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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치료하는 자린 줄 알고 갔는데 어른들 치료한다니까 다들 의무감에 앉은 거예요. 그런데 그 누구도 '내가 치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들 '저는 괜찮아요, 멀쩡해요, 저 형이 받아야지' 했죠. 정혜신 박사님이 이 광경을 쓱 쳐다보고 웃으시는데 '쟤네들은 지들이 아픈 줄도 모르는구나'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았어요."

쌍용차 해고자 신동기(35·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대의원)씨는 다른 7명의 해고자와 함께 집단심리치료를 시작하던 첫날을 이렇게 떠올렸다. 별것도 아닌데 화를 냈다가 '내가 왜 그랬을까' 하기를 여러 번, 극심한 스트레스로 하루에 잠을 3시간밖에 못 자면서도, 어떤 날은 하루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버려도 신씨는 자신이 치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했다. 신씨와 함께 상담치료를 받는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꿈속에서는 아직도 전쟁 중... 자다가 아내 머리채 잡고 흔들어" 

신동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 대의원.
 신동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 대의원.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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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명. 2009년 여름 77일간의 '옥쇄파업'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망한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들의 숫자다.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등이 지난 4월 쌍용차 해고자 193명을 대상으로 정신건강상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노동자는 80%,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노동자는 52.3%에 달했다.

'파업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해고자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지난 3월 26일 8주간의 집단심리치료를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해고자 8명이, 오후에는 해고자 부인 6명이 각각 2시간 동안 집단상담을 받는다. 신동기씨와 함께 치료를 받는 해고자들은 이창근 기획실장, 김득중 조직실장, 고동민 조직부장 등 대부분 신씨와 함께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노조 간부들이다.

정혜신씨는 지난 4월 1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들의 상태를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느낌이 집단적으로 농후한 상태"라고 진단했다(관련기사 : 남편 넥타이로 자기 목 조르는 아내, 무슨 일이?)

심리치료를 시작한 지 6주차. 지난 4일 쌍용차 평택 공장 앞에 있는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신씨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억울하다"였다. 약 2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신씨는 자주 흥분했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파업 끝나고 나서, 자다가 집사람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서 쫓겨난 적이 있어요. 꿈속에서는 아직도 전쟁 중인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트레스 때문에 하루 3시간밖에 잠을 못 잤어요."

파업이 끝난 지 1년 하고도 9개월이 지났지만 신씨의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정리해고 대상자가 아닌 이른바 '산 자'였던 신씨는 "매를 맞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노동자만 매를 맞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맞서 파업에 동참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모르는 그냥 일반 조합원"이었던 신씨였지만 '이걸 포기하면 자식들에게 똑바로 하라고 말 못한다'는 생각으로 도장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함께 살기 위해" 시작한 파업이 끝난 후 신씨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파업 이후 그야말로 '죽은 자'가 되어 좀비 같은 생활을 했다는 신씨는 "식칼을 들고 나가서 작업복 입고 돌아다는 '산 자' 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분노는 있는데 표현할 수 없으니까" 온몸에 휘발유 뿌리기도

신동기씨와 아들 민우(8).
 신동기씨와 아들 민우(8).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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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과 분노로 신씨의 속이 곪아 가는 동안 아내 역시 남모르게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집사람을 쳐다보질 않았어요. 집 사람이 힘들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오늘은 경찰조사, 내일은 재판, 또 그 다음 날은 면회. 내 삶터에서 쫓겨났는데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게 무슨 잘못인지 나는 이해를 못 하겠는 거예요. 매일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한 달 반 정도를 그렇게 돌아다녔어요. 안 미친 게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까 집사람이 우울증이 와 있는 것도 몰랐고. 집사람이 그때 당시에 베란다에서 방충망까지 다 열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집사람이 우는 걸 보고 이러다가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신씨는 2009년 말, 화성의 한 정육점에 취직했다. 돈도 돈이었지만 일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몇 달 있다 그만두고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기자가 "왜 그만두셨어요?"라고 묻자, 신씨가 말했다. 

"억울하니까.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고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억울하니까."

무급휴직자들의 복직을 약속했던 8·6 대타협을 사측이 2년이 다 되도록 모르쇠로 일관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 신씨는 "그렇기 때문에 분노가 더 커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산업은행 앞에서 인도 마힌드라의 쌍용차 매각에 반대하며 노숙투쟁을 할 때는 온몸에 휘발유를 뿌린 적도 있었다.

"이 나라 경찰들이 법에도 안 맞는 잣대를 들이대니까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당신들은 범죄가 우려되니 이 길을 못 간다'. 입 다물고 집에 있으라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처럼 느껴졌어요. 그 비참함에 그랬던 것 같아요. 분노는 있는데 표현할 수가 없는 거예요."

"6주 동안 한 주 빼고 다 운 것 같다"

2009년 8월 6일 밤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본관 5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노사협상 조인식에서 합의문 작성과 교환을 마친 뒤 박영태·이유일 공동관리인, 한상균 노조 지부장, 문기주 A/S지부장이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9년 8월 6일 밤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본관 5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노사협상 조인식에서 합의문 작성과 교환을 마친 뒤 박영태·이유일 공동관리인, 한상균 노조 지부장, 문기주 A/S지부장이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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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난 3월 집단심리상담을 받으면서부터 신씨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6주 동안 한 주 빼고 다 운 것 같아요. 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예요. 그 자리가 고해성사하는 자리 같아요. '나 이렇게 힘들었는데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그러면 정혜신 박사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게 정상이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표현을 해라'. 박사님이 그런 말씀을 한마디씩 해줄 때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위안도 되고."

