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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몰자 추념비 위 승리의 여신
 전몰자 추념비 위 승리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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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에 가서 유럽연합의 법원을 볼 수 있을까? 한 마디로 택도 없는 소리였다. 주어진 시간에 구도심만 제대로 보아도 다행이었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40분께다. 이때부터 두 시간 안에 룩셈부르크를 보는 것으로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볼 것은 무엇인가? 아돌프 다리, 헌법광장, 노트르담 성당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헌법광장에서 버스를 내린다. 이곳이 바로 룩셈부르크의 중심(Centre) 관광의 출발점이다. 이곳에는 전몰자 추념비가 있고,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페트루스(Pétrusse) 포대가 있다. 전몰자 추념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죽은 군인들을 추모해서 1923년 세워졌다. 21m 높이의 화강석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그 위에 승리의 여신 또는 자유의 여신상을 배치했다.

전몰자 추념비문: 아래 1951-1954  COREE라는 문구가 보인다.
 전몰자 추념비문: 아래 1951-1954 COREE라는 문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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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상징인 황금의 여신이 룩셈부르크에 월계관을 씌워주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조각가 클라우스 시토(Claus Cito)에 의해 만들어져 1923년 추모비 위에 놓여지게 되었다. 오벨리스크 아래 제단 부분에도 두 점의 청동조각이 있는데 그것도 시토의 작품이다. 하나는 조국을 위해 죽은 전사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는 전사의 모습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룩셈부르크 병사는 2000명 쯤 죽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 기념물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전후 일부가 복구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 승리의 여신상이 다시 발견되어, 1984년 원래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이 기념비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전몰자들까지 기리게 되었고, 이제 룩셈부르크 국민의 자유와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구조물이 되었다. 제단에서 나는 1951-1954 CORÉE라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페트루스 강변 계곡의 공원
 페트루스 강변 계곡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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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루스 포대는 페트루스강변 절벽에 만들어진 일종의 방어용 포진지다. 1728년 동굴형 진지가 처음 만들어졌고, 1746년 이곳에 포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포진지를 보기 위해서는 광장 옆으로 난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절벽의 높이가 100m는 되어 보인다. 절벽 아래는 페트루스 계곡이자 공원으로 과거 룩셈부르크성의 천연 해자 구실을 했다. 룩셈부르크는 페트루스강과 알제트(Alzette)강이 굽이도는 안쪽으로 형성된 성곽도시이다.  

성당 내부가 조금은 현대적으로 수리 복원되었다

노트르담 성당
 노트르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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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트루스강에 놓인 아돌프(Adolphe) 다리를 바라본다. 그런데 수리를 위해 차단막을 설치해 놓았다. 우리는 이제 방향을 돌려 노트르담 성당 쪽으로 길을 나선다. 그것은 성당과 시청, 기욤2세 광장과 궁전 등 볼거리가 성당 쪽 구시가지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노트르담 성당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거리 건너편에 있다.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동쪽으로 가면, 후기 고딕식에 르네상스 양식이 결합된 성당이 나타난다. 성당으로 들어가기 전 왼쪽으로 국립도서관이 보인다.

성당 정문에는 성모자상이 있고, 좌우에 두 개의 철문이 있다. 이 철문 한쪽에는 예수의 일생이, 다른 한쪽에는 성경의 장면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합창대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성당이 처음 지어진 1613년에서 1621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성당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8세기다. 그 후 1870년 피우스 9세에 의해 대성당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노트르담 성당 내부
 노트르담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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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당은 1938년까지 확장과 수리를 계속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룩셈부르크 성당은 유럽의 다른 대도시 성당보다 역사가 짧고 또 규모도 크지 않다. 그래선지 스테인드글라스도 상당히 현대적이다. 스테인드글라스는 합창대석과 파이프오르간 주변의 것이 눈에 띈다. 내부 구조도 아주 단순해서 관람하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 성당을 찾는 사람도 많지 않아 편안하게 내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기욤2세 광장에서 만난 룩셈부르크의 역사

룩셈부르크 시청
 룩셈부르크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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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보고 우리는 후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청 쪽으로 발을 옮긴다. 시청은 기욤(Guillaume)2세 광장 남쪽에 위치한다. 시청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미셸 로당쥐(Michel Rodange: 1827-1876) 기념물을 만난다. 미셸 로당쥐는 룩셈부르크에서 유명한 작가로 <레네르트(Renert)>라는 작품을 썼다. 이 작품은 괴테의 <라이네케 푹스(Reineke Fuchs)>의 내용을 각색해 룩셈부르크 사람들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푹스는 여우다. 그래선지 기념물 꼭대기에 여우가 한 마리 앉아 있다.

그 옆에 시청이 있는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1838년에 지어졌다. 건축부재의 대부분이 1829년 해체된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건물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1932년에는 두 마리 청동사자상이 만들어져 문 양쪽에 세워졌다. 기욤2세 광장은 기욤2세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기욤2세는 네덜란드의 왕이자 룩셈부르크 대공으로 1840년부터 1849년까지 룩셈부르크를 통치했다고 한다. 기욤은 네덜란드식으로 하면 빌렘(Willem)이 된다.

