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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낭송회 '비나리'를 여는 백기완 소장 인터뷰 오는 29일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시 낭송회 '비나리'를 여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오마이뉴스>와 만나 시 낭송회를 준비한 이유와 박근혜 정권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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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80)은 연거푸 책상을 내리쳤다. 국정원 댓글 사건을 뒤덮기 위해 조성된 공안정국에 분노한다는 뜻이다.  

"박근혜 정권은 나와서는 안 될 정권이야. 유신 잔당인데, 난 유신체제를 철폐하려고 일생을 바쳤어. 바랄 게 없는 정권이야. 우리가 쟁취한 자유, 민주, 인권, 해방, 통일. 이걸 완전히 죽이고 있잖아."

서울에서 첫눈이 내린 지난 18일 대학로 사무실에서 만난 백 소장은 최근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우상화 작업에 대해서도 호통을 쳤다.

"똑같은 파쇼지만 이명박 정권은 유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어.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유신을 전면에 내걸었어.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 중에 유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많아. 박 대통령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최고의 스승처럼 밀고 나가고 있잖아. 한국적 파쇼야. 쉽게 말하면 파렴치한 파쇼야. 뻔뻔하다 이 말이야!"

백 소장은 "파렴치한 파쇼한테 정권 빼앗겼는데 우리가 뭐가 없는 것 같아?"라고 반문한 뒤 비분강개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둠을 뚫고 나오는 한 서리가 없어. 어둠 속에 침잠해서 어떻게 하든 자리 깔고 누우려고 해. 대학로에 나가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모두 자기 갈 길만 가잖아. 짙은 어둠이 우리를 덮고 있는 것도 모르는 거야. 그걸 깨뜨리는 쇳소리가 없어."

백발이 성성한 그는 2시간 여 동안 온몸으로 절규했다. 결기에 찬 표정으로 사정없이 죽비를 쳤다. 팔십 평생을 길거리에서 싸우면서 세운 가치체계가 요즘 들어 송두리째 허물어지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는 때론 음유시인처럼 시낭송을 하다가, 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종이 위에 새긴 잉크 자국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절망과 희망의 언어는 저항시였다. 그는 투사이자 시인이었다.

백 소장의 입을 빌자면 이런 게 바로 '말림' 형식을 띤 '비나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뒤 그의 입을 통해 설명하도록 하자. 팔십이 넘은 그가 29일 오후 7시30분 서울 조계사 내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시낭송의 밤을 연다. 정식 명칭은 '백기완의 비나리'다. 행사를 앞둔 그와의 '댓거리'(인터뷰) 자리에서 시낭송을 부탁했다. 아래 영상을 누르시면 길거리에서 포효하던 백 소장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노 시인의 심성을 느낄 수 있다. 시 제목은 '아 나에게도'이다.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시 '아, 나에게도' 오는 29일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시 낭송회 '비나리'를 여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자신의 시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시 '아, 나에게도'를 읊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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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과 쌀눈의 차이

백 소장을 만나러 서울 대학로에 있는 통일문제연구소 사무실로 가는 길. 첫눈이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하늘에서 흩뿌리는 첫눈은 안경과 얼굴에 부딪쳐 흘러내렸다. 잠시 뒤 기자와 함께 백 소장과 마주 앉았다. 옆에 있던 송경동 시인이 인사말을 했다. "첫 눈이 내리면 임이 찾아온다는데..." 백 소장은 그 말을 이렇게 받았다.

"첫눈! 무지렁이들의 옛 정서를 아시오. 집도 있고 방도 있고 아침 점심 저녁을 다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첫눈이 오면 임이 온다고 했어. 그런데 나처럼 답답하게 자란 집안에서는 첫눈이 오면 쌀눈이 온다고 했어. 흰 밥이 온다는 거지. 자연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이야. 배고픈 무지렁이들은 해와 달이 떠도 반갑지 않고 꽃이 펴도 반갑지 않아. 배고픈 사람만 아는 거야. '반가운 사람이 온다'고 말하는 것이 보편적 정서이지만 실질적 감각을 대변하는 말은 '쌀눈'이야. 늙은이가 처음부터 쓸데없는 소리했지?"

그는 첫 질문의 끝에서 말꼬리를 내렸지만 댓거리 처음부터 끝까지 무지렁이들의 '쌀눈' 정서가 짙게 깔려있었다. 백 소장은 신학철 화가가 그린 노동자 그림을 배경으로 한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일어나고 서는 것이 다소 불편해 보였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지만, 거리에서 보던 것과 같이 결기에 차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첫 질문을 던졌더니, 곧바로 직설이 날아왔다. 

- 건강은 어떠신지요?
"언론사 사람들이 오면 첫마디가 나이 들었다고 건강이 어떠냐고 물어와. 이것도 뒤집어야 해. 이건희도 건강, 전두환도 건강, 박근혜도 건강... 건강이라는 게 몸의 상태만 말하는 것이요? 사람다움이 어떠냐는 것을 물어보는 거라면 대답하리다.

