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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포대를 잔뜩 실어 나르는 남자
 자전거에 포대를 잔뜩 실어 나르는 남자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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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즈의 행정수도 벨모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길옆으론 짙은 녹음이 우거지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회색 아스팔트만이 점 하나로 보일 때까지 한 획으로 뻗어있어 이보다 더 무료할 순 없었다.

아침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으니 대충 지도를 보고 점심 먹을 곳을 선정해 두었는데 막상 와 보니 마을이라고 하기엔 단지 몇 채의 가옥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무심코 지나칠 순 없었다. 당장 심한 허기를 느꼈고 다음 마을까지 또 20km는 더 가야했다.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곳에서 나 같은 얼뜬 여행자를 상대로 장사하는 것 같은 서너 채의 식당이 보였다. 그게 마을의 대부분 가구였다. 허름하기 그지없었으나 선택의 여지도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식당들을 훑어보던 난 흐뭇한 미소로 구석에 위치한 곳으로 마음을 정했다.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혼자인 까닭에 밥을 먹는 것조차 음울해야 한다면 식욕도 떨어질 듯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멀리서부터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더욱 반가운 마음에 아이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 얘들아."

아이들은 내 인사에 쑥스럽게 대꾸하더니 몇은 엄마에게 뛰어가고 이제 갓 걸음마가 익숙해진 두 명의 아이만 어찌할 바 모르며 그저 신기한 듯 웃기만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생각보다 훈훈할 것 같지 않다는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다섯 살 난 꼬마 녀석과 네 살 난 녀석의 동생이 계속 이죽거리는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두 명은 엄마 옆에만 붙어있어서 못 찍었다. 이 중 나를 괴롭힌 범인(?)이 있다.
▲ 이야기 속 아이들 두 명은 엄마 옆에만 붙어있어서 못 찍었다. 이 중 나를 괴롭힌 범인(?)이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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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핸들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런데 아이들은 무슨 몹쓸 것을 본 마냥 소리 지르며 격렬한 '안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불과 네 다섯 살 먹은 꼬마들이 그렇게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두 세 살짜리 애들도 얼떨결에 따라한다는 것이다.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정말 싫어하는 게 아니라 군중심리에 휩쓸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들의 요구사항을 들었다.

"여행자야 여행자야 사진기를 들지 마라~
사진기를 들려거든 5달러를 내놓아라.
여행자야 여행자야 사진기를 들지 마라~
사진기를 들려거든 우리 집 밥 사먹어라~."

이건 뭐 선거운동 하는 줄 알았다. 조그만 아이들이 손가락 5개를 쫘~악 펴며 이구동성으로 노래한다. 한두 번 솜씨가 아닌 잘 짜진 연극 무대 같았다. 서글서글한 눈망울의 어린 아이들 입에서 돈을 요구하는 게 얼마나 역겹고 소름끼치는 줄 아는가. 역시나 조그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체 그저 언니들을 따라 하기만 한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나와 가장 가깝게 교제한 아이. 눈망울이 예쁘다.
 나와 가장 가깝게 교제한 아이. 눈망울이 예쁘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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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웃고만 있을 뿐 제지할 생각도 않는 여자는 더 기가 찼다. 그러면서 거드는 건지 뻔히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들려준다.

"아이들이 사진 찍으려면 5달러 달라네요, 호호호."

밥맛이 최동원 커브처럼 뚝 떨어졌다. 그래서 나와 버렸다. 설마 잡을까 했는데 아이들은 무심코 바라보기만 한다. 갈려거든 미련 없이 가라는 듯이.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되돌아와야만 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아이들과 이대로 헤어지는 건 나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을 성 싶어서다.

처음 위치에 선 나는 아까 아이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했다. 5달러 대신 식사를 주문했다.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 주동자인 한 녀석은 별나게도 돈에 대한 집착을 보이며 이래저래 참견이 많았다. 자꾸 사진기를 가리키며 5달러를 주지 않으려거든 가방에 도로 넣으란 것이다.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묘안을 짜냈다. 난 어쩐지 괘씸한 녀석을 빼고는 다른 아이들에게 돈보다 더 소중한 걸 보여주기 위해 마음을 열고 접근했다. 남자 청년이 언제 이렇게 놀아준 적이 없어줄 정도로 안아주고, 바이킹 태워주고(아이를 안은 채 앞뒤로 흔들기), 슈퍼맨 놀이(공중으로 살짝 던졌다 다시 잡는 것) 시켜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효과가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어느 새 내 편이 되어 있었다. 자기 차례가 한 번 끝나면 돌아가면서 줄을 서서 계속 놀아달라며 두 팔을 펼쳤다. 남자 아이들도 대놓고 달려들었다. 또 사진을 찍을 때에도 어느 틈엔가 렌즈 앞에 와 있었다. 그렇게 신나게 놀고 있었더니 어느 틈엔가 그 얄미운 녀석도 슬며시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다.

하늘, 숲, 도로가 풍경의 전부인 나라.
▲ 벨리즈 자전거 여행 하늘, 숲, 도로가 풍경의 전부인 나라.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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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선택받은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가난을 보상심리로 이용하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두세 살 먹은 아이들은 언니들의 못된 버릇을 보고 배우니까 영문도 모른 채 외국인이 오면 일단 손부터 벌리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동심이 너무 일찍 멍드는 건 아닌가' 답답한 가슴으로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식사를 받은 난 허무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삐쩍 마른 닭튀김 4조각에 방금 튀겼음에도 기름기 담뿍 먹어 축 늘어진 조악한 감자튀김 몇 개 넣어놓고서는 5벨리즈 달러나 받는 것이다. 도저히 '안 땡기는' 것을 그래도 배는 채워야겠다며 콜라 한 병 시켜 억지로 우겨 넣었다.

자기 집의 식사를 팔았다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것일까. 아이들은 사진을 찍든, 밥을 팔든 어쨌거나 돈을 받아내긴 했으니 협상은 성공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새 내 자리에서 차갑게 멀어져 있었다. 그래도 내 옆엔 하얀 옷을 입은 두 살배기 녀석만이 식사 하는 내내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었다. 아까 놀아줄 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가장 많이 내 품에 달려든 녀석이었다. 가장 많이 웃음을 보여주던 녀석이었다. 내가 식사를 마치고 자전거 위에 앉을 때에도 끝까지 바라봐주던 녀석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사랑받지 못함보다 사랑할 수 없음이 작고 작은 나의 마음을 더욱 작게 만든다고 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때 부디 큰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게 되기를….

약물 오남용 방지를 위한 캠페인 광고
 약물 오남용 방지를 위한 캠페인 광고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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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벨리즈, #비전트립, #자전거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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