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9월 15일에 한 노사정 합의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진통을 겪고 있다. 이 합의는 더 쉽고 값싸게 해고할 수 있는 자유를 기업 측에 인정했다. 노동자들에게 일방적 불이익을 요구하는 이런 합의에 맞서 11월 14일에는 대규모 민중 총궐기 대회가 벌어졌다.

노사정 합의에서 해고의 자유를 확대한 명분은 우리 경제의 정체성을 타개하는 데 있다. 해고로 인한 기업의 경제적·법적 부담을 줄여주는 방법으로 경제의 효율성을 제고하겠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이라는 제목 하에 '사회적 대타협'이란 부제를 단 9·15 합의문은 "현재 한국 사회는 새로운 재도약과 기약 없는 정체 사이의 분수령에 서 있다"란 첫 문장으로 시작한 뒤 "우리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은 매우 엄중하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 합의문은 한국경제 정체의 원인을 노동시장에서 찾고 있다. "노동시장 기능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의문은 말한다. 경제 부진의 원인을 국가나 기업에서 찾지 않고 노동시장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활로를 모색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제가 '새로운 재도약과 기약 없는 정체 사이의 분수령에 서 있을 때'마다 노동자 서민대중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일은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지금의 기업뿐만 아니라 농업경제 시대의 지주들도 그렇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 역사에서는 17·18세기 사례에서 유사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 

1598년에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7세기부터 조선에서는 경제적 변화가 많았다. 도시가 성장하고 농업 이외의 산업이 성장하고 화폐경제가 발달하는 등의 새로운 양상이 출현했다.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혼란해진 것도 새로운 경제 상황의 출현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동전인 상평통보가 본격 유통된 것은 이 나라가 이전과는 다른 경제 체질을 갖게 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반층의 권위가 흔들리고 노비나 하층 양인(자유인)을 비롯한 서민대중의 경제성장이 가속화되었다. 서민층이 7년 전쟁 중에 의병 활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들의 발언권은 한층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농업노동자 관리비용 늘자 머슴 고용

조선시대 노비.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조선시대 노비.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당시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노비 신분을 갖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주인의 농토에서 소작농 생활을 했다. 노비가 되지 않으면 농토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소작농이 되려면 지주의 노비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7세기 들어 서민층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이들이 처우개선을 목표로 지주에게 도전하는 양상이 빈발했다.

이들은 처우개선을 목표로 농업 현장에서 파업도 하고 태업도 했다. 지주가 노동자의 이익을 무시할 때는 가을에 거둔 수확물의 납부를 거부하기도 했다. 지주가 악질적인 경우에는 살주계를 조직해 지주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자 지주 입장에서 노동자 관리비용이 증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지주의 수입이 감소한 것은 물론이고 그런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자기 땅을 경작하는 농업 노동자들이 수확물 납부를 거부하면, 건장한 사람들을 보내 그들을 제압해야 했다. 어떤 때는 관청에 신고해서 국가권력의 힘도 빌려야 했다. 이런 과정에는 자연히 돈이 들 수밖에 없었다.

농업기업인 즉 지주들은 이런 현실이 경제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라고 판단했다. 경제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지주의 이익은 물론이고 경제발전을 저해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9·15 합의문의 첫 문장에 있는 것처럼 17·18세기 농업기업인들도 자신들이 "새로운 재도약과 기약 없는 정체 사이의 분수령에" 서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기술혁신이나 시장 개척이 아니었다. 17·18세기 서유럽의 부르주아들은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기술혁신에 적지 않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또 당시의 일본 기업인들은 동남아는 물론이고 중동과 유럽으로까지 시장을 넓히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 기업인들의 대처법은 상대적으로 안이한 편이었다. 그들이 내놓은 해법은 '앞으로는 가급적 노비를 고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머슴이라는 단기 노동자를 채용함으로써 고용시장 활성화를 도모하고 이를 통해 경제 난국을 돌파한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일본과 서양의 공세 앞에 쉽게 허물어진 조선 경제

신윤복의 <타작>에 나타난 농업 노동자들. 18세기 풍경을 담은 이 그림에 나오는 노동자들 중에는 노비인 사람도 있고 머슴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서울 시내의 어느 공공시설에서 찍었다.
 신윤복의 <타작>에 나타난 농업 노동자들. 18세기 풍경을 담은 이 그림에 나오는 노동자들 중에는 노비인 사람도 있고 머슴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서울 시내의 어느 공공시설에서 찍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머슴은 한자로는 고공(雇工)이라고 표기됐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노비처럼 주인에게 예속되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은 1년이나 2년 같은 기한을 설정하고 채용됐다. 이런 머슴들은 고대부터 존재했지만, 17·18세기 이전에는 노비의 숫자에 밀려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조선 기업인들은 '노비들은 특정 주인에게 대대로 고용되다 보니 주인에게 원한을 품고 살주·태업·파업·납부거부 등을 하기가 쉽다'고 판단했다. 이런 노비 대신에 머슴을 고용하면 주인에 대한 원한도 적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노동자 관리비용도 절감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슴은 주인과의 연고가 약하기 때문에 갑자기 해고를 당한다 해도 노비처럼 격렬하게 저항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사용자 입장에서는 머슴이 훨씬 덜 부담스러웠다.

이에 따라, 17·18세기에는 노비보다 머슴이 더 많이 고용되기 시작했다. 주인들이 노비를 기피하다 보니, 노비들도 낯선 땅으로 도망가서 머슴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로 인해 머슴의 비중이 현저히 증대됐다는 점은, 1801년부터 공노비 해방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894년에는 공노비·사노비를 포함한 노비제도가 완전히 해체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노비제도를 축소하거나 해체한 것은 노비의 인권이 신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아니다. 고용 현장에서 노비의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종전처럼 노비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서 축소하거나 해체했던 것이다. 이것은 머슴이 노비의 자리를 대체했음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노비가 머슴으로 전환되는 사례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노비보다 머슴이 많아진 것은 인권이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할 수도 있다. 노비는 예속민이고 머슴은 자유인이니, 머슴이 많아진 것은 자유인이 증가했다는 징표가 된다. 하지만, 노비는 평생 고용을 보장받은 데 반해 머슴은 그렇지 않았다.

주인 입장에서 보면 자기 집에서 대대로 일한 노비를 자기 농토에서 내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법적으로는 쉽다 해도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머슴은 그런 부담 없이 해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머슴이 노비보다 많아졌다는 것은 서민층의 고용이 한층 더 불안정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17·18세기 조선 지주들은 오늘날로 치면 고용 활성화 같은 명분을 내세워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이것을 토대로 당시의 경제적 난관을 타개하려 했다. 그런 목적에서 그들은 노비 대신 머슴을 채용했다. 이를 통해 노동자를 좀더 쉽게 채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이런 경향이 확산되었으니, 당시의 사회가 서민대중에게 '노비 대신 머슴이 되라'고 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농업 기업인들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옳지 않았다는 점은, 다음 세기인 19세기에 조선 경제가 일본과 서양의 공세 앞에서 쉽게 허물어진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기술혁신이나 시장개척이 아닌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이라는 토대 위에서 경제적 활로를 모색하다 보니, 조선 경제는 질적으로 허약한 경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19세기의 세계적 경제전쟁에서 조선이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2015년의 대한민국 기업인들도 이런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은 서글프고 슬픈 일이다.

○ 편집ㅣ이준호 기자



태그:#노사정 합의, #머슴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