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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살던 후정리 평산신씨네 맏며느리

 

"스물일곱에 중매로 결혼해서 서울서 부평으로 처음 내려왔을 때 이 일대가 다 논과 밭이었어요. 그때 전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왔더니 다들 과년한 처자라고 하더군요. 방직산업이 호황을 누릴 때라 서울에서 나름대로 직원들 데리고 의류를 제작해 수출업자를 통해 판매할 때 결혼해서 내려왔는데 여긴 수돗물도 없던 그야말로 시골이었어요."

 

올해로 예순 여덟인 부평구 삼산동 김영자 할머니는 그렇게 부평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가 시집을 온 삼산동은 당시 후정리라는 마을이었다. 마을에 우물이 세 개 있었는데 다들 그곳에서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할 때다. 지금은 삼산1동 미래타운과 삼산2동 삼산타운 등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으나 그 때는 이 지역 곡창지대나 다름없었다.

 

현재 경인운하 사업 예정지인 굴포천방수로가 만들어진 굴포천은 한강에서 이곳 후정리(삼산1동)와 갈월리(갈산동)까지 흐르면서 농수로로 이용된 곳이다. 이 굴포천이 범람하면 홍수가 발생해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서해로 물을 빼기 위해 굴포천방수로를 조성한 것이다.

 

굴포천을 중심으로 현재 부평구 삼산동에 농수로인 서부간선수로가 있었고, 부천에 동부간선수로가 있었다. 서부간선수로는 택지개발사업과 더불어 이제 부평구간은 일부 구간만 남았다. 김영자 할머니는 그 서부간선수로를 가운데 놓고 서쪽에 자리했던 평산신씨의 집성촌 후정리에 시집을 왔다. 동쪽은 현재 삼산1동 미래타운단지가 들어섰는데 당시 영성리라는 마을이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이 결혼할 때 양주군청 다니던 공무원이었고, 시아버지는 인천세관 공무원이었어요. 남편은 맏아들이라 결혼하면서 공무원을 그만두고 부모를 모시고 살기 위해 부평에서 다시 일을 했어요. 요즘세대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 땐 그게 당연하던 시절이에요. 그래도 시아버지는 서울에서 며느리가 부평으로 시집온다고 마당 한쪽에 우물을 파주셨어요. 나름의 며느리사랑을 위해 시아버지가 배려해주신 거죠."

 

후정리가 평산신씨의 집성촌인 데다 김영자 할머니가 시집 온 시아버지 고 신재철 선생의 집안은 후정리에서 제법 유명했다. 집안의 어른 신재철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시절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고 사랑채를 지닌 기와집에서 천석꾼은 아니지만 농사를 제법 짓기도 했다. 당연히 그만큼 일도 많고 잔치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맏며느리로 이 집에 왔을 때 시할머니에, 시동생까지 10명이 한집에 살던 신씨 집성촌이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는 한집 건너 4촌, 6촌, 8촌, 10촌 이런 식으로, 말 그대로 형제간이고 친척이었어요. 소는 안 잡았지만 돼지 같은 건 잡곤 했어요. 우물물 길어와 열 식구 해먹을 밥 하는 것도 힘든 데 큰일 한번 치르고 나면 힘든 건 말로 못해요."

 

한 끼니에 밥상만 세 개... "참을 줄 알고 희생할 줄 알아야"

 

어딜 가나 시집살이는 힘든 모양이다. 서울에서 나름의 신세대 여성이었던 김영자 할머니도 시골과 다름없는 이곳 삼산동으로 시집와서는 고생 꽤나 했다. 남편이 일터에 나가고 나면 채마밭 가꾸는 일부터 논일과 밭일까지 손에 익지 않은 일들을 해야 했다. 맏며느리다 보니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기에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도 그 만큼 적었다. 게다가 엄했던 시어머니 탓에 일하거나 장보러 가는 게 아니면 바깥출입도 쉽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까지 낳으니 식구가 몇이겠어요? 열사람 넘는 사람 밥해 먹이고 설거지 하는 게 한참이잖아요. 한 끼니에 밥상을 세 개씩 차려야 했어요. 그러면 시어머니가 꾸물거린다고 하고….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들에 일 나가고 또 하루가 가던 시집살이었답니다. 그래도 가끔 장보러 외출을 하는데 웬만한건 집에서 해결했기 때문에 장보러 갈 일은 별로 없었어요. 장을 보려면 부평시장에 가곤 했는데 예서 걸어가는 게 다반사였고, 버스를 타는 건 어쩌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어요."

