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인생은 90부터라며 환하게 미소 짓는 박정희 작가는 분명 청춘 그 자체다.
 인생은 90부터라며 환하게 미소 짓는 박정희 작가는 분명 청춘 그 자체다.
ⓒ 이정민

관련사진보기

재개발과 도시화의 물결로 인해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요즘, 인천 동구 골목길을 가면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냉면 거리로 유명한 화평동길 초입에 자리잡은 '평안수채화의 집'(화실)은 이 골목의 터줏대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지난 8일 오후3시께, 3층짜리 건물 외벽에 벽화 그리기가 한창 진행 중인 평안수채화의 집 현장으로 찾아갔다. 이 작업은 동구청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펼치고 있는 사업으로 낡은 골목 외벽들을 선정해 지역 작가와 주민들의 손으로 화사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미술 작업 현장을 뒤로하고 마침 휴식시간을 맞아 함께 살고 있는 따님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층 안내데스크에 보이는 '투약구'라는 작은 글씨 간판이었다. '아, 이곳이 예전에 약국이었나, 아님 병원?' 혼자 짐짓 추측을 해보며 둘러보는데 옆에 있는 분이 말을 건넨다.

"아, 여기 글씨 보니까 기억이 나네요. 제가 이 동네 살았었는데 어릴 적 엄마 손잡고 치료하러 온 적 있는 것 같아요. 하하~. 맞아요. 이곳이 병원이었고 1층에서 약을 타갔던 것 같아요. 커서는 들어와 본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안을 구경해보니 이제 알겠네요."

말을 들어보니 정말 병원이었던 것 같은 분위기다. 그걸 증명이라도 해주듯 작품으로 둘러싸인 한쪽 귀퉁이에는 약을 타가려고 주민들이 기다렸던 작은 소파들이 오랜 향수를 머금고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자체에서 풍기는 오래된 추억의 향기가 그대로 살아있는 집안 곳곳은 그야말로 역사 속 주택 내부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 작은 계단, 낡은 페인트 흔적, 오래된 나무 창문, 작은 요강, 그리고 집 내부에 가득한 박정희 작가의 작품 갤러리까지.

마치 고향 할머니 집을 방문한 것처럼 구수하고 포근한 냄새가 가득했으며 가지런히 정렬된 할머니의 빛바랜 작품들은 이 집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운치를 더해주었다.

한국점자의 아버지 송암 박두성 선생의 뜻을 이어받다

박정희 작가는 현재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시각장애인 장학재단 송암장학회의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은 오래된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맹인안내견 스티커
 박정희 작가는 현재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시각장애인 장학재단 송암장학회의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은 오래된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맹인안내견 스티커
ⓒ 이정민

관련사진보기


짧은 집 구경을 마치고 이윽고 박정희 작가의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사진첩을 열심히 뒤지느라 손님이 온지도 몰랐던 박 작가는 이내 환한 웃음을 보이며 반가이 맞아 주었다.

1923년생, 올해 나이 88세. 외관상으로 처음 뵈었을 때는 그 나이 또래의 노년의 중후함이 들어보였었지만 이내 말을 건네고 이야기가 회자되자 기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순발력과 기억력에 한 번 놀랐고, 중간 중간 말을 곱씹으며 확인까지 해주는 센스에 두 번 놀랐으며, 인터뷰와 그림을 한 번에 끝마치는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박 작가는 실제로 인터뷰가 끝마침과 동시에 그림 하나를 완성시켰다).

박정희 작가는 평안수채화의 집 주인이자 시각장애인들의 대모, 그리고 육아일기의 저자로 그 명성이 아직까지 건재한 열혈 선생님이었다. 박 작가가 이렇게 살기까지 인생의 큰 화두를 던져 주었던 인물은 바로 그의 부친인 송암 박두성 선생이었다. 박두성 선생(1888∼1963)은 시각장애인의 정신적 지주, 한국점자의 아버지, 한국 맹인의 아버지라 불리며 평생을 맹인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박두성 선생은 1913년 제생원 맹아부(현 서울맹학교) 교사를 거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1920년부터 한글점자 연구에 착수하여 7년간의 연구 끝에 마침내 1926년 '훈맹정음(訓盲正音)'이란 독창적인 한글점자를 창안해 내놓는다.

박두성 선생은 시각장애 교육이 장애인교육이나 자선사업에 그치지 않고 직업교육과 더불어 시각장애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 양성 및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조선어 교육이 폐지된 상황에서도 제생원에서는 우리글의 공교육이 지속될 수 있었다.

"아버지 덕분에 92년 한국점자도서관건립기념 전시회와 97년 인천맹인복지회관 건립기금전, 2000년 안구기증협회 사랑 나눔 전시회 등을 하면서 시각장애인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게 익숙해졌지. 무슨 큰 의미가 있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생활이 되니까 그렇게 하게 되더라고."

박 작가는 부친이 그렇게 유명한 일을 했음에도 굳이 그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 않아했다. 마치 '뭘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고 이러나'라는 반문을 하듯 그에게 주어진, 그리고 그를 통해 인연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나누어 주는 것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굳이 부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소탈하고 겸손한 박 작가의 성격이 보인다.

가난 속에 강해진 가족 간의 정 그리고 육아일기

할머니라는 칭호보다는 바람난 청춘이 더 어울린다는 박정희 작가의 모습이 아름답다
 할머니라는 칭호보다는 바람난 청춘이 더 어울린다는 박정희 작가의 모습이 아름답다
ⓒ 이정민

관련사진보기

"지금이야 육아일기가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지만, 1940년대에 다섯 남매의 육아 성장일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기 속의 그림과 글자 하나마다 삶의 기쁨과 환희와 소망, 그리고 한 가족의 작은 역사가 숨 쉬고 있는 다섯 권의 육아일기에는 진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고경옥 이랜드문화재단 큐레이터는 지난 2010년 10월께 있었던 꽃 수채화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는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삶의 긍정의 에너지를 주고 있다고 극찬했다.

