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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가 있었다.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자극적인 표어들이 새마을기가 펄럭이는 담장에는 어김없이 붙어 있었다. 못 먹고 못사는 길을 벗어나는 절대 조건은 산아제한에 있다고 라디오에서 광고처럼 매일 흘러 나왔다. 자식수가 많음은 미개의 상징이고 핵가족 제도는 서양에서 본받아야 할 가장 우수한 가족 형태라 교육 받았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본격화된 저출산 정책은 그 후 오랜 정치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민방위 훈련장에서 정관 시술을 하면 남은 훈련 시간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시행하여 왔다. (필자가 민방위 훈련을 받던 2000년 초반에도 이 제도가 시행되는 걸 본 적이 있다.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다.) 그때 '핵가족 제도', '하나만 낳자'를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교육 받은 세대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있다.

한 세대 뒤도 예상하지 못한 인구정책

이명박 대통령이 25일 오전 서울 광진구 서울여성능력개발원에서 열린 미래기획위원회 제6차 보고회에 참석, 저출산 극복을 위한 대응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5일 오전 서울 광진구 서울여성능력개발원에서 열린 미래기획위원회 제6차 보고회에 참석, 저출산 극복을 위한 대응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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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오늘. 그동안 정부 정책에 충실한 호응해서인지, 먹고사는 문제에 지나치게 가위눌린 것인지 인구는 현격히 줄어들고 있다. 몇 달 전 통계청은 2050년이 되면 인구가 지금보다 700만 명 감소하고 10명 중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4명에 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저출산 정책을 시작한지 40여 년.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세계 최하위권 출산율로 다시 '하나만 더 낳자'라는 정책으로 급선회해야 하는 절박한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절박함의 반영일까? 지자체들이 나서서 하나 낳으면 얼마, 둘째는 얼마, 셋째는 얼마 하며, 마치 슈퍼마켓에서 경품 내걸 듯이 장려금을 내걸고 출산을 독려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25일 '저출산 대응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입학연령을 낮추고 3자녀 이상 가산점 부여 등 내걸고 대학 입시와 취업에서 우대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가 설익은 정책들을 발표할 때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오히려 답답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아이를 낳아야 할 20~30대 신혼부부들은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한 명도 힘들어 죽겠는데 돈 몇 푼 받자고 둘째, 셋째 낳으라고요? 하나는 선택, 둘째는 사치, 셋째는 부의 상징이라잖아요."

첫 아이를 낳은 후배들에게 "더 낳을 거냐"고 물으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이런 대답들이 돌아온다. 그럴 때면 '괜한 이야기를 꺼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위화감만 조성하는 지자체 저출산 대책

사실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내거는 출산 지원금 정책을 보면 국가 차원에서 출산 정책을 지원한다기보다는, 이웃 지자체에서 인구를 빼와서 숫자를 채워 놓고 보자는 땜질 처방이라는 느낌만 든다. 이런 방식은 지자체 간에 위화감만 조성할 뿐이다. 더구나 '있는 동네와 없는 동네는 사람값도 다르냐'는 조롱이나, '진골과 성골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는 지자체 출산 지원금 제도가 왜곡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지자체보다 지원금을 많이 내건다고 해서 사는 곳을 옮겨 아이를 낳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고 한들 국가적 출산 장려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정부에서 진행하는 정책 역시 임신과 출산의 동기 부여를 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 이벤트성 행사에 치우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2009년 6월 9일 '아이낳기 좋은 세상 운동본부' 출범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은 '아이는 자기가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옛 속담을 인용하며 출산 장려를 했다고 한다. 이런 속담이야 손자가 빨리 태어나길 바라는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할 이야기지, 국정 최고 책임자가 출산 장려를 하는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지난 6월 9일 오후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아이낳기 좋은세상 운동본부' 출범식에서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다문화 가정, 다자녀 가정, 입양 가정, 맞벌이 부부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6월 9일 오후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아이낳기 좋은세상 운동본부' 출범식에서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다문화 가정, 다자녀 가정, 입양 가정, 맞벌이 부부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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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시대에 삼신 할미의 역설을 대통령이 이야기한 것은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덕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다둥이 카드를 만들고 보육료를 대폭 지원한다고 발표하고 있는데,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한계가 뻔히 보이는 이런 정책들은 출산 동기를 유발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아이를 낳아야 할 젊은 부부들이 사탕발림식 정책에 호응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권의 착각이고 나라의 불행이다.

