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평소에 어딜 가든지 간에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요즘 세상에서 그 일순위는 아마 휴대폰일 것이다. 하지만 휴대폰이 흔하지 않던 시절인 15년 전이라면 그 대상은 지갑이 될 가능성이 많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저녁에 일을 마칠 때까지 지갑이야말로 자신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 물건이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웃옷 안주머니 또는 가방 안에서 지갑은 늘 소유자와 함께 움직인다.

 

그리고 자주 만지게 되는 물건이기도 하다. 바깥에서 전철을 타거나 명함을 주고받을 때, 밥을 사먹을 때도 어쩔 수 없이 지갑을 꺼내게 된다.

 

휴대폰이 필수품이 된 요즘도 마찬가지다. 출근하면서 휴대폰을 깜박하는 경우는 있어도, 지갑을 잊고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지만, 주변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엿듣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갑이 아닐까.

 

미야베 미유키의 1992년 작품 <나는 지갑이다>의 주인공은 바로 지갑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지갑은 볼 수도 있고 사람의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대신에 말하지는 못한다. 지갑의 능력 범위 안에서 소유자의 말과 행동을 듣고 파악할 수 있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소유자에게 전달하지는 못한다. 물론 사람들은 지갑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생각하는 지갑

 

지갑이 웃옷 안주머니에 들어있을 때, 지갑은 자신의 이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 주변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어디인지 등을 파악한다. 소유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두 알 수 있다. 소유자의 심장박동을 들을 수도 있고, 당황하거나 흥분했을 때 그의 팔을 통해서 전달되는 미묘한 떨림도 느낄 수 있다.

 

반면에 집으로 돌아오면 문제가 달라진다. 소유자는 지갑을 옷에 넣은 채로, 옷을 옷장 안에 넣고 닫아 버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갑만 따로 빼서 서랍속에 넣고 닫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지갑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된다.

 

운이 안 좋은 지갑은 여러차례 여기저기 옮겨다닌다. 보통 지갑은 한 번 구입하면 낡을 때까지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부주의한 사람은 지갑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럴때 그 지갑은 다른 사람 손으로 옮겨져서 그 사람의 주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지갑은 그런 경우에 빨리 상황을 파악하려고 한다. 자신의 새로운 소유자가 어떤 사람인지, 직업은 무엇이고 가족관계는 어떻고 등을 알려고 한다. 물론 이런 것을 알아내더라도 지갑의 생활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단지 호기심 때문이다. 이런 호기심은 돈을 보관하고 꺼내는 지갑의 본질적인 기능과 관계있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바로 돈 때문에 발생하니까.

 

지갑의 눈으로 바라본 연쇄 살인사건

 

<나는 지갑이다>에서 터지는 살인사건도 돈이 그 동기인 것처럼 보인다. 어느날 한 남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뺑소니 사고다. 하지만 정황이 의심스럽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남자이고,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고 있다. 이럴 경우에는 우선 보험금 수령자인 그의 아내가 의심을 받게 된다.

 

이 이후에도 연달아서 다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을 추적하다 보니까 이 살인사건들이 모두 연관된 것 같은 의혹이 생긴다. 하나의 사건을 저지르고, 목격자를 없애기 위해서 계속 살인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지갑이 주인공인 만큼, 이 작품에서 화자는 지갑이다. 등장하는 지갑도 여러 명(?)이다. 형사의 지갑, 소년의 지갑, 목격자의 지갑, 탐정의 지갑, 죽은 자의 지갑 그리고 범인의 지갑까지. 개중에는 값비싼 가죽으로 만든 고급지갑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지갑도 있다. 돈을 두툼하게 넣고 다니는 지갑이 있는가 하면, 항상 얄팍한 지갑도 있다.

 

공통점은 이 지갑들이 하나같이 뛰어난 관찰자들이라는 것이다. 주머니에 들어있을 때가 많아서 주위를 둘러 볼수는 없지만, 많은 것들을 듣고 기억할 수는 있다. 지갑들은 모두 열심히 듣고 분석하고 생각한다.

 

지금의 살인사건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신의 소유자들은 지금 어떤 입장에 있는지 등.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개입시키기도 한다. 그럴때면 지갑은 마음속으로 강력하게 외치고 호소한다. 비록 그것이 사람들에게 들리지는 못하더라도.

 

무엇이 인간을 범죄에 빠지게 할까

 

<나는 지갑이다>는 미야베 미유키의 초기 작품이다. 화자를 지갑으로 정한 독특한 소설이자, 여러 개의 지갑이 가진 사연이 잘 맞물려 돌아가는 추리소설이기도 하다. 초기작이라서 그런지 여기에는 미야베 미유키의 이후 작품들에 나타나는 몇 가지 유형의 인간이 보인다.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서 터무니 없는 범죄를 구상하는 사람, 경찰을 혼란에 빠뜨리고 기뻐하는 범죄자, 사회와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애꿎은 타인을 폭행하는 사람, 자신의 모습을 오해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

 

이런 점은 지갑도 마찬가지다. 싸구려 합성수지로 만든 지갑이, 자신은 진짜 소가죽 제품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싸구려 지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인생도 별볼일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 그리고 남들도 자신을 그렇게 볼 거라는 두려움이다.

 

범죄자에게도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범죄를 행하는 것 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른다. 또는 자신이 타인을 해쳤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묘한 성취감과 우월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두려움은 인간을 잔인하게 만든다고 하던가. 범죄의 동기야 셀 수 없이 많겠지만, 그중 하나는 현실을 직시할때의 두려움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에서는 바로 이런 범죄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권일영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2007)


태그:#추리소설, #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