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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한진중공업에서 129일째 크레인 고공 농성을 벌이다 2003년 10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김주익 지회장과 같은달 30일 도크에서 숨진채 발견된 곽재규 조합원의 시신이 그대로 안치되어 있는 가운데 조합원들이 30여개의 천막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2003년 11월 당시의 모습이다.
 부산시 한진중공업에서 129일째 크레인 고공 농성을 벌이다 2003년 10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김주익 지회장과 같은달 30일 도크에서 숨진채 발견된 곽재규 조합원의 시신이 그대로 안치되어 있는 가운데 조합원들이 30여개의 천막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2003년 11월 당시의 모습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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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크레인의 육중한 자물쇠가 비긋이 기울어졌다. 쇠톱을 켜기 시작한 지 세 시간 만이었다. 그는 용접으로 입구를 봉해 버리고 조종실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한 평 남짓의 철제 공간에 지체 없이 여장을 풀었다. 해변 35m의 공간, 바닷바람에 사위가 그림자처럼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침낭을 펴고 앉았다.

지난 1월 6일 새벽,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영하 12℃의 혹한, 인근 도시 포항에는 57년 만의 폭설이 내린 무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시간은 희망버스라는 이름을 얻은 전대미문의 역사가 발차를 예비하는 순간이었다.

계절이 두 번 바뀌어 오늘(12일)까지 188일, 김진숙은 자신이 선택한 공간에서 한사코 벗어나지 않고 있다. 무엇이 그를 요지부동으로 붙잡고 있는 것일까? 그는 작년 겨울에도 24일 간이나 천막 단식을 결행한 끝에 병원에 실려가 겨우 목숨을 간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가 바뀌자마자 그 섬뜩한 고공 투쟁을 또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만큼 그는 유별난 인간이란 말인가?

물론 아무나 김진숙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진숙과 같은 상황에 내몰렸을 때 아무나 그처럼 되지 말라는 법 또한 없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일 뿐이다. 그를 유별나다고 하거나 심지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의지와 진정을 훼손하고 그의 슬픔과 절망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친구로 삼고싶어 하기 때문이다.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세 노동자의 삶과 죽음

김진숙의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와 최소한 세 노동자의 죽음을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도 슬퍼서 글로써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강화도 외포리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집을 나온 소녀는 집에서 가장 먼 지역이라는 이유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남녘 도시 부산을 선택했다. 그의 보따리에는 대입 참고서들만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돈을 벌면서 공부해 대학에 가겠다는 벅찬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해운대 아이스크림 장사, 미싱공, 소모품 외판원 등을 거쳐 시내버스 안내양 등 온갖 비정규직을 전전했다. 공장에서는 손가락에 물집이 가실 날이 없어도, 행동이 빠릿빠릿하지 못하다고 발길질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종아리에 시퍼런 멍이 지워질 날이 없었다. 122번 화진여객 시내버스 안내양 시절에는 새벽 4시 15분부터 여섯 번 노선을 왕복하고 입금 후에는 속옷까지 벗고 항문까지 검신당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남자들이 하는 용접공으로 취업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전신) 공장에 취업했다. 그는 5년만 열심히 일하면 금의환향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했다. 1981년 스무 살 처녀 김진숙은 그렇게 해서 조선소 노동자가 됐다.

2003년 10월22일 김진숙이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의 대형 영정 앞에서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2003년 10월22일 김진숙이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의 대형 영정 앞에서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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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곳은 '용접 슬래그에 얼굴이 움푹 패고 눈알에 용접불똥을 맞아도 아프다 소리도 못하던 공장'이었다.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는 도시락을 주면 공업용수에 말아 먹어야 하던 공장'이었다.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며 용접을 하고 절단을 하던 공장'이었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 오는 날 미끄러져 뇌수가 라면발처럼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공장'이었다.

'한 해에도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던 공장'이었다. 그래서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공장'이었다. 그런데도 '어용노조는 조합비를 횡령해 먹기 위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조합원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더 나아가 자녀들까지 서류상으로 죽여 상조비를 갈취해 가던 공장'이었다.

