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물계서원 강당
 물계서원 강당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물계서원은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80번지에 있다. 서원 앞 안내판에 따르면 물계(勿溪)서원은 1724년(영조 1) 창건하여 성송국(成松國) ‧ 성여완(成汝完) ‧ 성준득(成準得) ‧ 성사제(成思齊) ‧ 성희(成熺) ‧ 성승(成勝) ‧ 성삼문(成三問) ‧ 성담수(成聃壽) ‧ 성수침(成守琛) ‧ 성수종(成守琮) ‧ 성운(成運) ‧ 성제원(成悌元) ‧ 성윤해(成允諧) ‧ 성혼(成渾) ‧ 성수경‧ 성람(成灠) ‧ 성문준(成文濬) ‧ 성여신(成汝信) ‧ 성안의 등 '현조(顯祖, 뛰어난 조상) 열아홉 분'을 모시고 있다.

물계서원은 '춘추(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강학(가르침)으로 사림(선비) 정신을 승양(높임)하고 학문을 장려하여 향토 교육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1866년(고종 3) 창건 142년만에 조령(조정의 명령)에 의하여 훼철(부서지고 뜯김)되었다.' 물계서원은 그로부터 129년 뒤인 1995년에 복원되었다. (작은 따옴표 안의 내용은 현지 안내판의 표현)

창녕 성씨 문중의 19 현인을 모시고 있는 물계서원

안내판의 문장이 밝히고 있듯이 물계서원은 창녕 성씨 문중의 뛰어난 분들을 제사 지내고 받들기 위해 건립되었다. 물계서원에 모셔진 분들 중 사육신인 성삼문, 생육신인 성담수, 율곡 이이와 더불어 서인을 대표하는 학자인 성혼 등은 특히 대중적으로 이름이 높다. 그런가 하면, 성사제는 고려 충신으로 "고려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씨의 신하가 될 수는 없다."면서 산으로 들어가 세상에 나오지 않은 두문동 72현 중 한 분이다. 두문불출이란 말은 이 두문동 72현의 옛일에서 생겨난 고사성어이다.

성여신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순절한 성여충(成汝忠)과 성여효(成汝孝)의 동생으로, 진주성 내 '김시민 장군 전공비'의 비문을 썼다. 성수경과 성안의는 임진왜란 당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선비들이다. 성수경(成守慶, ?∼1593)은 진주판관(종5품, 부시장에 해당)으로서 1593년 6월 29일 2차 진주성 싸움 때 순절했다. 성안의(成安義, 1561∼1629)는 화왕산성 전투에 참가하는 등 임진왜란 7년에 걸쳐 많은 활약을 펼쳤던 의병장이다.

이 글에서는 성수경의 임진왜란 당시 활약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성안의의 활약은 화왕산성 전투를 통해 따로 알아볼까 한다. 성수경과 성안의가 각각 진주성과 화왕산성이라는 별도의 전투 장소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한 묶음의 글로 다루기에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물계서원 누각 겸 외삼문
 물계서원 누각 겸 외삼문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성수경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을 대신해 경상우도(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을 모으고 관군을 격려하던 초유사 김성일의 추천으로 수사 군관(水使軍官)으로 활약하게 된다.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성수경은 스스로 초유사를 찾아가 의병이 되기를 자원했다.

성수경의 의기에 마음이 기꺼웠던 김성일은 그를 수사군관에 임명한 후 성벽 수리와 무기 정비 등 전투 준비에 힘을 쏟게 했다. 성수경이 맡은 일 처리에 능력을 발휘하고 성심을 보이자 김성일은 7월 들어 그를 행재소(임금의 임시 거처)로 보냈다. 진주에서 의주까지 가는 길은 온통 왜적 천지였으므로 계본(임금에게 보내는 중요 보고서)을 품고 행재소까지 오가는 임무는 목숨을 내놓은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성일로부터 성수경의 인물됨에 대한 사전 보고를 들은 바 있던 선조는 중요하고도 위험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의주까지 온 성수경을 진주 판관으로 임명했다. 1592년 9월 1일의 일이다.