환경다큐멘터리에서 주변 환경에 따라 후세대의 번식을 제어하는 동식물 이야기를 보고 신기해 하곤 했다. 날씨가 너무 춥거나 땅이 지나치게 메말라 먹을 것이 없으면 출산을 미루는 동물도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이러한 자연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2010년을 앞둔 대한민국은 아이를 마음 놓고 낳고 키울 수 있는 환경, 아이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 줄 여건도 갖춰지지 않았는데(아니, 오히려 점점 더 열악해지는 마당에),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먹을 것 다 가지고 태어난다'는 식의 대통령 발언은 여전히 보육과 교육의 책임을 가정으로 전가하는 책임 회피로 보인다. (물론 이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부자감세와 4대강 사업에 예산을 대폭 지원하는 모습을 보면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

아이 셋 낳은 난 '미련 곰탱이' 인가

얼마 전 국책연구기관인 KDI에서 2010년 한국 경제 성장률이 5.5%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치를 내놓았다. 극심한 경기 침체, 불안한 고용으로 막장의 위기에 내몰린 서민들에게는 우선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서민들의 손과 발은 꽁꽁 얼어있다. 재래시장은 여전히 썰렁하고 '점포임대'란 문구가 붙은 빈 매장이 넘쳐난다. 경기가 나아진다고는 하지만 비정규직은 오히려 늘어났다고 한다. 임금 인상은커녕 잘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게 서민들이다.

허리띠를 아무리 졸라맨들 올라버린 물가에, 공공요금에 가계는 적자의 연속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소득이 1.4% 줄어 4분기 연속 감소를 나타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출은 같은 시기보다 1.4% 늘어났으며 하위 20% 가정의 월 가계적자가 평균 41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처지에 놓인 서민들에게 둘째 아이, 셋째 아이는 사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 비참하지만 현실이다.

나는 딸이 셋이다. 셋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 반응은 다양했다. "로또 맞았어요?" "벌이가 괜찮은가 봐요?"라는 점잖은 걱정부터 "술 마시고 사고 쳤어요?"라는 농담 섞인 핀잔까지. 아들 딸 구별 없이 세 명 정도 낳고 싶었다는 것이 우리 부부의 같은 생각이었다고 설명해도 '세상물정 모르는 미련 곰탱이, 어떻게 키우려고' 하는 걱정어린 눈길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 내 주변에서 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둘째도 벅찬 마당에 셋째 출산을 세상 물정 모르는 '미련 곰탱이'들이 하는 짓이거나, 먹고사는 데 아무 불편 없는 사람들이 부를 자랑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등록금 대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전국네트워크(등록금넷) 회원들은 6일 오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공개된 기획재정부의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 시행방안'을 통해 이명박 정부가 '돈이 없어도 능력만 되면 등록금 걱정없이 대학 다닌다'는 홍보가 거짓이라고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등록금넷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누더기'가 된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 시행 방안' 폐기할 것을 요구하며, 고등교육예산확충, 등록금 상한제가 결합된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 도입을 촉구했다. 기자회견 마지막 순서로 참석자들이 이명박 정부의 등록금 대책에 낙제점을 주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등록금 대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전국네트워크(등록금넷) 회원들은 6일 오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공개된 기획재정부의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 시행방안'을 통해 이명박 정부가 '돈이 없어도 능력만 되면 등록금 걱정없이 대학 다닌다'는 홍보가 거짓이라고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등록금넷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누더기'가 된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 시행 방안' 폐기할 것을 요구하며, 고등교육예산확충, 등록금 상한제가 결합된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 도입을 촉구했다. 기자회견 마지막 순서로 참석자들이 이명박 정부의 등록금 대책에 낙제점을 주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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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4학년인 큰아이가 기말고사를 잘 봤다며 맛있는 걸 사 달라고 했다. 과외 한 번 시키지 않은 아이가 대견해서 양념통닭을 시켜먹으면서 나는 아내에게 아이와 아버지의 능력이 너무 차이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아이의 학력과 그 아이를 뒷받침할 부모의 재력이 현격히 차이가 난다면, 남들 다 간다는 대학, 아이보다 부모가 능력이 안 되어서 못 간다면 그 낭패감은 또 어찌할 것인가?

