. 이제는 새로운 기기와 함께 주말을 보낼 것이다. 끝나고 퇴근 후에도 즐겁게 보내겠지만, 가끔은 생각이 날 것이다. 어린 시절과 지난 시절을 함께 해준 비디오라는 녀석이...


태그:#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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