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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박상규 오마이뉴스 기자 씀, 들녘 펴냄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박상규 오마이뉴스 기자 씀, 들녘 펴냄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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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가장 많이 접한 출판기념회 소식은 문인들의 것이 아닌 정치인들의 자서전 출간이었다. 기존 정치인은 물론 새로 정치인이 되고자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출판기념회를 시작으로 공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선거법에 의거한, 법정 출판물 허용이 임박한 시점에는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한꺼번에 봇물을 이루었다.

그런 자서전이라는 것은 애초 문학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 출간의 의도가 책의 판매와 보급에 있지 않고 출판기념회를 빙자한 세 과시와 정치후원금 징수가 목적이었던 까닭에 책의 질과 내용에 그다지 큰 무게를 두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같이 낯 뜨거운 자화자찬 일색의 조잡한 글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대부분) 대필 작가의 손을 거쳐 윤색된 그런 책이란 그냥 한 권의 종이 뭉치에 불과하다.

정치인의 자서전인 만큼 그 종이뭉치의 신고식은 화려하다. 유명 연예인의 사회로 진행되는 출판기념회에 초대가수가 축가를 부르고 중앙의 유력 정치인, 유명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주인공의 숨은 경력을 추가로 증언 해주는 등 찬조연설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수많은 청중이 동원되고 사람들에게 책은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반드시 유료로 배포된다. 작게는 정가의 몇 배 또는 몇 십, 몇 백 배의 어마어마한 액수의 책값을 지불함으로써 후원자들은 주인공의 정치행보에 힘을 실어준다. 언론들은 앞다퉈 화려했던 출판기념회 소식을 보도하여 분위기를 띄운다. 어느 문학가의 저작도 그만큼 화려한 조명과 관심 속에서 출간되는 영예를 누리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떠들썩한 출판기념식을 가졌던 인사들 중 극히 일부만이 그들이 의도한 대로 19대 국회에 입성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반 컷오프 탈락되거나 막바지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대대적인 출판기념식을 가졌던 자서전들은 누군가의 책장에서 주인과 같은 신세로 추풍낙엽처럼 뒹굴게 될 것이다.

종이뭉치 자서전 비우고 반가운 새책 만나

내 책장에도 여러 경로로 입수된 그런 자서전들이 꽤 여러 권, 책장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 한 장도 읽지 않은 채였다. 이사 오기 전 살았던 동네의 고물 수집을 하는 조씨 할머니는 폐지를, 그 어떤 재활용 쓰레기보다 높이 치셨다. 고물상에서 고철다음으로 값을 높이 쳐주는 것이 폐지라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부피에 비해 값을 안 쳐주는 플라스틱 종류 보다는 폐지가 가장 고마운 쓰레기라고 늘 강조하셨다.

이사 오기 전 할머니께 내 책장의 3분의 1 가량의 책들을 드리고 왔다. 소장가치가 없는 책들 위주로 모조리 할머니 리어카로 실어드렸다. 애물단지 같던 정치인 자서전들도 함께 처분했다. 화려한 출판기념회를 치르며 출간되었던 그 자서전들은 아직 새 책인 관계로 고물상에서 근수를 늘리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나마 할머니께 작은 도움을 드려 기뻤다.

출판기념회라는 것이 언제부터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자서전', ' 출판기념회'라는 말은 사전선거운동의 상징적인 단어이다. 웃지 못할 이런 출판풍토에서 정작 창작의 고뇌에 신음하는 진정한 작가들은 출판기념회 한번 갖지 못하고 소외당하고 있다.

홀가분하게 비워진 내 서가에 반가운 신간도서 한 권이 도착했다. 저자는 오마이뉴스 편집부 박상규 기자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라는 제목은 마치 어린 아이 응석 같은 뉘앙스다. 실제로는 성인이 된 아들이 엄마에게 부치는 헌정 도서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이 말은 "엄마 때문에 상처 받고,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팠지만, 그런 엄마를 위로하고 그리기 위해 이 책을 내게 되었다"는 저자의 해명인 셈이다. 