그는 정확히 6년 후인 26세 때 직장에서 해고된다. 금의환향은커녕 거리에서 눈 여겨 보아 두었던 원피스 한 벌 값도 제대로 모아 놓지 못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그 해고 이유라는 것이 알량한 노조활동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현장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동료의 죽음. 그럼에도 세상도, 노동조합도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주변 아저씨들의 권유로 노조 대의원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네들끼리 이름 써서 올리면 그게 대의원이고, 그 중에서 돈 좀 쓰면 간부 되고 더 쓴 놈이 위원장 되는' 노동조합의 실상을 보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민주노조' 만들기였는데 그것이 곧 해고 사유라는 것이었다.

박창수·김주익·곽재규... 김진숙의 가슴에 묻힌 세 남자의 주검

박창수가 있었다. 그는 부산 기계공고를 졸업하고 1981년에 한진중공업 배관공으로 들어왔다. 김진숙과 입사동기인 셈이다. 세월이 흘러 입사 6년 차가 되던 1986년 어느 날이었다. 일밖에 모르던 그는 우연히 공장 정문 앞에서 경비원들과 어용노조 간부들에게 짓밟히는 한 여성을 보게 된다. 여성은 유인물을 뿌리다 해고당한 김진숙이었다. 이후 그들은 '민주노조'를 결성한다. 김진숙이 공장 밖에서 '조공(조선공사)노동자신문'을 만들면, 박창수는 이를 공장으로 들여와 살포하는 일을 맡았다.

1년 후 1987년 6·10 항쟁 직후인 7월 25일 민주노조원들은 처음으로 공개적인 투쟁에 나섰다. 아무 소리 못하고 받아먹었던 쥐똥 섞여 나오는 깡보리 도시락을 전 조합원이 일제히 집어 던져 거부한 것이었다. 이때 김진숙은 흔히 말하는 '삶의 희열'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박창수는 1990년 조합원 93%의 압도적인 지지로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1991년 2월 대우조선 노조 지원을 위해 열린 의정부 다락원 캠프 노동자 연대회의 수련회장에서 급습한 경찰들에게 전격 체포되었다.

장안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그해 5월 4일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머리를 서른여덟 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다. 이틀 후인 5월 6일 새벽 그는 불시에 찾아 온 정보기관(당시 안기부)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가 얼마 후 병원 뒷마당에서 참혹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박창수.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주검마저 난자당했던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박창수.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주검마저 난자당했던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 비정규직없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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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들은 조선소 노동자들은 분개했다. 그들은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유가족과 함께 올라왔다. 시민단체 회원, 대학생 그리고 인근 안양·의왕·군포 지역의 시민들이 자원하여 비극적으로 운명한 노동자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난데없이 경찰 백골단이 출현했다. 그들은 병원 영안실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와 박창수의 시신을 갈취해갔다. 이후 경찰이 발표한 사인은 단순추락사, 자살로 결론냈다. 그 해 6월 20일, 김진숙은 첫 번째 남자 박창수를 가슴에 묻었다.

김주익은 박창수와 함께 의정부 다락원 캠프 회의에서 체포되었지만 주동자가 아니어서 구속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료의 죽음을 유발한 현장의 동참자였다. 김주익에게는 박창수의 삶까지 살아야 하는 것이 운명으로 봉착된 것이다. 그는 1994년 한국 최초의 선상파업인 LNG 선상파업을 주도했다가 구속되었고, 석방 후에도 끈질긴 복직투쟁으로 다시 공장으로 되돌아왔다.

김주익이 민주노조의 깃발을 다시 세우고 위원장이 된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그후 2002년 회사는 노사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희망퇴직, 명예퇴직,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다시 650여 명이 잘려 나갔다.

