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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들어가 물질을 하는 장면이다.
▲ 바다로 들어가는 해녀들 해녀들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들어가 물질을 하는 장면이다.
ⓒ 해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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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회는 19일 오후 2시 제264회 임시회 제5차 본회의를 열어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부의된 42개 안건을 상정하고 이들을 의결했다. 이날 부의된 안건들 중에는 최근 전국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조례안 한 건도 포함돼 있었다. 오옥만 제주도의회 의원이 대표 발의해 지난 7월 6일 입법 예고한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문화보존 및 전승 조례안'이 그것이다.

제주도의회는 이 조례의 입법취지를 '해녀문화를 지속적으로 보존·전승시키고, 유네스코(UNESCO)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여, 소중한 제주해녀문화를 문화·역사적으로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례는 우선 '제주도해녀문화보존및전승위원회'를 신설하도록 했다. 신설된 위원회는 해녀문화 보존 및 전승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고 해녀문화 전수생을 선발해 육성하는 일을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해녀문화를 홍보하기 위한 '해녀의 날'을 도지사가 지정하도록 명시했다.

1931년에 조사된 제주도내 해녀의 수는 대략 1만 5천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5천여 명 밖에 남아있지 않다. 당시에 비해 현재 제주도 인구가 3배 정도 증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감소폭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5천여 명의 해녀들도 환갑을 넘긴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거친 제주 바다, 그곳엔 해녀가 있었다

해녀들이 장비를 보관하고 함께 일을 하는 곳이다. 현씨가 들고 있는 것은 퇴악과 망사리다. 희고 둥근것이 퇴악인데 해녀들은 물질하면서 틈틈이 퇴악의 부력에 의지해 숨을 돌린다. 망사리는 채취한 해산물을 보관하는 그물 주머니다.
▲ 공동작업장 해녀들이 장비를 보관하고 함께 일을 하는 곳이다. 현씨가 들고 있는 것은 퇴악과 망사리다. 희고 둥근것이 퇴악인데 해녀들은 물질하면서 틈틈이 퇴악의 부력에 의지해 숨을 돌린다. 망사리는 채취한 해산물을 보관하는 그물 주머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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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상자 등에다 지고

가슴 속에 두렁박 차고
한 손에는 빗창을 쥐고
한 손에 낫을 쥐고
한 길 두 길 깊은 물속
허우적허우적 들어간다

해녀들이 불렀던 노래의 가사다. 해녀들에게 바다는 늘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소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혼백상자)과 삶을 향한 의지(두렁박)를 동시에 품고 허우적거린다는 노랫말 속에는 고단했던 해녀들의 삶이 잘 녹아있다.

해녀들을 위협하는 것은 거친 바다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제주도 해녀들은 수탈의 대상이었다.

17세기 광해군 복위모의에 가담한 부친 인성군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되었던 이건(李建)이 남긴 <제주풍토기>에 해녀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채취한 해산물을 관가에 바치는 역에 응하고 그 나머지는 팔아치워 생계를 잇는다. 그 생활의 궁핍함은 말할 수 없는 정도다. 만일 청렴치 않은 관리가 있어 탐욕스러운 마음이 생겨 명목을 교묘히 만들어 거둬들이면 한이 없음으로 1년 작업한 바로도 그 역을 응할 수 없다.'

이건에 앞서 15세기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기건(奇虔)은 전복을 따며 괴로워하는 해녀들의 모습을 보곤 밥상에 전복을 올리지 못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훗날 청백리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일제 수탈에 맞서 구좌면사무소와 세화주재소를 습격해 도사와 일경을 벌벌 떨게 했던 해녀들의 항일투쟁은 제주도 항일투쟁사에 가장 빚나는 기록으로 남는다. 그리고 제주4·3 와중에 남자들이 거의 전부 몰살당한 북촌리나 토산리의 경우, 이들 마을을 재건해서 부자마을로 부흥시킨 것도 해녀들이었다. 오랜 기간 척박한 환경과 수탈에 맞서 싸우면서 길러진 해녀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흘러간 옛 이야기가 돼 버린, '20대 해녀 아가씨'

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에서 태어나 이 마을에 살고 있고 마을 부녀회장을 7년 간 역임했다.
▲ 해녀 현정남씨 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에서 태어나 이 마을에 살고 있고 마을 부녀회장을 7년 간 역임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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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에 살고 있는 해녀 현정남(56)씨를 만났다. 신천리에는 현재 60여명의 해녀가 남아 있는데, 현씨는 이 마을 해녀들 중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젊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20대 젊은 해녀아가씨는 이제 흘러간 옛이야기 속 주인공일 뿐이다.