그런 우려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2008년 민주당 안민석 의원실에서 내놓은 '대학 등록금 경감 방안에 대한 정책 연구'라는 자료에 따르면 큰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는 2018년은 사립대 기준으로 1년 등록금이 1400만원을 넘어서며 4년 전체 등록금은 6천만원을 넘는다. 앞으로 10년, 나의 수입이 비정상적이고 폭발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면 2018년 큰아이의 대학 입학은 가정의 축복이 아닌 위기가 될 수도 있다. 거기에다가 둘째, 셋째의 교육에 대한 뒷받침까지 생각한다면 나는 가족 계획이 제로인 '곰탱이' 같은 가장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은 교육분야에서 특단의 대책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시민단체에서 요구해왔던 등록금 후불제를 전격 도입하기로 했다. 환영할 만한 정책이다.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 큰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는 2018년에 1년 등록금이 1400만원이나 되는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다. 정부의 정책대로라면 부모가 등록금 댈 능력이 없으면 아이에게 책임을 떠 넘길 수밖에 없다. 졸업과 동시에 6천여만 원의 빛쟁이가 된 딸.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등록금 후불제는 등록금 상한제와 함께 추진돼야 빛을 발할 수 있으며 서민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국가 존망의 위기라면 거기에 걸맞은 처방 있어야

저출산 대책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정부가 늦게나마 위기 의식을 가지고 대응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쏟아진 관련의 정책들을 보면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해서는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 한 명도 키우기 힘든 상황인데, 얼마 되지 않는 돈 받자고 누가 셋째까지 낳을 것이며, 셋째 아이 대학 등록금을 지원한다는 걸 보고 누가 세 자녀를 생각하겠는가? 첫째를 낳아 아무 걱정 없이 보육과 교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이면 둘도 낳고 셋도 낳을 수 있다. 아이 하나도 의무 반, 주변의 강요 반으로 낳아서 힘들게 키우고 있는 부모들. 저임금, 불안한 고용에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 서민들에게 둘째 아이, 셋째 아이에게 집중되는 저출산 대책은 그림의 떡일 뿐, 전혀 실효성이 없다.

문제는 아이를 낳고 제대로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10년, 20년 후 비전이 있어야 한다. 대규모 비정규직 양산과 저임금, 일상처럼 되어 버린 야근, 대자본에 밀려 추풍에 낙엽 신세인 영세 자영업자들의 처지, 끝간 데 없이 오르는 교육비,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없이 쏟아내는 저출산 대책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혹자들은 그런다. 너무 큰 문제들이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다고.

그러나 정치권에서조차 나라의 존망을 이야기해야 할 만큼 위기라고 한다. 그럼 거기에 걸맞은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대통령의 농담처럼 쉰 살을 넘긴 장차관들이 아이를 낳을 수도 없다. 몇 억대 부자들이라고 아이를 열 명, 스무 명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출산 문제에 있어서 시간은 대한민국의 편이 아니다. 27일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다. 단기적이고 단편적인 처방보다는 과감하고 직접적인 저출산 대책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태그:#저출산 대책, #국민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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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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