기욤2세 광장
 기욤2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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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기욤2세 광장에는 13세기 중반 이래 교회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있었다고 한다. 1797년 수도원과 교회가 프랑스군에 점령되었고, 그들에 의해 건물 부재들이 해체되어 판매되었다. 1800년대 들어 결국 건물은 사라지고, 커다란 광장이 되었다고 한다. 1838년 이곳에 시청이 들어서고, 그 후 기욤2세 동상이 세워졌다. 기욤2세 광장은 현재 집회 및 행사장, 축제장, 시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욤2세 광장 한 켠에는 관광안내 센터가 있다. 나는 그곳에 가 룩셈부르크 관련자료를 한 꾸러미 얻는다. 룩셈부르크 시내지도는 물론이고, <룩셈부르크 체험하기>, <룩셈부르크 발견하기>, <룩셈부르크 방문하기> 등 책자도 얻었다. 또 한여름의 행사를 알려주는 <룩셈부르크 여름행사 프로그램> 책자도 받았다. 행사는 6월21일부터 9월 9일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무담 룩셈부르크-그랑 뒤 장 현대미술관' 자료를 얻었는데, 일부가 우리말로 되어 있었다.

무담 현대미술관 안내 자료
 무담 현대미술관 안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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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담(Mudam)은 룩셈부르크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미술관으로, 현대미술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담의 컬렉션과 프로그램은 룩셈부르크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현재진행중인 동시대 미술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인 이오밍 페이(Ieoh Ming Pei)가 설계한 미술관 건축은 자연과 역사간의 경이로운 조화를 보여준다. 튕엔(Thüngen) 요새의 유적과 맞닿아 있는 이 건물은 과거의 성곽배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세워졌다."

룩셈부르크의 과거와 현재를 알려면...

룩셈부르크 시내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구도심이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지역은 알제트강을 끼고 있는 그룬트(Grund) 지역이다. 그곳에는 복(Bock) 절벽, 복 요새와 포대, 성채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룩셈부르크 고고학자들이 1963년 이곳을 발굴했고, 발굴과 연구를 통해 963년 지게프로이(Sigefroi) 백작이 막시민(Maximin) 수도원으로부터 이 지역을 넘겨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룩셈부르크의 역사는 9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98년의 룩셈부르크 모습
 1598년의 룩셈부르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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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 건너에는 15세기 성벽인 람(Rham)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또 베네딕트회 수도원인 네이멘스터(Neimënster)가 이 지역에 있다. 1542년경 수도승들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수도원이 생겨났고, 1606년경 수도원 건축이 이루어졌다. 그 후 약 200년 가까이 수도원으로서의 역할을 했고, 1796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수도원이 세속화되면서 1945년까지 군대 막사 또는 병원,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80년 이곳은 문화센터가 되었고, 공연과 전시회, 회의 등을 상시 열고 있다.

룩셈부르크 과거사에서 또 하나 중요한 지역이 키르히베르크(Kirchberg)다. 이곳에 튕엔 요새가 있기 때문이다. 이 요새는 1732년 오스트리아 장군 지그문트 폰 튕엔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튕엔 요새 옆에 성채박물관과 무담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유럽 컨벤션 센터와 교향악단인 필하모니가 들어섰다. 이를 통해 키르히베르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그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군대광장과 시장을 떠나며

사회문화센터
 사회문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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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내와 나는 기욤2세 광장을 지나 군대광장(Place d'Armes)으로 올라간다. 광장 동쪽에는 사회문화센터(Cercle Cité)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는 시의 각종 문화예술 행사 또는 회의가 열린다. 그리고 지하에는 레스토랑과 술집이 있어 행사를 지원하고기도 한다. 이곳 군대광장은 서민적인 곳이어서 그런지, 광장 주변으로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광장 쪽으로 탁자와 의자를 설치해 노천카페 역할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곳 주민과 관광객들이 한여름의 늦은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을 다른데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갈 수도 없다. 이제 우리는 침마이(Chimay) 거리를 따라 헌법광장으로 내려간다. 길가로 기념품점이 많이 보인다. 가구, 도자기 등 값나가는 것도 있다. 헌법광장까지는 300m도 안 되는 짧은 거리다. 광장으로 돌아오니 우리팀 사람들이 다 모였다.

군대광장 주변 풍경
 군대광장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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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버스를 타고 저녁을 먹으러 간다. 그런데 이번에도 기사가 식당을 찾지 못한다. 룩셈부르크 중앙역에서 U턴을 하고 내비를 찾고 수선을 떤다. 지도를 보고 도로를 찾고 번지수를 확인하면 그렇게 헤매지는 않을 텐데... 기사고 가이드고 부족한 점이 참 많다. 그로 인해 이번 룩셈부르크 여행에서도 30-40분 정도 손해를 보고 말았다. 이제 다음 행선지는 암스테르담이다. 결국 우리는 운전사를 크로아티아 출신의 자코 요바노비치(Zarco Jovanovici)로 바꿔 암스테르담으로 가게 되었다. 


태그:#룩셈부르크, #헌법광장, #노트르담 성당, #기욤2세 광장, #군대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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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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