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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이 극장 안 스크린을 비춰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 서영화
관객들 좌석 뒤편 영사실에서 보내는 빛이 스크린을 비춘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관의 모든 불은 꺼진다. 깊은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곳, 그곳은 바로 영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영화를 보던 어느 날,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어둠 속에서 새어나오는 뿌연 빛 한 줄기가 시선을 끌었다. 동그란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유독 또렷하고 선명해서일까. 짙은 어스름이 내리깔린 어느 겨울밤, 바다 한가운데 솟아있는 등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처럼 영사기의 불빛은 은은했다.

▲ 영사실 외부. '관계자 외 출입금지'란 붉은 글씨가 유독 눈에 띤다.
ⓒ 서영화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신비한 빛에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저 뒤엔 누가 있을까? 영사기사님은 뭘 하고 계실까? 영화 <시네마천국>에 나오는 영사실처럼 생겼을까? 온갖 호기심이 머리를 자극했다.

드디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던 비밀의 공간에 들어섰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문 앞에 하얀 바탕에 쓰인 붉은 글씨에 지레 겁을 먹었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처럼 그곳은 은밀한 공간이었다.

'들어가도 되는 건가?' 잠시 주춤거리다 문을 살며시 열고 고개를 슬며시 들이밀었다. 안에서는 두 대의 영사기 앞 유리창을 통해 유경열(61) 영사기사가 극장 안 화면을 점검하고 있었다.

열여섯 소년, 영사실에 뛰어들다

▲ 영사실에서 유경열(61) 영사기사가 활짝 웃고 있다.
ⓒ 서영화
영사기와 함께한 시절도 올해 45년째. 유씨는 현재 광주 제일극장의 영사실장이다. 한참 친구들과 뛰놀며 학창시절을 즐길 나이인 열여섯 소년에게 60년대 초반은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었다. 영화를 좋아했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 영화 볼 기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5·16군사정변이 일어나고 62년엔 화폐개혁이 있었어요. 직업도 구하기 어렵고 여러모로 힘든 때였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격동했던 시절, 유씨에게 영화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영화관이 많지 않았는데…. 나도 저렇게 영화도 많이 보고 영사일도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그러던 차에 기회가 찾아왔다. 광주 제일극장에서 간판 그림을 그리던 형이 영사 일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한 것. "어린 시절부터 영사기사를 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 우연히 일을 배우겠냐고 해서 흔쾌히 승낙했어요."

하지만 겁 없이 어린 나이에 시작한 유씨에게 영사기사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매일 드넓은 영사실의 궂은일을 도맡아야했다. 들어가자마자 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 달리, 선임기사들은 청소와 심부름을 시켰다. 3층 영사실까지 양동이에 물을 담아 가져가는 것도 다반사였다고.

"당시만 해도 기술 배우려고 하면 힘들었어요. 일이 많았죠. 필름 갖다 주고 필름 감고, 또 밥알이 떨어져도 주워 먹을 정도로 깨끗하게 청소해야 했어요. 애써 퍼 올린 물로 선배들이 샤워할 때면 허무하기도 하고…."

그렇게 생활하며 1년이 지난 어느 날. 유씨는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까 망설였다. "17살 때니까 마음이 어려서 아직 인내나 세상 살아가는 법을 모르던 때였죠.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만둘까 고민했어요. 그러다 좀 더 참고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열심히 하자고 다시 다짐했어요. 마음정리를 하니까 그 후엔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지더군요."

힘든 시절을 회상하는 듯 유씨는 잠시 하던 말을 멈췄다. 창가를 바라보던 유씨의 눈이 어느 샌가 촉촉이 젖어있었다. 몇 분쯤 지났을까. 다시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내가 어리지만 생각을 잘 정리해서 실천했다는 게 참 대견해요." 아픈 시절 이야기를 괜히 꺼냈나하고 걱정하던 찰나, 뜻밖의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 영사기가 잘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유경열 영사기사.
ⓒ 서영화