현씨는 신천리에서 자라서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동네 총각과 결혼해서 신천리에 눌러 살고 있다고 했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결혼해서 신천리에 살고 있고, 큰 딸은 부산으로 시집을 갔다. 남은 두 딸은 시내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집에 남편과 현씨 둘만 살고 있다.

"결혼 전에 물질을 배웠으니 물질한 지 40년 쯤 되었어요. 애들 아빠는 농사를 짓는데, 예전에는 농사 수입보다 물질 수입이 훨씬 나았어요. 그걸로 아이 네 명 학교도 보낸 것이고."

해녀들은 조석주기를 감안해서 9일 물질하고 6일 쉬기를 반복한다. 한 달에 최고 18일간 물질을 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날씨가 험한 날은 위험해서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마을에 경조사가 있는 날은 해녀들이 모여 단체로 마을 일을 거든다.

현씨는 바다에 백화현상이 발생해 채취할 해산물이 매우 부족하다고 말했다.
▲ 신천리 해안 현씨는 바다에 백화현상이 발생해 채취할 해산물이 매우 부족하다고 말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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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0월부터 연말까지는 금채기간이라 소라·전복·성게 등을 채취할 수 없어 이때는 밭일을 나가거나 바다에서 주로 고동만 잡는다.

"5월 한 달 간 해녀들이 성게를 채취하게 되는데, 일 년 중 수입이 가장 좋을 때예요. 예전에는 하루 수입이 정말 많았는데."

예전에 수입이 많았다는 말 속에는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는 아쉬움이 담겨있다.

"바다에 백화현상이 발생해서 해산물들이 잘 자라지 못합니다. 수산청에서 어린 소라나 전복을 바다에 방사해도 바다 속에 풀이 없으니 먹이가 부족해서 이것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거예요. 몇 해 전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양어장이 신천리에만 19군데예요. 게다가 하천을 정비한다고 하천폭을 크게 넓혀놓으니 한 번 비가 오면 함께 떠내려 온 흙탕물이 연안을 뒤덮어서 3일 동안은 물질을 할 수가 없고 어장도 말이 아니게 훼손됩니다."

'해녀문화조례'가 쓸쓸하게 보이는 이유

해녀들이 작업하고 난 소라와 게의 껍질들이 가루가 되어 해안에 쌓여있다. 해녀들 경제활동의 증거다.
▲ 해산물 껍질들 해녀들이 작업하고 난 소라와 게의 껍질들이 가루가 되어 해안에 쌓여있다. 해녀들 경제활동의 증거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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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해녀들은 오랜 잠수생활로 인해 대부분 지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해녀들의 암이나 골다공증 검사에 드는 비용 전액과 뇌시경 검사를 하는 비용의 절반을 제주도가 지원하고 있다.

현씨는 물질에 대해 갖는 자부심이 크다고 했다. 가난했던 시절 물질이라도 했으니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살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이제 물질을 배우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연안 어장은 황폐화되어 남아있는 해녀들의 생활기반 마저 점점 좁아만 간다.

"옛날과 달리 씀씀이가 커진 세상이잖아요. 이제 우리 부부만 사는 처지라고 해도 마을 경조사도 돌봐야하고 손주들 용돈도 줘야하고 동네 아줌마들과 노래방도 가려면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시간나면 남의 밭일도 도우려 가는 겁니다. 어떤 때는 식당 같은데서 설거지를 해볼 생각도 드는데, 스스로 물질하며 벌어 써봤기 때문에 주인 눈치를 보며 일하는 것은 내키지가 않아요."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아 제주에서 해녀들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해녀들이 사라지게 될 때를 대비해 그 문화만이라도 잘 기록하고 전수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해녀문화조례가 쓸쓸하게만 보인다.


태그:#해녀문화,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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