나는 요즘 죽기 아니면 살기야. 일생을 민주주의다, 자유다, 해방이다 해서 살았는데 빈 껍질만 남겨 놓잖아. 내 손바닥에 있는 것도 빼앗아갔어. 그러니 죽기 아니면 살기지. 내 진짜 건강은 이 세상의 건강을 빼앗아가는 악독 분자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죽기 아니면 살기다, 이 말이요."

#시와 비나리의 차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박근혜 정부의 폭압 정치와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현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박근혜 정부의 폭압 정치와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현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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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가 팔십이 넘으셨습니다. 어떻게 시 낭송의 밤을 열 생각을 하셨는지요?
"이 땅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땅별(지구)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시적인 감흥과 시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어. 그걸 나이로 따질 수가 없지. 자연이 다 망가졌어. 돈 버는 이윤 생산의 구조가, 그 모순이 환경을 다 파괴했어. 나처럼 늙어도 파괴된 생활 현장에서 살다보니 감정이 돋구치잖아. 시심이 돋구치는거야. 젊거나 나이 들었거나 감흥이 없으면 잘못된 문명 속에서 우린 껍질만 남아. 그래서 감흥이 돋구친 나이 팔십의 할아버지가 비나리, 시낭송의 밤을 가지려고 하는 거지."

- 선생님에게 시란 무엇입니까? 또 비나리란 무엇인가요?
"시는 몽땅 글로 되어 있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글을 몰랐는데, 시심도 없었을까? 3천년전에 우리나라 글은 한문이었는데 1천명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이 하나둘밖에 없었어. 2천년전에는 한 열명쯤 되었겠지. 그렇다면 글을 아는 사람들만 시심을 구사하면서 살 수 있었을까?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무지렁이들도 시적 감흥과 시적 정서를 갖고 살았다, 이 말이야. 그 사람들이 빚었던 시를 일러서 비나리라고 말해. 비나리의 '비'는 빈다는 말의 동명사인줄 아는 데, 아니야. 비나리는 시야. 이번에 내가 시낭송을 하는 것은 무지렁이들의 시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려는 거야. 더 늙으면 무대에 설 수가 없어."

- 시와 비나리가 같은 말인데, 표현 방식이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비나리는 글이 아니라 입으로 해. 그런데 입으로만 하는 게 아냐. 지금도 내 온몸이 움직이 잖아. 이걸 보고 '말림'이라고 해. 말림은 온 몸으로 말하는 것이야. 비나리의 표현방식은 말림인데, 전에는 내가 힘차서 말림이 잘됐지. 이제는 잘 안 돼."

#춤 중의 최고가 '눈깔 춤'인 까닭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신다면?
"눈으로도 말할 수 있어. 춤 중에서 제일 어려운 춤은 눈깔 춤이야. 눈알 굴리는 게 춤의 기본이라니까! 서양의 미학 이론에는 없지만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이걸 잘 알아. 춤을 제대로 추는 사람들은 눈깔 춤을 잘 춰. 눈웃음이라고 말하면 알겠지? 묘한 웃음이지.

가난한 집에서 말이요. 눈은 펄펄 내릴 때 동치미 국물 다 떨어지고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쳐. 그 때 엄마가 돌아서서 눈물만 닦는 게 아냐. 뒤로 돌아서면서 결심하는 게 있어. 내일 아침에는 머리카락 잘라서 부잣집에 주고 쌀을 가져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야겠다. 그 결단을 내릴 때 엄마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띠거든. 이건 입춤이야. 그런 결단을 내렸을 때에 눈에도 뜨겁고 짠 게 맺히잖아. 눈이 웃으면서도 울음이고 웃으면서도 분노야. 이 세 개가 합쳐져야 비나리가 나와.

그러니까 말림은 온 몸으로 시를 빚고 온몸으로 시를 발표하는 것이지. 말림은 비나리를 발표하는 형식이고 내용이고 실제야."

- 선생님께서 꽤 오래전에 감옥에서 시를 처음으로 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 터졌던 시어들은 선생님의 비나리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전형적인 비나리지. 이번 시낭송에서는 빠지는데, '젊은 날'이라는 시가 있어. 군사 양아치들에게 매 맞고 죽게 됐을 때 나도 화가 나더라고. 나도 젊은 한 때가 있는데, 이 자식들이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약이 올랐지. 그래서 시를 썼어.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야. 고문 후유증으로 똥오줌을 받아낼 때 그런 시가 안 나올 수 없었어.