박정희 작가는 송암 박두성 선생의 4남 1녀 중 차녀로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온 시부모와 같이 20명이 넘는 대가족을 돌보며 찢어지게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여기서 아픈 사람들은 그가 인터뷰 내내 애인이라고 칭했던 그의 남편이 의사였기 때문이다. 평안 수채화의 집은 그의 애인이 하늘나라로 간 후 먹고살기 위해 다시 간판을 내린 이름이었고, 1950년부터 2000년까지는 평안의원 건물로써 아픈 주민들과 오래도록 함께해준 소중한 병원이었다.

박 작가의 부친도 그러했지만 그의 애인(남편)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그 시절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평생을 부와 명예를 떨쳐버리고 오직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박 작가 또한 소학교 교사를 하면서 교육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갖게 되었고, 집안형편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섯 남매를 훌륭히 키우며 가르쳤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의 내력을 당시 책으로 펴내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결국 유유상종이라는 속담이 있듯, 그의 부친과 남편 그리고 박 작가를 포함한 모든 식구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곁에서 현재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아픔과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시절의 어려움들이 그의 가족을 더욱 강한 유대감으로 만든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꿈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사랑하고 결혼해라

박정희 할머니의 오래된 친구
 박정희 할머니의 오래된 친구
ⓒ 이정민

관련사진보기


박정희 작가의 오래된 친구
 박정희 작가의 오래된 친구
ⓒ 이정민

관련사진보기


박 작가는 인터뷰 내내 화실에 모인 2명의 수강생들과 작은 화분 속에 담긴 꽃 한 송이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는 기자와 인터뷰를 여유 있게 이어가면서도 수강생들이 물어보면 척척 지도까지 해주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오~놀라워라'

독실한 크리스찬 가족으로 성장한 박 작가는 인터뷰 말미 '사랑과 결혼'에 대해 유독 강조했다. 박 작가는 노처녀, 노총각들이 늘어나고 있는 세상이 너무 안쓰럽고 안타깝다고 하면서 "꿈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야 가난해도 좋고, 부유해도 좋고, 행복한 법이여"라며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하며 결혼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라고 강조했다.

"9년 연애한 커플 중에 여자 쪽이 내가 쓴 육아일기 책을 보더니 덜컹 '결혼하자'해서 남자가 총각신세를 면했다고 하더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아니여(웃음)? 자고로 결혼은 해도후회 안해도 후회라고 허지만, 바보같이 결혼을 안 하고 인생 끝난다는 것은 조물주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란 말이여. 만날 수박 그림만 그리고 그 수박은 먹지도 못하면 바보지, 암 바보고 말고. 맛있는 수박을 깨뜨려 먹을 때 비로소 그림이 완성돼는 고야. 기자총각도 그렇게 흔들흔들 날라리처럼 살지 말고, 내 말 명심혀. 하하~"

참 유쾌한 촌철살인이다. 웃음 만면한 유머러스한 말들이 어쩜 귀에 이리도 쏙쏙 박힐까. 천성이 명랑파라는 박 작가의 말마따나 그는 인터뷰 내내 '하하''호호'하면서 소녀 같은 웃음을 흠뻑 보내 주었다. 덩달아 침묵 속에 그림에 열중하던 주변 수강생 아줌마들도 모처럼 신나게 웃고 떠는 시간이었다.

박정희 작가가 직접 그린 평안수채화의 집 1층 정문 모습
 박정희 작가가 직접 그린 평안수채화의 집 1층 정문 모습
ⓒ 이정민

관련사진보기


세상엔 웃을 일이 너무 많다는 박 작가, 하늘에 별만 봐도 좋아 죽고, 잡초 속에 피어난 꽃만 봐도 마음이 설렌다는 박정희 작가는 주말만 되면 수강생들과 함께 인천대공원엘 가서 바람난 청춘처럼 열정과 사랑을 자연 속에 쏟아 붓고 온다고 했다.

2005년 남편은 흙으로 돌아가면서 통장에 100만 원을 남겼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판을 내건 평안수채화의 집은 이제 동구 화평동 거리의 명물로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는 최근 그의 작품 100점을 팔아 현금 2000만 원을 어렵게 마련해 부친의 아호를 딴 송암장학회에 기부했다.

화가 초기 무렵, 종이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 서울 오장동 인쇄소 골목 쓰레기를 모아 그림을 그렸던 그 때가 오히려 더욱 좋았다는 박 작가에게서 어려운 보릿고개를 이겨내고 고된 집안일을 돌보면서도 항상 사랑과 웃음을 보여주었던 어머니의 따스한 향기가 가슴에 전해져왔다.

자식들에게 직접 동화책을 지어 주면서 어느새 유명 작가 반열에 올랐다는 박 작가는 마지막 소망이 있다면 지금처럼 꽃 수채화를 그리며 삶을 마무리하는 것과 틈틈이 써 왔던 원고들을 모아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남겨주고 싶다고 전했다. 그러며 그는 '땅에 뿌리박은 삶'을 살아갔던 헬렌과 스콧니어링의 삶이 담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을 소개하며 인터뷰의 마무리를 장식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 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태그:#평안수채화의 집, #송암장학회, #박정희 작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