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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 선창가에서 본 삼각산의 모습
 손죽도 선창가에서 본 삼각산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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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주말을 맞아 이른 아침 배를 탔습니다. 거문도와 여수의 중간에 위치한 손죽도 여행에 나섰습니다. 

여수여객선터미날에서 배를 타는데 부두에 동동 묶인 한척의 배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한때 거문도 바다를 주름잡던 청해진 해운이라 쓰인 데모크라시호입니다. 매표원 선원에게 물었습니다.

"저 배 운행합니까?"
"공중 분해된 회사라 운행 안 한 지 오래됐어요."

21세기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기록될 세월호 참사 여파가 남아 있습니다. 부두에 동동묶인 청해진 해운의 데모크라시호. 문득 해와 달이 된 아이들이 "대한민국은 안전한가요?"라고 묻는 것 같아 가슴을 찌릅니다. 세월호가 꼭 인양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배에 올랐습니다.

큰 인물 잠든 섬, 손죽도

손죽도 마을에는 2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5명의 장정이 둘러싸야 손을 맞잡을 수 있다.
 손죽도 마을에는 2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5명의 장정이 둘러싸야 손을 맞잡을 수 있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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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바라본 손죽도 마을의 모습
 정상에서 바라본 손죽도 마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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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 정상에서 바라본 소거문도의 모습
 손죽도 정상에서 바라본 소거문도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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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속선이 바다 위를 달립니다. 출항 후 차 한 잔을 마시니 50분 만에 나로도에 닿았습니다. 우주발사대가 있는 나로도에 사람들이 몇몇 내립니다. 잠시 후 손죽도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흘러 나옵니다. 1시간 20분 만에 손죽도 삼각산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오! 자네 왔는가"

손죽도의 한 대문 앞에 적힌 문구입니다. 전라도 어촌마을에선 '자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이 말은 주로 윗사람들이 손아랫사람에게 반가움의 표현으로 쓰는 말입니다.

예부터 안강망(중선배)사업으로 부촌이었던 손죽도는 집집마다 정원이 갖춰진 모습이 눈길을 붙잡습니다. 해방 전후 350호, 1500여 명이 살던 이곳은 한때 350여 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다닐 정도로 사람이 북적거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2명이 전교생입니다. 안강망(중선배)어선이 55척이나 있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선진어구 도입으로 남도 수산업의 전진기지였던 손죽도는 풍요로움이 넘쳤습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느껴집니다. 집집바다 정원이 있고, 골동품과 동백꽃분재. 특히 '오죽(烏竹)'이 눈에 띕니다. 까마귀 '오'자를 쓰는 검은 대나무인데 난생 처음봅니다. 신기했습니다. 오죽이 자라나는 이 섬에 '호국과 충절'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을 만나다

손죽도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병조참판 이대원 장군의 신위와 영정의 모습. 신위에는 병조판서로 잘못 서각되어 있다.
 손죽도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병조참판 이대원 장군의 신위와 영정의 모습. 신위에는 병조판서로 잘못 서각되어 있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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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면 손죽도 바다를 지키고 있는 이대원 장군 동상의 모습
 삼산면 손죽도 바다를 지키고 있는 이대원 장군 동상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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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건너와
외로운 병사 힘 다해 끝나는 인생 슬프다
나라와 어버이 은혜 갚지 못해
원한이 구름에 엉켜 풀길이 없네

428년 전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절명시입니다. 요즘 인기사극 <징비록>에 손죽도가 자주 등장합니다. 임진왜란 5년 전, 왜구들이 조선침략의 전초전으로 남해안을 드나들면서 납치와 약탈을 자행한 손죽도. 이곳에서 잡은 왜구를 한양으로 압송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손죽도 섬마을에는 충렬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대원 장군의 넋이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역대 가장 젊은 나이 21살 때 녹도만호가 된 그는 1587년 전라남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교지를 받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22세의 나이에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장군은 사후 병조참판으로 특진합니다.

