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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3년(1625년) 건립된 벽제관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일부가 헐렸고 한국전쟁 때 남아있던 건물 모두가 불타버리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 벽제관. 인조3년(1625년) 건립된 벽제관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일부가 헐렸고 한국전쟁 때 남아있던 건물 모두가 불타버리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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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신이 묵고 있는 벽제관을 찾은 김자점이 정명수를 불러내어 귓속말을 속삭였다.

"사신 둘에게 천육백 냥을 나누어 주고 공에게는 3천오백 냥을 내리라는 전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정명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씩이나…."

정명수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상사 남소이가 너스레를 떨었다.

"황제께서 천하를 얻어 북경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중대한 경사다. 국왕의 예로서는 의당 교외에 나와 우리를 맞이해야 할 터인데 병 때문에 행하지 않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다. 허나, 중신과 대신이 연이어 찾아와 병세를 말하므로 마지못하여 따른다."

청나라의 북경시대 개막

칙사가 세자와 함께 도성에 들어왔다. 내관들이 임금을 부축하고 나가 대궐 뜰에서 맞이하였다. 도승지 윤순지와 좌부승지 이행우가 칙서를 받들고 봉한 것을 뜯었다.

"짐이 중원을 평정하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은혜가 구주(九州)에 미쳐 온 천하가 기꺼이 추대하므로 조지(詔旨)를 반포하노라. 너의 조선은 천자의 교화를 입은 지 오래되어 이미 제후국의 반열에 들었으니 특별히 너그러운 은혜를 펴서 세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낸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도열한 대소신료들이 사배를 올렸다. 이어 조서가 반포되었다.

"전 황제에게 존시(尊謚)를 올려 '응천흥국홍흥창무관온인성효문황제(應天興國弘興彰武寬溫仁聖孝文皇帝)'라 하고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짐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소유하는 명호를 '대청(大淸)'이라 하고 연경에 도읍을 정했으며 연호를 '순치(順治)'라 하였다."

창경궁 양화당 편액
▲ 양화당 창경궁 양화당 편액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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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북경시대 개막을 조선에 통보한 것이다. 공식적인 영접행사가 끝나고 칙사는 모화관으로 돌아갔다. 내관들의 부축을 받고 있던 인조가 양화당으로 들어갔다. 세자와 세자빈이 뒤따라 들어갔다. 양화당으로 들어간 인조는 비스듬히 누워 침을 맞고 있었다.

"신, 이역에서 돌아와 문후 여쭈옵니다."

부왕 앞에 나란히 선 세자와 세자빈이 큰절을 올렸다. 침을 맞고 있는 부왕을 바라보는 소현은 가슴이 아팠다.

"머나먼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전하의 환후평복만 염원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이더냐?"
"청나라는 명나라를 이어받아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늦기 전에 배워야 할 것입니다."

"대포를 만들어야지, 과학을 배워 무에 쓴단 말이냐?"
"신식 총과 대포도 과학기술에서 나온다 하옵니다."
"기술은 장인들이나 배워야지, 사대부들이 배워야 할 학문이 아니지 않느냐?"

소현은 말문이 막혔다. 아담 샬로부터 받은 서양문명에 대한 충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현이 아담 샬로부터 선물 받은 천구의(天球儀)와 신력효식(新曆曉式)이라는 서적을 내놓았다.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

천구의에 시선을 멈춘 인조가 물었다.

"별자리를 살피는 기구입니다."
"별자리는 관천대에서 살피면 됐지, 괴이한 물건이구나."

당시 조정에서는 창경궁에 관천대를 설치하고 밤하늘을 관측했다.

"지평좌표와 적도좌표를 판독하여 계절에 따른 별자리의 변화를 살피는데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기구입니다."
"요망스런 물건이구나. 천시원의 제성이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아보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고성과 함께 침을 맞고 있던 인조가 벌떡 일어나 천구의를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힌 천구의가 산산이 부셔졌다.

네가 감히 천기를 누설하려드느냐?

고대 동양인들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3구역으로 분할하고 달을 기준으로 28수의 별자리를 구획했다. 이를 3원 28수라 한다. 자미원은 궁궐, 태미원은 신하들의 자리, 천시원은 신하들의 조회를 의미한다. 별자리에도 지상과 같은 세계가 있다고 믿었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중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남궁 진수(軫宿)의 네별을 면밀히 관찰하여 제왕의 운명을 발설하는 것을 천기누설이라 할 수 있다. 요망스러운 서양물건으로 '나 죽을 날을 알아보려 하느냐?'라는 것이다. 인조가 곡해한 것이다.

당시 첨단 과학은 천문이었다. 별자리의 운행을 보고 길흉을 예측하고 판단했다. '유성이 분묘성(墳墓星)에서 나와 하고성(河鼓星) 아래로 들어가고 형혹성(熒惑星)이 오래도록 동정성(東井星)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변괴중의 변괴로 호인(胡人)지역에 이상 징후가 있을 것이다'라고 예측한 홍경립이 병자호란을 당하여 성가를 올리기도 했다.

"전하! 옥체를 보존하소서."

서먹한 공기를 깨고 세자와 세자빈이 하직인사를 올렸다. 인조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소용 조씨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동궁으로 돌아온 세자와 세자빈은 황량한 동궁전에 가슴이 아렸다. 익위사 관원들이 묵던 관사는 아예 없애버렸고 여기저기 서까래가 내려앉고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서재의 책들도 어디로 갔는지 빈 서가가 주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왕벌들의 전쟁, 시작되다

고국에서 첫날밤, 소현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뒤척이던 소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별자리 관측기구를 집어 던지며 험악하게 굳어지던 부왕의 얼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주작성을 관측하여 나 죽을 날을 알아보려 하느냐?'는 듯이 노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부왕의 일그러진 얼굴. 섬뜩함을 느꼈다.

뒤척이는 소현 때문에 덩달아 잠이 깬 세자빈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하에게 하직 인사를 할 때,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소용 조씨의 시선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녀의 시선이 등 뒤로 넘어갈 때 싸한 느낌이었다. 궁궐 안주인은 중전이다. 서열상 자신이 그 다음이다. 격이 다른 후궁이 자신을 그렇게 노려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명부의 수장은 인조의 계비 조씨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고 대궐 경륜이 짧다. 내전을 장악한 소용 조씨의 위세에 눌려 조용히 보내고 있다. 소현의 생모 원비 한씨가 살아있을 때부터 궁에 들어와 인조의 총애를 받은 소용 조씨가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8년 만에 돌아온 세자빈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세자빈이 돌아왔다. 차세대 주자의 부인이다. 왕후가 될 사람이다. 후궁하고는 격이 다르다. 서른한 살 조소용보다도 세 살이나 연장자다. 아성을 내주지 않으려는 불꽃 튀는 접전이 시작된 것이다.

"부엉~ 부~엉."

응봉에서 울던 부엉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 왔다. 능선에서 먹이를 찾던 부엉이가 창덕궁 후원으로 내려 왔나 보다. 이 때, 부엉이소리와 함께 후궁전으로 들어가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으니 환관 김언겸이었다.


태그:#벽제관, #내명부, #착경궁, #응봉, #천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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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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