또 하나는 '백두산 천지'야. 그것도 입으로 썼던 시야. 그리고 이번 시낭송 밤에 읊으려고 하는 시는 '묏비나리'야. 산이란 말야. 언덕에서 읊는 비나리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지르는 게 비나리야. 그런데 많은 사람이 모인데서 말하면 죽잖아. 산에 가서 말해야지. 그게 묏비나리야. 무지렁이들의 분노가 시적으로 작렬하는 게 비나리인데, 이게 살지 않으면 문학이 죽고 예술이 죽어. 문명도 죽지."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 그리고 송경동

- 온 몸으로 말하는 게 비나리라는 말씀을 들으니 김수영 시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을 했죠.
"김수영 시인과는 잘 알았지만 맘에 드는 시가 그리 많지는 않지. 그래도 그 때 시인 나부랭이 중에는 김수영이 으뜸이야. 그 놈은 죽어도 맘에 없는 말을 함부로 안하려고 그랬어. 싫으면 싫다고 팽 돌아서서 몸으로 표현했어. 그러면 시인이지. 세속적으로 세련되면 시가 나오지 않아. 김수영 시인은 세속적으로 세련이 되지 않았지.

- 그럼 '이야기하는 쟁이꾼의 대지'를 읊었던 신동엽 시인과도 친분이 있었나요? 
"친했지. 1958년인가? <조선일보>에 '진달래 산천'이라는 시가 나왔어. 돈도 없었는데 버스를 타고 <조선일보>로 갔어. 수소문해서 신동엽을 만났지. 그날로 친해졌어. 보통 놈이 아냐. 얼굴을 보면 진짜 답답하게 생겼어. 찌푸릴 줄을 몰라. 그런데 그 놈은 사회주의자였어. 혁명을 하지 못하는 것을 늘 가슴 아파했어. 시에도 나오잖아.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술자리에서 '이 새끼야, 너 이게 무슨 뜻이니?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곡괭이들고 죽창 들고 덕유산으로 갔다는 말이지'라고 캐물었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 다음에 만났을 때 '그래, 네 말이 맞다'라고 실토를 하더라고. 좋은 놈이지."

-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옆에 있는 송경동 시인의 비나리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기가 막혀. 내가 경동이를 좋아하는 까닭이 있어. (책상에서 시집을 꺼내들면서) 이 '사소한 물음에 답함'이라는 시집을 이따금 들춰보는 데 진짜로 기가 막힌 다니까. 이런 구절이 한 개 있어. '내 아버지는 나한테 조그마한 슬픔에도 쨍그렁 깨지는 가슴을 물려줬다'. 뜨거운 가슴을 물려줬다는 거야. 슬프다는 거야. 내가 이 자리에서 폭로할 게 있는데, 경동이가 희망버스 운전할 때 나를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으니까."

(2편으로 이어집니다.)

관련기사 : "침대 밑에 칼을 놓고 전두환이 오면..."


"종교인 좌파로 모는 것은 중상모략"
[추가 댓거리] 박정희 정권 때도 '사회불안 요인'이라면서 때려잡더니...

26일 송경동 시인을 통해 백 소장에게 몇 가지 추가 질문을 던졌다. 천주교의 '박 대통령 사퇴 촉구' 시국미사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기 때문이다. 송 시인은 질문에 대한 백 소장의 답변 동영상을 기자에게 보내왔다.  

-  최근 검찰이 추가 기소한 국정원 댓글사건을 보면 정치개입 관련 게시글 건수가 100만건을 넘겼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대통령 자리에 앉으면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안 돼. 부정선거는 틀림없는데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어. 양심이 있으면 물러나야 해. 양심이 없으면 그냥 앉아있어도 되지만 역풍이 불어 올텐데..."

-  천주교 전주교구의 박근혜 대통령 사퇴 촉구 시국미사가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정치권보다 종교인들의 양심이 돋보이데. 정치권에서 먼저 들고나가야 하는데 종교인들이 그런 입장을 발표한 것은 큰 성과요 용기라고 볼 수 있지."

-  여권에서는 시국미사 때의 박창신 신부 발언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와 뜻이 비슷한 것은 종교야. 유럽과 미국에서도 종교의 자유는 무제한 인정하고 있어. 종교인의 말을 좌파로 모는 건 중상모략이야. 종교인들에게는 좌파라는 말을 붙이면 안 돼."

-  여권에서는 종교인들의 시국미사가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왜정 때 중학생 정도면 어른이었어. 중학생들이 일본에 반항하는 몸짓을 보이면 사회불안요소라고 했어. 사회 공공질서를 파괴한다는거야. 나라 뺏은 놈이 사회불안의 원흉이지, 그걸 찾겠다는 놈이 왜 사회불안요소야? 8·15 해방 뒤에 미국 놈과 소련 놈이 우리나라를 둘로 갈랐는데 이 때 통일하겠다고 하면 사회불안요인으로 잡아넣었어. 박정희 때도 우리가 좀 싸우면 사회불안요인이라고 해서 때려잡았어. 사회불안이라는 걸 아무 때나 들고 나오면 안 돼. 거짓말을 용인하고 부정부패를 옹호하는 것이 진짜 사회 불안 요인이야."




태그:#백기완, #비나리, #시낭송회,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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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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