목숨을 걸고 진주에서 의주까지 왕복한 성수경

성수경은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벌어진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지휘부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평가받는 1차 진주성 전투의 총지휘관인 진주 목사는 그 직전까지 진주 판관을 맡고 있던 김시민이었다. 이 대승에서 성수경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김성일이 선조에게 보낸 치계(보고)가 증언하고 있다. 『선조실록』 1592년 12월 5일자 기사이다.

"지난 10월 5일에 왜적 1만여 명이 세 부대로 나누어 곧장 진주를 침범하였습니다. 경상 우병사 유숭인, 사천 현감 정득열, 배량권관 주대청이 전사하였습니다. 진주 목사 김시민, 판관 성수경이 곤양 군수 이광악과 함께 성을 분담하여 지키기로 계획을 세운 뒤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각 문을 맡아서 사수하였습니다."

이 대승리에 대해 비변사(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최고 기관)가 '판관 성수경은 가장 위급한 동문을 맡아(守東門最急之地) 죽기를 기약하고 지켜내었으니(效死捍禦) 특별히 상을 주어야 합니다(超敍).' 하고 건의하자 선조는 동의한다(上從之).  

김성일은 1593년 1월 22일에 다시 장계를 조정에 보낸다.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이 보고에도 성수경의 전공은 뚜렷하다. 

"목사 김시민은 본래 군사와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었으므로 성을 수호하고 적을 물리친 것이 모두 그의 공로입니다. 곤양군수 이광악은 고을의 날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김시민과 함께 성을 지켰는데 (중략) 김시민이 탄환에 맞은 뒤에는 혼자 성의 한 모퉁이를 담당하여 왜적을 쏘아 죽이고 마침내 적을 물리쳐 성을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판관 성수경은 적이 성에 오를 도구를 많이 준비하여 처음부터 동문을 줄곧 공격했지만 밤낮 5일 동안 굳게 지키면서 용맹을 떨치면서 혈전하여 무수히 왜적을 살해하여 마침내  물리치고 성을 완전하게 하였습니다. (하략)"

김성일의 보고서는 성수경이 판관으로서 직책에 어울리는 활약을 펼쳤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현장 진주성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현장 진주성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이듬해인 1593년 7월 류성룡이 명나라 제독 이여송에게 보낸「진주가 함락된 후(晉州陷後) 적의 정세를 적어 이 제독에게 올리는 글(陳賊勢呈李提督文)」은 진주성을 지키던 장졸들의 장렬한 죽음을 증언한다. 류성룡은 이 글에서 '비직(자신의 직책을 낮춰서 표현한 말)이 지난 달(5월) 21일 서울을 떠나 왜적의 위세가 긴급하다는 경상좌도로 달려가 안동에 이르렀다가, 다시 진주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워 달려 고령에 이르렀을 때 이미 진주가 함락되어 성에 있던 장졸들이 도륙되어 모두 죽었다(屠戮殆盡)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라면서 '포위된 채 밤낮으로 혈전하기를 8일째(晝夜血戰八日), 밖에서 원군이 오지 않아(外援不至) 결국 지킬 수는 없었으나(竟不能守)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여(人皆冒刃抗戰) 한 사람도 적에게 귀순하거나 구차하게 살려는 자는 없었습니다(一無順賊偸生者).'라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뜻이다.

류성룡에 따르면 성수경은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밀양에 있었다(判官成守慶在密陽). 성수경은 10만이나 되는 왜적이 진주성 가까이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聞賊兵已近) 낭패에 젖은 심정으로 성 안으로 들어갔다(始狼狽入城).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성수경은 본인의 직책인 진주판관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진주성 안으로 복귀했던 것이다.

참패가 예정되어 있었던 2차 진주성 전투

2차 진주성 패전은 이미 정해진 바였다. 발단은 1593년 3월 3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왜군의 주요 지휘관 17명이 한양에 모여 이른바 '17장군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남해안 일대의 군량미 보급이 쉬운 곳에 성을 쌓고 군대를 재편성한 다음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회의 결과를 보고받은 풍신수길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4월 20일, 왜군은 도성에서 철수하면서 아주 편안하게 한강을 건너갔다. 조선군들이 추격하려 했지만 명군 제독 이여송이 가로막았다. 명군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조선군이었다.