어려서 이혼한 부모. 엄마는 아들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아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현재 65세의 청소노동자다. 두 모자가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이, 오랜 세월 아들의 가슴에 응어리졌던 원망과 의문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해독되었다. 현직 기자인 작가의 첫 저서가 엄마에 관한 책이라는 점만 보아도 그가 평소 엄마에게 품고 있는 연민의 정과 사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동안 작가는 오마이뉴스 블로그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개인사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취재과정에 일어난 재미나는 에피소드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느낀 감상들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블로그 글들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게 되면서 그에겐 진작부터 출판 제의가 있어왔다. 분명 출판사로서는 이 책들이 출간되었을 시의 손익분기점에 대한 확신이 섰으리라 생각된다. 작가는 오랜 망설임 끝에 출판의 유혹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책은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책 읽다 보면 감정조절 힘들어..."엄마 왜 울다 웃어?"

블로그 글 중에서 49개의 에피소드를 발췌하였다. 각 에피소드들은 각기 다른 소재와 줄거리로 분산되었지만 결국 하나의 주제와 큰 줄기로 귀결된다. 이 책을 관통하는 큰 소재는 사랑과 위로 그리고 행복이다. 내가 포착한 행간의 메시지는 그런 것이었다. 독자들은 각 에피소드를 따라 가는 사이 제 때 울고 제대 웃어야 한다. 감정 조절 능력이 부족한 독자는 읽기 곤란하다. 그러므로 쉬엄쉬엄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혼한 엄마를 찾아 나선 아이의 여정을 따라서 한참을 울다가, 누나의 가슴 성형에 얼떨떨해 하는 청년의 감정에 달해서는 덩달아 짠해지고, 치질수술을 하고 난 뒤처리로 여성 생리대를 빌려 착용하고 다닌 감상을 올린 작가의 능청 앞에서는 킥킥 웃게 된다.

"엄마! 왜 혼자 막 웃어요? 아까는 슬픈 책 읽는지 계속 훌쩍거리더니 이젠, 또 재밌는 책으로 바꿔 읽나보죠?"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딸이 신기한 듯 한마디 하면서 지나간다. 같은 책을 읽고 있는데 딸이 보기엔 다른 책을 읽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지금 보면서 웃고 있는 책이 아까 보면서 울먹였던 그 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가, 엄마는 너무 이랬다저랬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고 한심해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동과 재미를 겸비한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감정수습에 서툰 독자들에게 너무 자주 병 주고 약 준다.

이 글이 작가 개인사에 기인한 '팩트'만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감정이 통째로 이입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까. 차라리 소설이었더라면, 차라리 일면식도 없는 무명씨의 이야기였더라면 울다가 금방 웃고 그러다가 또 가슴이 찡해지는 감정노역에 시달리진 않았을 것이다.
   
현재 작가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엄마는 특이한 개성의 소유자로 퍽 매력적인 인물이다. 아들한테 올인 하며 늙어가는 만만한 여인네가 아니다. 다 큰 아들을 향해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는 법 없이 끄떡하면 욕이다. 모든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다. 과거 아들한테 안겨준 상처로 인해 자칫 그녀가 위축되고 움츠러든 말년을 보내지나 않을까 하는 짐작은 보기 좋게 무너진다. 아들의 기자 박봉을 털어 그 비싼 서해안 꽃게를 한 바구니나 쓸어 오는 여인이 그녀다. "잔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인마!"라고 아들의 걱정스런 참견을 단번에 묵살해 버리는 엄마다.

이 엄마는 또 아무래도 아들보다는 개들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개들에게 쏟는 애정행각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억울한 심정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데 공감한다. 아! 과거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엄마. 너무나 당당한 현재의 엄마 모습이 아들은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런 엄마의 모습에 아들은 안도한다. 그는 엄마를 너무 사랑한다.  