당시 김주익이 21년 동안 근무해서 받는 봉급은 기본급이 108만 원이었다. 각종 공제를 하고 나면 9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사측은 노조간부 110여 명에 대해 18억 원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김주익 등 14명을 고소·고발했으며 26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1조 6000억 원 매출에 239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냈고, 사주는 매년 50~100억 원에 이르는 배당을 챙겨가고 있을 때였다.

85호 크레인에 목을 맨 김주익... 그를 위해 투신한 곽재규

사태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김주익의 고뇌는 깊어만 갔다. 그러던 2003년 6월 11일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김주익은 35m 상공의 85호 고공크레인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너희들이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바치겠다."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숙만은 그의 말에서 전율을 느꼈다. 경찰은 무시로 공권력을 투입했고, 회사는 단 한 번의 교섭에도 나오지 않았다. 김주익은 2남 1녀를 둔 가장이었다. 평소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그였다. 크레인에서 내려가면 아이들에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죽어서 내려가겠다는 세상에 대한 약속과, 내려가서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는 가족에 대한 약속 중에서 전자를 택했다. 2003년 10월 17일, 고공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그는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맸다. 그가 남긴 유서는 간명했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그 약속이 뭐가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야속하게 그는 고공크레인에 오를 때 세상에 던졌던 그 약속을 하나밖에 없는 자기 자신, 하나밖에 없는 남편,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빠의 목숨과 한데 퉁 쳐서 바꿔 버렸다. 그리고 그는 주검이 된 채로도 고공크레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김진숙이 '주익씨'라고 부르는 두 번째 남자는 이렇게 그의 가슴에 묻혔다.

숙련 기술자 곽재규는 당시 정리해고 대상에서 제외된 이른바 '산 자'였다. 그는 그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내가 주익이를 죽였다며, 김주익의 시신 없는 빈소에 아침마다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만 흘렸다.

곽재규는 언변은 어눌했지만 김진숙과 박창수와 김주익이 앞장서 싸울 때 늘 함께 해준 연장자였다. 그는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야간 전문대학까지 마친 건실한 노동자이기도 했다. 김주익이 죽고 나서도 고공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한 지 보름째. 곽재규는 85호 크레인 맞은 편 도크에서 몸을 던진다. 동생의 '죽음'에 '명분'을 안겨주기 위한 또 하나의 처절한 '죽음'이었다.

곽재규는 김진숙의 가슴에 묻힌 세 번째 남자였다. 조용한 애주가였던 곽재규, 칼국수와 수제비 같은 '밀가루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곽재규, 그의 아내 정갑순은 지금도 길 가다 키 작은 남자만 봐도, 출근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마주치기만 해도 그저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의 딸 경민이는 아버지 공장 곁을 지날 때면 아버지를 앗아간 공장을 폭파해버리고 싶다고 한다.

"아빠 다니는 회사에 처음 들어와 봤어. 가슴이 아프고 당황스러웠어. 배 만드는 공장인 줄 알았는데, 여기는 무슨 전쟁터 같이 느껴졌어. 삭막했고,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나 달랐어. 이런 곳에서 일하는 줄 몰랐어....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기 며칠 전에 집에 왔을 때,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안절부절 못해 하는 모습이었어. 창문만 바라보고 계셨지. 그때부터 벌써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지."(딸 곽경민, '아빠께 드리는 편지'에서)

세 노동자의 죽음으로 이룬 승리, 그러나...

이후 광화문과 종로에서는 분노한 5만여 노동자의 격렬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던 노무현 정부는 식겁하여 등에 서늘한 땀을 흘렸다. 2003년 11월 16일 김주익·곽재규의 합동 장례가 치러졌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희한한 장례식이었다. 김주익은 35m 고공크레인에서 내려왔고 곽재규는 11m 지하 도크에서 땅으로 올라와 두 시신은 조우했다.

정부와 회사는 태도를 바꿨다. 두 사람을 기리는 추모공원이 조선소 안에 지어지고, 정리해고 계획은 백지화됐다. 아울러 사측은 차후로는 정리해고를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더불어 30억 원 들여 새 식당이 지어졌고, 노동자들의 임금과 성과급이 인상되었다.