명군이 압록강을 넘어온 이래 조선 군부에는 작전권이 없었다. 명군은 왜군이 철군을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나서야 추격을 명했다. 왜군 중 선두가 이미 부산에 도착했고, 나머지 전군도 경상도 땅으로 들어선 이후였다.

명군이 조선군의 추격을 막아주는 동안 왜군은 하루에 30리씩, 40리씩 남하했다. 그들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유유히 부산으로 갔다. 쉴 때에는 포로로 끌고 온 조선인들에게 춤을 추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해놓고 야유회를 즐겼다.

왜성의 분포
 왜성의 분포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왜적이 남해안 일대에 모두 몰려 있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왜군은 부산진성, 서생포성, 기장성, 동래성, 김해성, 안골포성, 가덕도성, 웅천성, 거제도성, 임량포성 등에 분산하여 포진했다.

전쟁의 회오리바람은 진주성을 향해 태풍처럼 몰아쳤다. 진주성이 전란의 중심 격전지가 된 것은 풍신수길의 생각 때문이었다. 풍신수길은 1592년 10월 김시민에게 당한 진주성 패전을 임진년(1592) 전쟁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여겼다. 풍신수길은 진주성 함락에 실패하는 바람에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풍신수길은 진주성을 반드시 함락한 후 기필코 전라도를 점령하여 추락한 위신을 바로 세우려 했다. 풍신수길은 왜군의 전면 철수를 허가하면서도 '남해안으로 내려와 진주성을 함락하고 전라도를 접수하라.'는 단서를 달 만큼 진주 함락에 집착을 보였다.

풍신수길, "진주성을 점령하라!" 다섯 차례나 명령

풍신수길은 철수 중인 왜군에게 계속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무려 다섯 차례나 '진주성을 공격하고 전라도로 진격하라.' 하고 반복하여 지시했다. 그만큼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전한 데 대해 풍신수길은 지독한 한을 품고 있었다.

풍신수길은 진주성 점령 후 '성 안의 조선 사람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라.' 하고 요구했다. 참혹한 참살로 자신의 한을 풀겠다는 심산이었다. 특히 풍신수길은 '진주성을 점령하라'는 자신의 지시를 천하에 공개적으로 알렸다. '모든 일본 군대는 진주성으로 가라!' 하고 내놓고 떠들었다. 조명 연합군에게 '어디 한번 방어를 해 보아라. 너희들이 대적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라고 통보한 셈이었다. 진주성에는 10만이나 되는 왜군이 집결했다.

물계서원 사당
 물계서원 사당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왜적의 진주 총공격이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명군은 남원 병사들을 구례로 전진 배치했을 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조선 육군도 마찬가지였다. 5월 24일부터 조선군 총지휘관이 된 도원수 권율도 '도원수는 요해처를 지켜 호남을 보전할 생각만 할 뿐(保全湖南而已) 군사를 보내어 진주를 구원할 의사가 없는 듯하나(無撥送軍兵急救晋州之意) 진주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호남을 보전하는 길(救晋州乃所以救湖南也)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선조실록』 1593년 7월 13일자). 일본군 전군과 상대해야 하는 싸움인 만큼 명군과 조선군이 조금 더 참전해봐야 그만큼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라는 것이 당시 상식적인 판단이었던 것이다.

권율도 곽재우도 2차 진주성 싸움 참패 예상

이때 상황에 대해 곽재우의 『망우 선생 문집』(현풍 곽씨 문중 발행, 1996년)에 흥미로운 기록이 전해진다. 문집 중 「용사잡록龍蛇雜錄」의 해당 부분을 읽어본다.