이대원 장군은 손죽도해전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패전에 앙심을 품은 왜구는 대규모 2차해전을 준비합니다. 1차해전에서 대승한 장군은 왜장을 잡아 직속상관인 수군절도사 심암에게 압송하는데, 이 과정에서 장군의 전공을 가로채려는 심암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창피만 당한 심암은 1587년 정해년 2차 침입 때 이대원 장군에게 억지 출전 명령을 내립니다. 명령을 받은 장군은 지원군 없이 출전해 3일간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전사합니다.

이후 효수형에 처해진 심암. 이순신 장군은 이대원 장군을 잃은 것은 '국가의 큰 손실'이라하여 이 섬을 잃을 '손'(損) 큰 '대'(大)자를 써 손대도라 불렀습니다. 이후 손죽도(巽竹島)로 바뀌었습니다.

싸움이 끝난 후 손죽도 주민들은 해안가에 밀려온 장군과 병사들의 시신을 섬에 고이 묻고, 지금까지도 넋을 기리며 제를 지내왔습니다. '손죽도 이대원 장군 보존회'에 따르면, 20여 년 전에는 손죽도 주민들이 이대원 장군의 종친회를 찾아가 '손죽인들은 400여 년 동안 장군의 제를 모시고 있는데 종친회에서 한번도 찾아보지 않는다'고 따졌습니다.

이후 종친회에서는 묘지에 묻힌 이가 이대원 장군인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묘지를 파보니 정말 시신의 흔적이 발견돼 곧바로 장군의 묘를 새롭게 조성했습니다. 올해는 그곳에 공원도 조성됩니다. 지금도 손죽도에는 긴 칼을 찬 늠름한 장군이 남해바다를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5월 '손죽인의 날'을 맞아 이대원 장군의 동상 제막식을 갖는 뜻 깊은 행사도 열립니다. 동상을 기부해 직접 제작에 나선 손죽인 이민식씨의 말입니다.

"손죽도는 호국과 충절의 섬입니다. 거문도를 찾는 관광객이 1년에 17만 명인데 이곳을 잘 모르고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서 손죽도 여객선이 닿는 곳에 4m 높이 26톤 가량의 동상을 해외에서 제작 중입니다. 이대원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 손죽도 정상에 올랐습니다. 멀리 펼쳐진 손죽열도에는 사이 좋은 이웃 섬이 여럿입니다. 유독 아열대 기후로 사시사철 나무가 많은 소거문도, 평도, 광도를 가기 위해서는 손죽도에서 다시 배를 타야합니다.

여행객 녹이는 손죽도 '약막걸리'

걸죽한 맛을 자랑하는 손죽도 약막걸리에는 3가지의 약초가 들어가 술맛이 좋다.
 걸죽한 맛을 자랑하는 손죽도 약막걸리에는 3가지의 약초가 들어가 술맛이 좋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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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최고의 비경을 보려면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둘레길을 따라 정상에 올랐습니다. 올해부터 3년에 걸쳐 둘레길이 조성됩니다. 정상에 오르니 신선이 따로 없습니다.

하산 후 일행은 한 번 더 신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약막걸리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먹어본 막걸리 중 가장 걸쭉한 맛이었습니다. 이곳 주민이 집에서 직접 빚은 것인데 거문도로 많이 팔려 나갑니다. 3가지의 약초를 넣고 빚는 손죽도 막걸리를 한잔 쭈~욱 들이켰습니다. 이후 내리 3잔을 또 마셨습니다. 약초내음과 걸쭉한 맛에 막걸리 마니아도 반할 듯합니다.

어느덧 섬을 떠날 시간입니다. 이곳은 주중에 뱃시간이 다릅니다. 금, 토, 일은 하루 2번, 이외는 하루 1번만 닿습니다. 금, 토, 일에 첫배로 도착해 막배인 3시 배를 타면 약 6시간 동안이면 손죽도 곳곳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뱃시간이 자주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손죽도를 떠난 쾌속선이 초도와 거문도를 경유해 또 다시 여수로 향합니다. 손죽도를 떠나자니 긴 여운이 남습니다. 또 보자, 안녕.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 <전라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손죽도, #이대원 장군, #손죽도 약막걸리, #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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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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