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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과거와 현재

이베리아 반도 지도
 이베리아 반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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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있는 걸까? 그럼 에스파냐가 맞나, 스페인이 맞나? 이 두 명칭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를 따질 수는 없다. 그 나라 사람들은 에스파냐라고 부르고, 영미 계통의 사람들은 스페인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이 에스파냐라고 부른다면, 우리도 에스파냐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현지 사람들이 쓰는 현지어에 따라 말하고 표기하는 것이 외래어 표기법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는 현재 입헌군주국이다. 이러한 왕국의 토대는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결혼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쳐 1492년 그라나다의 이슬람 왕국을 정복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게 되었다. 792년 동안 이어져 온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1492년은 또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하여 에스파냐의 지배력이 아메리카에까지 이르게 되는 중요한 해이다.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 1세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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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국내외적인 여건을 바탕으로 에스파냐는 제국으로 성장했고, 16세기에는 정치 경제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가 되었다. 당시의 황제가 카를로스 1세(1516-1556)와 펠리페 2세(1556-1598)이다. 이들은 16세기의 전후반기를 나눠 전 유럽의 절반을 통치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이탈리아 남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그리고 체코로 이어지는 합스부르크 왕국, 네덜란드를 지배했다.

그러나 30년전쟁(1618-1648) 후 에스파냐는 점점 힘을 잃게 되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유럽의 패권을 넘겨주게 된다. 1800년 전후 영국과 프랑스가 국가의 통합, 산업화, 민주화, 식민지 확장을 통해 국력을 통일했다면, 에스파냐는 내부적 분열과 식민지 상실로 점점 더 몰락하게 되었다. 1873년 2월에는 자유당이 중심이 된 연방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에스파냐 역사의 현대를 맞이한다.

이때부터 에스파냐에도 산업화가 시작되어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1888년에는 노동자 농민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정당이 생겨났고,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하고 불안해진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혁명파와 분리파 등 여러 정파의 이해가 엇갈려 정치가 안정되지 못했다. 1931년에는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급진주의자로 구성된 내각이 들어섰고, 1936년 총선에서는 우파인 국가전선이 좌파인 인민전선에 근소한 차로 패배하였다.

1939년 시작된 에스파냐 내전
 1939년 시작된 에스파냐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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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1936년 7월에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에스파냐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이 전쟁은 결국 공화주의자와 국가주의자들의 싸움이었다. 프랑코는 독일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의 지원을 받아 세비야 살라망카 등 외곽에서부터 에스파냐를 점령해 들어갔다. 에스파냐 내전은 대량학살과 보복으로 이어졌고, 대표적인 사건이 1937년 4월 독일군의 게르니카 폭격이다. 이 사건이 피카소 그림 '게르니카'의 모티브다.

이 전쟁은 1939년 3월 끝났고, 이때부터 프랑코에 의한 군부독재가 시작되었다. 에스파냐에 민주주의가 찾아온 것은 프랑코가 죽은 1975년이다. 1978년 에스파냐 의회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통과시켰고, 후안 카를로스 국왕, 아돌포 수아레스 중심의 중도우파 정부가 수립되었다. 1982년에는 펠리페 곤잘레스가 이끄는 사회노동당이 선거에서 이겼고, 이후 14년 동안 집권했다.

에스파냐 의회
 에스파냐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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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부터 에스파냐 정부는 우파와 좌파가 번갈아가며 지배하고 있다. 2004년 3월 선거에서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가 이끄는 사회노동당이 승리했고,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에스파냐는 1986년 유럽공동체에 가입했고, 2002년 유럽 공동통화 유로를 사용하면서 유로존(Eurozone)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경제가 안정되었으며, 정치도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2008년부터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2010년 성장률은 1-2% 대에 머물 것이고, 실업률은 10% 내외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재정적자와 성장부진으로 인한 경제위기설이 나돌아 유럽연합 전체를 긴장시키고 있다. 현재 유럽연합에서는 이미 그리스와 아일랜드가 구제 금융을 받았고, 그 여파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로 미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1500년대 이후 내리막길을 간 포르투갈

포르투갈 행정구역 지도
 포르투갈 행정구역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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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현재 포르투갈의 국가신용등급을 Aa2에서 A1으로 낮출 것을 검토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낮은 성장률과 높은 재정적자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현재 남유럽에서 그 정도가 심한 편이다. 포르투갈 정부가 재정적자를 지속적으로 축소하지 않으면 채무를 갚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한다. GDP 대비 부채비율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도 이러한 문제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에스파냐의 국가 신용등급은 Aaa로 1등급이다. 그러나 지방 정부의 등급이 하나씩 하향 조정되고 있다. 중부 카스티야 라만차 지역은 Aa3에서 A1으로, 남부 무르시아 지역은 Aa2에서 Aa3로 낮아졌다. 이들 지방 정부의 공공부채 비율이 2.0%를 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신용등급의 순위는 Aaa, Aa1, Aa2, Aa3, A1, A2이다.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은 현재 A1이다.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있는 바스쿠 다 가마의 무덤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있는 바스쿠 다 가마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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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사람 중 유명인은 누가 있을까? 역사를 아는 사람은 바스쿠 다 가마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1498년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그것이 당시 170만에 불과한 포르투갈 왕국에 경제적인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1500년에는 알폰수 카브랄이 브라질에 도착했고, 1510년에는 알폰수 알뷔케르크가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에 도착했다. 브라질은 이제 인도양과 남반구 대서양의 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탐험은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580년 포르투갈의 왕이던 세바스티앙이 죽으면서 위기가 닥쳐왔다. 아들이 없어 왕위를 승계할 수 없게 되자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2세가 포르투갈 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은 1600년대 들어 인도, 말라카 등 아시아의 식민지를 네덜란드에 뺏기게 되었다. 1640년에는 쥬앙4세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하면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때 포르투갈을 도와준 것이 영국이었다. 그 때문에 1661년 포르투갈은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영국에 넘겨주었고, 1668년에는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포르투갈 역사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은 1755년의 리스본 지진이다. 이 사건으로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식민지 경영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후 포르투갈은 유럽 이류국가로 전락하여 더 이상 정치․경제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1910년 포르투갈은 공화국이 되었으나 정정이 불안했고, 1926년 안토니우 카르모나 장군이 이끄는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경제전문가인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를 중용해 포르투갈의 경제적인 안정과 번영을 이끌었다.