아버지 원망 않는 작가... 엄마 향해 화살 겨냥

'술, 여자, 도박'. 가부장제 사회 제멋대로이던 이 나라의 아버지들이 향유하던 대표적 허튼짓들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행했던 항목들을 '술, 도박, 여자'순으로 나열했는데 나는 발생빈도와 그 행위가 가정 내에 미치는 심각성 등을 고려하여, '술, 여자, 도박'순으로 재배치 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또 이 세 가지에다 '폭력'이라는 강력한 항목을 추가한다. 폭력은, 술 또는 여자, 도박 등으로 어차피 가정을 교란시킨 가장이라면 마무리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술, 여자, 도박, 폭력은 상호보완작용을 하면서 나쁜 환경을 더욱 공고히 한다.
    
술. 여자. 도박. 폭력. 술+여자. 술+도박. 술+폭력. 여자+도박. 여자+폭력. 도박+폭력. 술+여자+도박. 술+도박+폭력. 여자+도박+폭력. 술+여자+도박+폭력.

당신의 아버지는 위의 어느 사례에 대입되는 인물인가 묻고 싶다. 단 하나의 사례에도 해당되지 않는 아버지를 가장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그는 대단히 복 받은 사람이다. 반대로 추가 항목이 긴 아버지 밑에 성장한 아이들일수록 불행하다. 사회적 용어로 하면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아동'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네 가지를 모두 '올 킬'하는 분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작가가 겪었던 불행과 아픔의 근원을 따져 간다면 이 책의 제목은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다'로 바뀌었어야 맞다. 그렇지만 모든 불행의 원인제공자인 아버지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아니고 현존하는 부모는 엄마뿐이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아버지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엄마였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의 화살은 엄마를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작가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엄마에게 헌정되었다.

아버지와는 유아·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면서 충분한 해원의 의식을 치렀던 것일까. 책 어디에도 아버지를 직접 원망하는 글은 찾을 수 없다. 산속 외딴 집에서 두 남자가 외롭게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는 더 이상 원망의 대상도 미움의 대상도 아니었던가.     

엄마와는 그런 치유의 시간마저 갖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들과 엄마는 단 둘이 살고 있다. 그 옛날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던 것처럼.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이제 아들은 엄마와의 해원 의식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선언서이다.     

이쯤에서 나도 내 아버지를 생각한다. 술을 평생에 걸쳐 좋아 하신다. 그렇지만 술로 인한 주사 같은 것은 부리지 않았다. 주사는 물론 도박도 여자도 폭력도 안 썼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쁜 행위 무엇도 안하는 대신 가장으로서 응당 져야할 의무와 책임에도 무관심했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가장으로서의 치명적 결격사유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이었다. 게으르고 가정살림에 무관심한 한량 아버지가 우리 가정에 드리운 불행의 무게는 컸다. 술 마시고 도박하는 다른 아버지들은 그래도 농부의 본연인 농사일만큼은 부지런했다.

오뉴월 농사철이 되어도 아버지는 엄마가 갓 지어준 하얀 모시한복을 차려입고 한가하게 마을 앞을 배회하거나 아니면 그늘에 누워 베짱이처럼 노래를 부르거나 한가하게 책을 읽었다. 그런가 하면 자주 양복을 차려입고 면소재지 출입을 했다. 병에 걸려 자리보전하고 누운 중증 환자가 아니라면 주막집 주모를 제외하고는 농번기에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우리 아버지가 유일한 어른이었다.

남편 굴레 못 벗어난 여인들...작가의 엄마는 홀연 떠나

여자들은 우리 엄마를 한편으로 부러워했다. 평생을 가장들의 갖은 횡포에 시달리는 아낙들 처지에서 보면 엄마는 부러운 여인이었다. 무지한 농촌 마을의 남자들은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도 대부분 가장이라는 권위에 가려 묵인되거나 당연시 되었다. 남자들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고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한 마을에 본부인과 첩을 동시에 두고 살아도 여자들은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마을의 경우 이혼율은 거의 0.0001%였다. 이혼을 하기는커녕 그나마도 쫓겨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그 시절 여인들의 딱한 처지였다.

그런데 작가의 엄마는 아버지를 떠나버렸다. 위로 형과 두 누나들만을 데리고서. 다섯 살 어린 막내아들만 아버지에게 곁에 홀로 남겨졌다. 막내아들은 엄마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2남 2녀의 자식들 중 다섯 살 막내아들을 남겼다. 형도, 누나들도 아닌, 왜 하필 나를 남기고 떠났을까. 작가의 트라우마는 이 강한 의문을 극복하지 못한데서 연유했다.