'정리해고'라는 것은 1997년 외환위기 때 IMF에 의해 강요된 괴물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노사정에서 합의토록 했던 데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그것을 한시적인 법으로 못 박았어야 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뒤늦게라도 그것은 폐지하거나 대폭 개선했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2008년 외환위기가 재발되었다. 이제 정리해고에 면역이 생긴 대기업들은 오히려 그것을 선무당 사람 잡듯이 휘둘러댄다. 그들은 정규직을 몰아내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는 것을 구조조정이라고 여기는 집단이다. 어느덧 비정규직은 800만 명을 넘어 9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치면 1000만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

2003년 12월 부산 한진중에서 한 노동자가 김주익 곽재규씨의 대형 영정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다.
 2003년 12월 부산 한진중에서 한 노동자가 김주익 곽재규씨의 대형 영정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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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건비가 저렴한 필리핀 수빅만에 조선소를 차린 한진중공업은 8년 전의 약속을 깨고 작년부터 영도조선소에서 정리해고 작업에 착수했다. 김진숙은 한진중공업 세 노동자의 죽음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본 현장의 증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투쟁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이자 스스로 인간임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 박창수가, 김주익이가, 그 천금 같은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다면, 그 단단한 어깨를, 그 순박한 웃음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볼 수 있다면....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어쩌자고 그렇게 착하게, 어쩌자고 그렇게 우직했단 말입니까?"(김진숙, <소금꽃나무>에서)

고공크레인의 김진숙은 김주익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김주익이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김주익이 살아생전 나지막이 봤던 세상의 모습들을 보면서 지낸다. 그리고 김주익이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제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거라고 했다. 그는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힘을 다하겠노라 다짐하고 있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그들에 대한 부채감도 20년 아니 40년이 걸리더라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소금꽃나무>에서)

우리가 김진숙을 위해 해야 되는 일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186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10일 오전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2차 희망버스'에 참가한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 정청래 전 의원 등과 전화통화를 하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186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10일 오전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2차 희망버스'에 참가한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 정청래 전 의원 등과 전화통화를 하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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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은 이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격조정자가 되었다. 그의 손짓은 가녀리지만 지난 주말 그 손짓 하나로 전국 방방곡곡에 수백 대의 희망버스가 배차되었다.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한 '소금꽃나무'는 등짝에 하얗게 소금꽃을 피울 정도로 땀을 흘리는 노동자를 의미한다. 그는 명실상부하게 1000만 '소금꽃나무'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김진숙은 크레인에서 그냥 내려올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운명이 그렇게 그를 엮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그를 제 발로 내려올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에게 내려올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따라서 한편으로 3차 희망버스를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발길을 한진중공업 본사로 돌리는 일도 병행할 것을 제안해 본다.

언론은 희망버스 현상을 언급하면서 이제 비정규직 문제가 전국민의 당면 현안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김진숙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희망버스를 성원하는 것은 우리의 당면 현안 따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본다. 당면 현안에 앞서 그것은 우리 스스로 인간임을 확인하는 막중한 작업이라고 규정해야 하겠다. 누군가 평창 올림픽을 못 마땅해 하는 사람은 우리 국민이 아니라고 했다. 그의 화법을 빌린다면, 김진숙과 희망버스를 못 마땅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터이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쓰면서 <소금꽃나무> (김진숙 지음, 후마니타스>를 참고했습니다. 송경동 시인은 김진숙과 노동자들 이야기를 하기까지 3개월을 망설였다고 한다. 글로 쓰기에는 너무도 비극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간의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 김진숙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김진숙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는 '자기 기준'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진숙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중압감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주저하던 끝에 감히 자판 앞에 앉았다. 그렇긴 하지만 행동하지 않고 입으로만 나불대는 내가 여전히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다. 제발 이 논의가 김진숙에게, 죽어간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1000만 비정규직 종사자들에게 누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태그:#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김진숙,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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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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