'(1593년) 6월 (중략) 관백(일본 천황 아래 최고 권력자) 평수길(풍신수길)은 진주성 지도를 보면서 연전(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싸움)에 거듭 패한 것을 분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등을 질책하되 "진주성을 격파하지 못하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다."라고 했다. (중략)

경남 문화재자료 366호인 물계서원 원정비
 경남 문화재자료 366호인 물계서원 원정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적군의 병사들이 들을 뒤덮고 강을 건너오자 모든 장수들이 각자 흩어져 도망을 갔다. 권율과 김명원, 이빈 등은 다 전라도로 향했다. 오직 창의사 김천일, 전라 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전라 의병이며 복수장(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편성된 군대의 대장)인 고종후(고경명 의병장의 아들) 등은 진주에 들어왔다. 적군이 겹겹이 성을 포위하여 이어진 거리가 100여 리나 되었다.

그때 중국의 원병인 총병(총사령관) 유정은 팔거(대구 북구 칠곡)에 주둔해 있었고, 유격 오유충은 봉계(전남 여수)에 와 있었으나 바라보기만 하고 감히 구원하지 않았다. 진주가 함락되자 군인과 민간인의 죽은 자가 6만여 인이나 되었다. 탈출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왜란이 있은 뒤 사람죽음이 이와 같이 많은 적은 없었다. 공(곽재우)은 이전에는 두 번이나 진주성의 위급함을 구원해 주었으나 이번에는 가지 않았다. 그 세력을 살피고 적을 헤아림이 이와 같았다.'

'공(곽재우)'이라는 3인칭은「용사잡록」의 필자가 곽재우 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공이 적과 아군을 견주어) 그 세력을 살피고 적을 헤아림이 이와 같았다.'라는 마지막 문장은「용사잡록」을 쓴 홍의장군 후손의 평가이다. 일본이 10만 이상의 전군을 동원하여 공격해오는 이상 맞서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홍의장군이 판단했다는 뜻이다. 『선조수정실록』 1593년 6월 1일자 기사에는 곽재우가 경상좌도 감사 한효순의 진주성 구원 출전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서 "내가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此身死不足惜) 백전백승의 군사들을(百戰軍卒) 어찌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겠소(何忍棄之)?"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위「용사잡록」인용 부분의 끝 두 문장은 이덕무의 『청장관 전서』에 실려 있는「홍의장군전」의 표현을 인용한 것이다. 이덕무는 '재우는 두 번이나 진주를 구원했으나(再祐再救晉州) 이 때에 이르러서는 가지 않았으니(至是不往) 적을 헤아림이 이와 같았다(其料敵如此).'라고 기술했다. 이장희는 『곽재우 연구』에서 이덕무의 기술을 '성패(성공과 실패)를 미리 점칠 수 있었던 뛰어난 명장임을 밝'힌 것으로 해석했다.

물계서원 내삼문
 물계서원 내삼문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그렇다고 해서, 진주성 2차 싸움에 결연히 참전하여 왜적 10만 대군과 맞서다가 장렬하제 죽음을 맞이한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성수경 등이 전혀 승산도 없는 전투를 어리석게 치렀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전투에 참전하지 아니한 권율, 곽재우, 명나라 군대 등만이 참전을 하지 않음으로써 지혜롭게 병사들을 잘 보전했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성수경의 생애에 대해 결론을 내리려는 것뿐이다.

성수경은 진주판관으로서 1차 진주성 대첩을 이뤄내는 데에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2차 진주성 전투 때는 밀양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자신의 근무지를 일본군 1만이 짓밟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결코 머뭇거리지 않고 성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스스로 나라를 위해 의병이 되었고, 진주 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고, 진주판관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죽을 줄 알면서도 진주성 2차 전투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였다가 마침내 전사하였다. 그의 의로운 삶과 죽음은 우리 역사가 꼭 기억해야 할 선비다운 생애였다!

성수경은 진주 창열사와 이곳 물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창열사는 2차 진주성 싸움 때 순절한 의사들을 모시기 위해 정사호(鄭賜湖)가 진주성 안에 건립한 사당이다. 오늘은 물계서원을 둘러보고 언젠가 진주성을 찾았을 때 창열사도 참배를 해야겠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66호인 '물계서원 소장 책판'을 보관하고 있는 영보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66호인 '물계서원 소장 책판'을 보관하고 있는 영보각.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태그:#성수경, #진주성, #물계서원, #성안의, #김성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