어린 그는 보신탕집 '오작교'에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겨졌다. 가족을 파탄내고도 여전히 아버지는 술과 도박과 여자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엄마는 마치 목욕하러 지상에 내려왔던 선녀가 하늘나라를 못 잊어 떠나듯 세 자녀를 옆구리에 끼고 오작교를 건너 떠나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무꾼 아버지를 떠난 엄마는 도시에서 하얀 선녀 옷 대신 비키니 수영복을 착용하고 여인들의 때를 밀어 주고 있었다. 이혼한 엄마의 첫 직업은 목욕탕 때밀이였다. 그로부터 향후 십년간 그의 엄마는 비키니 수영복을 유니폼으로 때밀이를 한다. 목욕탕 때밀이, 식당 설거지 아줌마, 청소노동자를 거치는 동안 그녀는 줄곧 누군가를 위해 쓸고 닦고 씻는 일에 종사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고질적인 습진이 지난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소년은 엄마를 찾아 청계산 '오작교'에서 안양시내의 '창신 여인숙'을 수없이 오갔다. 당시 왕복 4시간이 소요되던 창신 여인숙과 오작교는 어린 소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세상의 끝이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직녀가 아닌 엄마의 새 거처는 시장골목의 허름한 여인숙이었다. '창신 여인숙', 엄마의 새 둥지에는 그녀의 새로운 남자들이 드나들었다. 청계산 자락 아버지의 보신탕집 오작교에도 새로운 직녀들이 아버지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실려 들어왔다. 어린 소년은 세상의 양 끝에서 이 모든 것을 낱낱이 '목도'하였다.

청계산은 모 대기업 회장의 남다른 자식사랑으로 유명해진 산이다. 그 대기업 회장은 아들의 앙갚음을 위해 모종의 작전을 수행하는 장소로 청계산을 택했다. 그러나 그 옛날 어린 소년 박상규는 그 산에서 아버지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개고기를 팔아 어렵게 번 돈을 몽땅 털어 도박을 하러 떠났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타고 한번 떠나면 아버지는 며칠씩 소식이 없었다. 어떤 때는 열흘이 넘도록 귀가하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려야 했다. 산속 외딴 집에서 홀로. 오랜만에 귀가하는 아버지 오토바이 뒷좌석에는 종종 낯선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보신탕집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공식적인 '새엄마'로 1년을 버텼던 여인이 아버지 곁을 떠나던 날 오작교의 견우 아버지는 서럽게 울었다.

견우와 직녀의 안타까운 만남을 위해 까마귀들이 몸으로 놓아준다는 임시 다리 오작교. 보신탕집 '오작교'도 불법 건축물이었다. 그린벨트 내의 무허가 건물 오작교에는 수시로 완장 찬 단속반원들이 들이닥쳐 영업을 위해 짜 놓은 평상을 들어 엎고 기물을 깨부쉈다. 그들의 정당한 법 집행 앞에서 불법건축주인 아버지는 속수무책이었다. 한바탕 휘젓고 떠나면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평상을 다시 짜고 집기들을 손봤다. 그의 집과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통나무 다리였다. 아버지는 그 다리를 손수 지었고 오작교라 이름 붙였다. 보신탕집 상호 '오작교'는 그 다리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통나무 다리 오작교는 청계산에 큰 비가 오면 어김없이 휩쓸려 가버렸고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씩 오작교 다리를 새로 놓아야 했다.

보신탕집 오작교 가마솥에 희생당한 개들 덕분에 작가는 먹고 입고 공부할 수 있었다. 약 1000여 마리에 육박하는 개들의 목숨을 담보로 그의 오늘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블로그 필명은 '개천마리'다. 자신의 몸과 의복과 학업을 위해 죽어 간 가엾은 개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에서다. 도시락 반찬으로 개고기를 싸 갈만큼 개고기는 그에게 있어 가장 흔한 식용재료였다.