4월25일 다리에서 바라본 리스본: 어두운 경제를 반영하듯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4월25일 다리에서 바라본 리스본: 어두운 경제를 반영하듯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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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치적으로 통제와 검열로 대변되는 독재가 이루어져 여러 번 쿠데타가 있었다. 1976년 의회 선거가 실시되고 새로운 헌법이 통과되었으며, 마리우 수아레스가 이끄는 사회당이 제1당이 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은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이 지속적으로 정권을 잡고 있다. 현재는 사회당과 사회민주당 양당이 정치를 주도하고 있으며, 2005년 이후 사회당의 주세 소크라테스가 수상을 맡고 있다.
   
포르투갈은 1986년 유럽공동체에 가입했고, 이때부터 경제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1993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발효되면서 경제가 약간 어려워졌고, 이후 경기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유럽연합 국가 내의 상품, 서비스, 자본,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조약이다. 2005년 집권한 소크라테스 정부는 과감한 개혁으로 재정적자를 줄이는 한편 경기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성장은 지지부진하고 재정적자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모로코에 대한 지식은 정말 빈약하다

모로코 지도
 모로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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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쉰 세대에게 모로코(Morocco) 하면 생각나는 것은 영화 <카사블랑카>다. 지금 내용의 많은 부분을 잊어버렸지만 안개 낀 카사블랑카 비행장에서 옛 연인 일자(Ilsa)를 떠나보내는 릭(Rick)의 비장한 연기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카사블랑카가 바로 모로코에 있다. 카사블랑카는 대서양에 연한 항구도시로 현재 모로코의 경제중심지가 되었다. 인구도 330만 명으로 모로코에서 가장 많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북쪽 지중해변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나라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아랍어로는 서쪽을 뜻하는 알 마그립(al-Magrib)이다. 그리고 이곳의 원주민이던 베르베르족은 무라쿡(Murakuc)이라 부른다. 모로코라는 영어 명칭은 중세 라틴어 모로크(Morroch)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포르투갈어 모로코스(Morrocos)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모로코는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이 로마와 이슬람 그리고 유럽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역사를 만들어 왔다. 이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이슬람을 가지고 온 아랍인이다. 이슬람은 670년 경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 아크바르 이븐 나피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모로코 최초의 이슬람 왕국은 시아파 지도자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s)에 의해 787년에 세워졌다.

페스의 왕궁
 페스의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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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선지자인 무하마드의 자손임을 주장하며 베르베르족에 기반을 둔 이슬람 왕국을 건설했다. 페스를 수도로 하고 왕국의 통치영역을 대서양과 아트라스 산맥 지역으로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물레이 이드리스 2세가 807년 왕이 되어 이드리스 왕조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는 현재 모로코의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 모로코의 지명과 인명 등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 모로코는 71만㎢의 면적에 3300만 명이 살고 있다. 전 인구의 99%가 이슬람이며 공식적인 언어는 아랍어다. 그러나 프랑스어와 베르베르어가 통용되고 있다. 민족은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로 이들이 전체 인구의 99.1%를 차지한다. 정치는 입헌군주제로 1999년부터 무하마드 6세가 통치하고 있다. 정치중심지인 수도는 라바트로 1912년 페스에서 옮겨졌다.    

세 나라의 공통점

지중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는 세 나라
 지중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는 세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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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세 나라는 792년부터 1492년까지 이슬람 문화를 공유했다. 물론 지역에 따라 그 기간이 길고 짧기도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와 모로코는 한때 이슬람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당시 이슬람문화는 세계 최고의 선진문화였다. 자연과학과 수리학, 천문학 등에서 유럽을 훨씬 앞서 갔기 때문이다. 또한 인문학의 기초인 종교 역시 정신적인 면과 교육적인 면에서 상승작용을 했다.

그들의 높은 문화수준은 무어왕조의 수도였던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도시의 설계와 궁정건축 그리고 모스크 등에서 우리는 무어인의 앞선 기술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또한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통해 다른 종족의 사람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개발해 나갔다. 그 결과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던 무어인들은 훨씬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좀 더 훌륭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지금도 무어인들에게 배운 금세공술, 치수기법, 기초의학 등은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페스의 가죽 무두질 공장
 페스의 가죽 무두질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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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양가죽을 이용한 피혁제조 및 천연염색기법은 지금도 모로코를 따라갈 수가 없다. 페스에서는 천연염료를 이용, 노란색, 빨간색, 파랑색, 초록색, 검정색 가죽을 만들어낸다. 이들 가죽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디자인과 결합, 고급 가방과 의류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15세기까지 모로코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며 영향을 끼쳤다면 16세기부터는 오히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모로코에 영향을 끼치고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도 모로코 북부의 지중해변 도시 세우타는 에스파냐령이다. 그리고 대서양 연안의 도시인 카사블랑카, 라바트, 탕헤르 등은 경제시스템과 생활방식이 상당히 서구적이다.    


태그:#에스파냐, #포르투갈, #모로코, #문명교류, #경제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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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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