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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긋불긋,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다
▲ 오래된 성문 울긋불긋,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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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그러니까 고리키라고 알고 찾아갔지만 열차표에는 니즈니노보고로드라고 적혀있었던 볼가 강변의 그 작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아내와 난 러시아의 어느 기차역에서건 볼 수 있었던 레닌과 그의 노동자 친구들의 거대한 벽화를 지나 역사 앞마당으로 나섰다. 5월 러시아의 찬바람이 몰려왔다. 추위, 자정 그리고 낯선 도시. 사실 이런 상황에서 여행자는 충분히 당황스럽다.

하지만 러시아는 예외다. 기차역에서 운영하는 여행자 숙소가 대체로 싸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가 잠잘 곳을 구하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평화로운 법 아니던가.

게다가 시베리아 여행의 첫 기착지였던 그곳에서 우린 뜻밖의 행운을 건졌다. 프런트 앞에 선 시각이 12시 10분, 직원은 러시아에선 자정이 넘는 순간부터 체크아웃시간은 그 다음 다음날 낮 12시로 연장된다고 일러준다. 즉, 하루 요금으로 이틀 밤을 지낼 수 있다는 뜻이다.

고리키의 도시로 흐르는 강
▲ 볼가강의 낙조 고리키의 도시로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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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낯선 도시에서의 여행이 시작됐다. 다음날 아침 대학시절 우리들 가슴을 뜨겁게 했던 그 사람, <어머니>의 작가 막심 고리키를 찾아 나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이 레닌그라드였듯이 한때 이 도시의 이름은 고리키였다.

어린 시절 그가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모와 살았다는 작은 나무집 그리고 30대에 글을 쓰고 살았다는 그의 박물관, 어느 곳도 한 도시의 이름이 되었던 사람의 흔적이라 하기엔 너무 소박했다. 그래서 조금 쓸쓸했다. 지금 그의 소설을 읽는 이가 흔치 않듯이 이제 이름이 바뀐 이 도시에서 그를 기억하는 이도 점차 사라져갈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사이 우린 점점 이 도시 자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곳엔 러시아에서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 다 있었다.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는 트램(시내 주행 전차), 너무 화려해서 유치하고 그래서 더 예쁘던 양파지붕의 교회들, 쓸쓸하고도 고결해 보이던 오래된 나무집들, 언덕 아래를 흐르던 강…….

아, 그리고 그 강 너머 자작나무 숲을 온통 파랗고도 붉은, 도저히 이 세상의 색감으로 표현할 수 없을 빛깔로 물들이던 저녁놀. 그 순간 우리는 인정해야만 했다. 하루 이틀만 묵고 떠나려던 애초 일정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흐르는 강물을 가로채는 손길...
▲ 소녀의 화폭 흐르는 강물을 가로채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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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할머니의 미소
▲ 꽃을 사랑하는 러시아사람들 화사한 할머니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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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강을 한 눈에 볼 수 있게끔 언덕 위에 위엄 있게 세워진 고딕형의 '소비에트식'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그리곤 강을 따라 걸으며 그곳에서 가장 러시아답다고 할 만한 풍경을 만났다. 강가에서 이젤을 펼쳐두고 그림을 그리는 소녀.

세계 여러 나라를 오래 돌아다니다 보면 어떤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질 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삶을 즐기며 사는 민족이 러시아와 터키라는 생각이다. 러시아의 어느 소도시를 방문해 보면 알 수 있다. 그 어디라도 품격을 갖춘 고전극장이 하나쯤 있고 공연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사람들로 꽉 들어찬다.

그곳에서 발레공연을 본 적이 있다. 시골 마을 할머니들이 곱게 옷을 차려입고 극장 앞에 줄을 서있는 모습, 세상에서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흔치 않으리.

나는 조용히 어깨 너머로 소녀의 그림을 훔쳐보았다. 화폭의 중심에는 강이 흘렀고 그 강을 따라 화물선이 떠가고 있었다. 강 건너엔 자작나무들과 굳이 그리지 않아도 좋았을 공장건물들이 삐죽삐죽 드러나 있다.

그런데 왜일까. 그녀의 그림은 내 눈에 보이는 실제 풍경보다 어쩐지 더 쓸쓸하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없기 때문일 테다. 작은 의자에 앉아 러시아의 오늘과 한 소녀의 내일을 그려가는 그녀가 화폭에는 보이지 않기에.

어제도 오늘도 언덕을 오르는 트람
▲ 트람과 양파지붕 어제도 오늘도 언덕을 오르는 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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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트램을 탔다. 하지만 우린 구시가지에 이르기 전에 트램에서 내렸다. 언덕길을 걸어 오르고 싶어서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언덕길 옆으로 예쁜 양파지붕의 교회가 지나간다. 그리고 꽃을 파는 할머니. 유난히 러시아에는 거리에서 꽃을 파는 이가 많다. 물론 사는 사람도 많다.

어느새 구시가지 중앙광장에 이르렀다. 무슨 일일까. 도시가 술렁거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이 전쟁기념일이다. 전쟁이 아니라 마침내 전쟁이 끝난 날을 기념하는 날, 전장에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던 날 말이다.

그 옛날 군복을 꺼내 입고 왼쪽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늙은 용사들이 늙은 아내의 손을 잡고 자랑스레 거리를 활보했다. 현역 장교들 손에 매달려 사진을 찍고 있는 아이들의 볼이 5월 러시아의 찬바람을 맞아 발갛게 달아올랐다. 광장 한 편에선 댄스경연대회가 벌어졌는지 군복 입은 군인들이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젊은 여성댄스그룹이 등장하기도 했다.

가장 인기 있는 건 탱크였다. 아이들은 지금은 유물이 되어 서 있는 탱크를 오르내리며 놀고 있었다. 탱크의 포신은 볼가 강을 향해 있었고 아이들의 웃음은 여기저기로 흩날렸다.

'저 아이들에게 탱크는, 그리고 전쟁은 무엇일까.'

러시아가 헤쳐 왔던 그 굴곡 많았던 시간들이 그이들에겐 또 어떻게 기억될까. 우리는 니즈니노보고로드의 언덕위에 서서 아이들과 함께 잊혀져가는 고리키를 위해 한 송이 꽃잎을 뿌렸다. 아마도 저 볼가 강이 실어다 주리라….

탱크도 장난감이 되련만...
▲ 전쟁이 완전히 끝나면... 탱크도 장난감이 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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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금 연재 중인 기사는 2003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아내와 함께 967일 동안 세계 47개국을 여행한,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때 만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예담)로 출간했지만,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그동안 월간 <행복한 동행>에 연재해 왔는데, 이를 다소 수정하고 덧붙여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러시아, #배낭여행, #길은사람사이로흐른다, #고리키, #볼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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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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