내신 14등급이던 작가, 개천마리 덕분에 '개과천선'?

개천마리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편부슬하의 가난한 보신탕집 아이. 그의 성장배경은 분명 우리 사회가 정한 기준에서 가장 고위험군 결손가정에 해당하는 불우한 환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현재는 통쾌한 반전이다. 예상을 뒤엎고 성인이 된 그의 직업은 진보언론매체의 정규직 기자다. 

고교 내신 14등급, 재수, 2.25학점의 대학 이수,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단순 노동자를 전전하던 그가 직원 100명 규모의 언론사 정규직 사원이라니. 내세울만한 스펙도 배경도 실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한심한 구직자였던 그다. 그가 업보처럼 지고 가는 개천마리의 영험이 깃들지 않고서야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화성 와우리에 있는 작가의 집은 가히 개들의 천국이다. 그는 개들에게 자신의 항렬자까지 물려주는 호의를 베풀어 '상구' '상추' '상미'등 인격을 부여받은 개들의 형님 격이다. 애초에 버려진 사냥개 한 마리를 데려와 보살필 때만 해도 그는 이렇게 많은 개들을 건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개들의 동물적 본능과 왕성한 번식력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 한 마리로 시작했던 개들은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며 그 개체수를 급속도로 늘려갔다. 그의 집에선 개가 새끼를 낳는 일은 하등 신기할 것 없는 일상이다.

엄마는 아들보다 개를 더 사랑한다.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쇠고기 미역국을 끓여주고 여름이면 덥다고 수박을 깎아주며 겨울이면 춥다고 아들도 못 덮게 하는 오리털 이불을 깔아주는 과보호를 일삼는다. 개들의 배후에는 엄마가 도사리고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찡했다. 하찮은 동물을 그렇듯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그녀의 행동 저변에는 모성애의 흔적이 배어있다. 못내 가슴이 아팠다. 제때 보살펴야 할 어린 아들을 제때 보살피지 못하고 흘려보낸 세월에 대한 포한을 개들에게 해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주인들의 보살핌이 극진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개들의 개체 수는 와우리 개들의 천국에도 큰 파란을 몰고 온다. 수십 마리로 늘어난 개들을 감당할 수 없어 대대적인 감원조치가 행해진 것이다. 개들의 번식력을 감안하면 예견된 불행이다. 엄마는 어떤 녀석들을 남기고 어떤 녀석들을 처분해야 할지 괴로운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남게 될 개들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결국 사십여 마리의 개들 중 선택받은 몇 마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개들은 소개되었다. 개들이 떠나 텅 빈 집안에서 아들은 엄마에게 녀석들의 행방을 묻지 못했다. 그 옛날 어린 그를 버린 엄마에게 왜 하필 나였나, 묻지 못했듯이 사라진 개들을 어떻게 '처분'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어디에선가 잘살고 있으려니 여기기로 했다. 살다보면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이 온다. 독자들도 그와 공모자의 심정으로 그저 개들이 잘 살고 있으려니 생각하는 것이 상책이다.    

한차례 뼈아픈 구조조정 과정을 겪고서도 주인들은 개들의 개체수를 조절하는데 다시금 실패했다. 아무리 동물이라지만 인위적인 거세는 '차마' 못할 짓이라는 순박한 주인들의 무기력한 방치아래 개들은 무분별한 사랑을 시도 때도 없이 나누고 개체 수는 얼마 안 가 예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착한 아들, 저돌적 기자... 하지만 종착역은 '자연'

이 책은 크게 ▲ 오마이패밀리 와우리 샤론스톤 ▲ 나는, 개천마리 기자 ▲ 이렇게 살다가 뒤져 불란다 세부분으로 나뉜다.

'오마이패밀리 와우리 샤론스톤'에는 작가의 개인적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자궁암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서 눈을 뜨면서부터 담배를 찾았다는 골초 엄마, 누나의 결혼식 날 밤 어둑한 거실에 한복을 입은 채로 앉아 담배를 피웠다던 엄마. 그런 엄마의 담배 피는 모습을 빗대어 와우리 샤론 스톤으로 격상시켜 주는 아들.