 

김 할머니의 옛 이야기는 계속됐다.

 

"아이들에게 아쉬움이 커요. 제가 낳은 아이들이지만 저보다는 시할머니나 시아버지, 시어머니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었어요. 아이들로 보면 증조할머니까지 4대가 한집에 산 셈인데 제가 아이를 키운 시간보다 집안의 어른들이 키운 시간이 더 많아요. 왜 예전에는 고기 한 점이라도 어른 밥상에 먼저 올려놓잖아요. 우리 아이들에게 그러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아요. 하지만 아이들이 대가족에서 어른들과 자라 반듯하게 자랐답니다."

 

김영자 할머니는 효부상을 받을 정도로 집안 모든 어른들의 임종을 직접 지키고, 임종 직전까지 모든 병수발을 들었다. 대소변 받아내고 몸 씻기고 식사 챙겨드리는 일이 아낙네 혼자서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영자씨는 그것을 묵묵히 해냈다.

 

"글쎄요. 지금 그리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래도 할 것 같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불편하다고 금방 포기하고, 이혼 얘기도 금방 꺼내고 그러잖아요. 어느 가족이든 남남끼리 모이면 불편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그 불편함을 참을 줄도 알아야 하고,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서로 희생도 할 줄 알아야 해요. 희생한 만큼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후정리는 삼산두레농악의 본 고장, "이제는 남아 이 동네 지키고 파"

 

김영자 할머니는 이제 홀로 살고 있다. 집안어른들은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도 장성해 각자 가정을 꾸리고 산다. 이젠 주말마다 자식들이 손자와 손녀를 데려와 그를 반긴다.

 

스물일곱에 서울에서 시집온 그가 이제는 이 동네 노인회장을 맡을 정도로 어엿한 동네 터줏대감이 된 지 오래다.

 

김영자 할머니가 가장 애석해 하는 것 중 하나는 이웃 큰댁이 어엿한 기와집이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당시 정부의 세금정책으로 한옥을 가지고 있을 수 없게 되자 처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김 할머니는 "그때만 해도 한옥 귀하다며 관광객이 오곤 했어요. 지금도 사람들이 전통 한옥 체험하러 여러 지방으로 관광도 다니고 그러잖아요. 그 집이 지금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요. 그 때(집 허물 때)도 마을 사람들이 많이 아쉬워했는데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그런 정책에 아쉬움이 남아요"라고 전했다.

 

삼산동 후정리는 삼산두레농악의 본고장이다. 올해로 13회를 맞이한 부평풍물대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기원제가 해마다 김씨가 사는 삼산동(후정리)에서 열린다.

 

하지만 이 동네도 최근 재개발정비 사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다행히 이 동네엔 토박이인 평산신씨가 많아 재개발사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재개발이 되고나면 우리 같은 사람들 어디로 갑니까? 물론 극히 일부 다시 입주할 수 있다지만 한 평생 이웃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 나이에 또 어디 가서 그만한 이웃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어요? 분양가나 재입주율 등의 문제점은 언론을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마을공동체가 사라진다는 거예요. 그게 사라지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여생이 더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대대적으로 풍물축제를 진행하면서 그 원형이 남아있는 마을을 파괴한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게 아닌가요?"

 

대가족의 살림을 맡아 가족 공동체를 꾸려가던 서울새댁 맏며느리가 이제는 마을을 지키고자 나서고 있는 것. 워낙 김 할머니와 그 집안의 덕이 많아 김씨의 일을 돕는 마을 사람들이 많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 자식들더러 하는 말이 제 자랑 같아 머쓱하지만 '그 집 며느리가 어른들한테 잘해서 자식들이 그 덕을 본다'고 말해요. 다만 우리 아이들도 제가 집안 어른들에게 하는 것을 보고 자랐고, 아이들 역시 저 말고도 집안 어른들과 같이 자라다보니 반듯하게 성장하는 것 같아요. 남은 바람이 있다면 이 동네에서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붙은 이웃들과 오순도순 살고 싶어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30년 부평지킴이, #삼산동, #후정리, #김영자 할머니,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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