그동안 복직투쟁을 하는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힘들다'는 말은 일종의 금기어였다. 해고자들끼리 모여서 '웃자, 웃으면서 시작하자' 이러는데 '나 힘든데, 집에 쌀 떨어졌는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서로 보면 웃어야 하고, 힘들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했다.

상담 초기에는 의심스러웠다. '저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왜 이런 이야기를 시키지'. 그런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으면서 누군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놓으면 나도 같이 꺼내놓고, 또 함께 슬퍼하고 울어주면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

"한 번씩 차 타고 가다가 전화가 와서 '누구 누구 탔니' 하면 옆에 누가 탔는지 생각이 안 나요. 차를 타고 가다가 '내가 어디로 가지' 할 때도 있고. 어떤 날은 하루치 기억이 통째로 다 날아가 버릴 때도 있어요.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표현을 하고,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를 하고 화도 내니까 좀 덜해졌어요. 옛날에는 화가 나면 3번만 참자고 했는데 참으면 병이 되더라고요.

정혜신 박사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나쁜 기억을 지우려고 하면 좋았던 기억까지 지워진다고. 생각해 보면 파업 당시 좋았던 기억도 있어요. 서로 믿고 의지하고 우리들만의 세상이었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청소하고, 주먹밥 반쪽이라도 나눠 먹고, 네가 동생이니까 주먹밥 하나 더 먹으라고 챙겨준 형도 있었고, 담배 하나를 따로 남겨두었다가 동생이라고 챙겨줬던 적도 있었고. 그동안은 그때 생각을 안 하려고 했었는데 요즘에는 자꾸 생각을 하려고 해요."

2시간의 상담시간에는 주로 일주일간 있었던 일과 그에 대한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이럴 때 이런 감정이 들었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식이다. 신씨는 "감정이 폭발하고 눈물이 나더라"며 "상담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뒤에서 방청하는 조합원들도 똑같이 울더라"고 말했다.

해고자와 해고자 부인들이 상담을 받는 동안 박혜경씨와 '레몬트리 공작단'이 아이들을 돌봐준다. 오후 상담 시간 동안 신씨는 부인과 함께 손을 잡고 평택시청을 한 바퀴 돈다. 요즘 신씨는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만 생각했는데..."

2월 28일 오전 쌍용자동차 무급휴직자 고 임무창씨 노제에서 한 동료 조합원이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적힌 만장을 들고 있다.
 2월 28일 오전 쌍용자동차 무급휴직자 고 임무창씨 노제에서 한 동료 조합원이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적힌 만장을 들고 있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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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난주 신씨는 심리치료를 빠지려고 했었다.

"면접 보러 가다가 차를 돌려서 돌아왔어요. 평택 항만에서 잡일을 하는 일용직이죠.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면 7만 원, 6시까지 일하면 10만 원. 오전 10시 면접이라 시간 맞춰 가다가 차를 돌려서 정혜신 박사님이 상담하는 자리로 돌아왔어요. 제가 양복을 입고 가니까 다들 물어보더라고요. '어디 좋은 데 갔다 오나 보다. 결혼식 가느냐'고. 그런데 제 속은 그게 아니었어요. 차마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다른 조합원들 걱정도 되고, 나만 떠나가는 것 같고.

상담할 때 '나 진짜 힘들다.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정혜신 박사님이 어제 저한테 '식사나 하자'며 서울에 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여행 갔다 오라고 돈을 주셨어요."

신씨는 "연대조직이 와도, 가족들조차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게 없었다"며 "누군가의 도움이 진짜 내 피부에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다"고 고백했다. 돈을 받는 순간 눈물이 났다는 게다. 이날 신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세상의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따스함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 받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아직 살 만한 세상인 것 같습니다."

신씨는 "정혜신 박사님도 도와주시고, 박혜경씨도 도와주시고, 명진 스님도 도와주시고, 시민 분들도 도와주시고 힘이 난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말했다.

"처갓집에 갔을 때 집사람 큰 아버지가 저한테 빨갱이라고 하시더라고요. 해고되기 전까지만 해도 맏사위네, 신 서방 이러시다가 해고되자마자 빨갱이…. 지난주에 김제동씨가 오셨을 때 그러더군요. 대구 집에서 자고 있는데 김제동씨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야야, 니 빨갱이 아니제' 이러셨다는 거예요. 자는 줄 알고. 그래서 제동씨가 '함께 살자는 게 빨갱이라면, 나는 빨갱이'라고 말하려다가 못했다는 거예요. 제 마음이 딱 그랬어요.

제가 가장 원하는 게 뭔 줄 아세요? 진실이에요. 이 사람들이 빨갱이가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파업하게 됐고, 정당한 걸 했다는 걸 전 국민이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억울한 것, 우리 스스로 해결 못 하면 우리는 빨갱이가 되는 게 맞는 거잖아요. 빨갱이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잖아요."


태그:#신동기, #쌍용차, #정혜신, #쌍용차 해고자, #정혜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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