그는 참으로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들이다. 엄마랑 묘목을 사와 집 안팎에 고루 나무를 심는 아들, 엄마를 뒷좌석에 태우고 살고 싶은 산 곰배령으로 여행을 떠난 아들, 엄마의 지도편달 아래 파김치를 담그기를 배우는 아들. 그런 아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상처로 인한 상흔은 찾을 수 없다.

'나는, 개천마리 기자'에는 기자로 활동하는 현재 작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기자답지 않은 외모 때문에 시위현장에서조차 프락치로 오인을 받는다. 취재원들에게는 불필요한 오해와 혐의를 종종 받는다. 그러면서 늘 낡은 점퍼 한 벌과 먼지 앉은 등산화 하나로 취재 현장을 누빈다.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기자로서 대단한 그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의 투철한 기자 정신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모텔 방의 흐릿한 불빛아래서 옆방 남녀의 생생한 음성을 장단 삼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기도 한단다. 모텔방의 악조건을 견디면서 친일인명사전을 뒤져가며 관련분야 '특종' 기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신경한 저돌성이 자신만의 저력이라고 그는 푸념하기도 한다. 취재현장을 누비며 그는 취약한 인권, 소외계층의 애환, 파업 현장의 분노와 함성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취재수첩은 취재현장에서 흘린 땀과 눈물과 분노로 축축이 젖어 있다.

'이렇게 살다가 뒤져 불란다'에는 외딴 산속 보신탕집에서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지만 청계산 타잔으로 자연을 만끽하던 세월에 그는 감사한다. 땔나무를 하러 산에 다니고 봄이면 개나리가 울타리를 대신해주고 집 주변에 벚꽃이 만발하던 그 집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을 넉넉히 품었던 어린 시절의 자연을, 산을 미래의 그의 삶에서 다시금 복원하고픈 꿈을 늘 지니고 산다. 그토록 지리산, 곰배령을 자주 찾는 것도 그 꿈의 체험과정이다.

그는 기어코 이 약육강식의 번잡한 세속 도시를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청사진도 그려졌다. 그의 계획에 의하면 그의 기자생활은 한시적이다. 지리산 또는 곰배령에서 그는 울울한 자연의 품에 안겨 실컷 소설을 쓰면서 살 것이다. 그러기 전에 꼭 세계여행을, 또 그 전에 마음 맞는 여자를 만나 결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시간만 나면 먼 길을 마다않고 곰배령으로 향한다. 곰배령의 산골부부의 오두막에서 꼽사리 끼며 며칠을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가 가장 선호하는 휴가 방식이다. 미래의 박상규 기자의 모습은 어쩌면 그 곰배령 부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의 작가인 박상규 기자. 그가 지리산 또는 곰배령 어디쯤에서 탈고할 소설을 고대한다. 이 책에서 미처 다 펼쳐 보이지 못한 이야기가 무척 기다려진다.

청계산 보신탕 오작교집 이야기, 청계산 타잔 천둥벌거숭이 시절 이야기, 아버지의 새로운 여인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 이혼한 엄마를 찾아 창신 여인숙을 오가던 이야기, 목욕탕 때밀이를 하던 엄마 이야기, 이혼한 엄마가 홀로 삼남매를 키우던 이야기, 뇌쇄적 포즈로 담배를 빨고 있을 듯한 노년의 엄마 이야기, 그 모든 이야기들의 뒷담화가 몹시 궁금하다.

이 글은 뒷날 이어질 그 지난한 소설들의 맛보기 정도로 여기고 싶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글만으론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아직 못다 풀어 놓은 재미있고 가슴 찡하고 흥미진진한 뒷얘기들이 무수히 많을 터이다. 먼 훗날 곰배령에서 탈고할 그의 소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덧붙이는 글 |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박상규 오마이뉴스 기자 씀, 들녘 펴냄, 2012년 6월 9일, 312쪽, 1만3000원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 개천마리 기자 박상규의 쿨하고도 핫한 세상 이야기

박상규 지음, 들녘(2012)


태그:#박상규 , #엄마, #개천마리, #보신탕, #오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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