▲ 유경열 영사기사가 영사실 유리창을 통해 극장 안 화면을 점검하고 있다.
ⓒ 서영화
물 한 바가지 부어도 '허허' 웃던 손님들

극장과 함께한 세월만큼 유씨에겐 추억의 영화도 많다. <십계>, <벤허>, <콰이강의 다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지금까지 유씨의 손을 거쳐 상영된 영화만도 5000편은 넘는다고 한다. 그 모든 영화들이 유씨에겐 졸업사진만큼이나 애틋하고 소중하다. "통계를 안 내봐서 모르겠지만 대략 그 정도 될 거에요. 어마어마한 숫자죠." (웃음)

과거의 극장은 어땠냐고 묻자 유씨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는 쇼도 많이 했다고 답했다. 당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진, 나훈아 같은 가수들을 비롯해 개그맨들의 쇼가 유행했다고 한다.

"일 년에 다섯 번 정도 그런 쇼가 있었는데, 만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관객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게다가 지금 같은 좌석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빨리 온 사람은 앉아서 보고 늦게 온 사람은 서서 보거나 좌석 사이사이에 앉아서 봐야했죠. 지금 그렇게 하라면 하겠어요? 허허."

▲ 영사기. 영사실에는 두 대의 영사기가 있다. 한 쪽 릴에 감긴 필름이 돌아가 영사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쪽 릴에서는 필름을 되감기한다.
ⓒ 서영화
그런 열띤 경쟁 때문에, 웃지 못 할 일도 생겼다.

"(영화관)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부터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데, 서로 빨리 들어가서 좋은 자리 잡으려고 싸우고 난리니까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손님들 좀 흩어지라고 물 한 바가지를 부었죠. 근데 물 맞고도 '허허'하고 웃고, 손님들 누구 하나 화내는 사람이 없었어요. 왜냐면 그 땐 삭막하지도 않고 정이 있던 때라…."


영화가 끝나면 종종 영사실에 몰려오는 관객들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엔 영사기가 신기하니까 어떻게 화면으로 필름이 나가는지 궁금해서 많이 몰려왔죠."

인터넷이 없던 때라 혹자는 유씨에게 무슨 영화가 재미있느냐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면 유씨는 어떤 영화가 좋을 거라고 서슴지 않고 말해줬다. 유씨는 관객과 오가는 대화가 없는 현재 극장 모습을 아쉬워했다.

낭만과 추억... 웃통 벗고 영화 틀고, 줄거리도 뒤죽박죽

과거에는 영사기를 전부 손으로 조작해야 했다. 하나의 릴(필름을 감는 틀)이 15분밖에 돌아가지 않았기에, 2시간 분량의 영화를 틀려면 8개의 릴이 필요했다. 지금은 하나의 릴에 한 시간씩, 두 개의 릴만 있으면 된다. 다음 영화 상영을 위해 필름을 되감는 것도 영사기사들의 몫. 지금은 전기로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일일이 손으로 감아야 했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만 해도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몰랐어요. 한 편 영화가 들어오면 릴에 꽂아서 1번, 2번, 3번하고 죽 나가서 8번까지 나누는데 1, 2번을 영사하고 나면 필름이 이어지도록 그 다음 번호로 끊임없이 바꿔줘야 했어요. 필름 떨어지고 나면 다시 세팅해서 영사해야 되니까 정신이 없죠."

당시 영사기 작동원리는 재래식 아궁이에 땔감을 때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영사기의 열 때문에 겨울에는 난로가 필요 없을 정도로 따뜻했지만 여름에는 찜질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한 관에 5명 정도의 영사기사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동 영사기이기에 보통 한 영사기사가 한 관을 맡고 있다.

"그 때가 70, 80년대였는데 너무 바빠서 어쩔 때는 땀이 뻘뻘 흘렀죠. 지금은 영사실에 에어컨이 나오니까 시원하지만 그땐 완전 화덕이었어요. 한번은 너무 더운 나머지 웃통을 벗고 반바지만 입고 한 적도 있죠. 그러다 손님들이 들어오면 '손님, 죄송합니다'하고 멋쩍게 웃으며 인사했죠, 허허."

지금의 나일론 필름과 달리 당시에는 영사기도 열악하고 필름도 잘 찢어졌다. 필름이 찢어져 영화가 중간에 끊기면 관객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빨리 하라고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살짝만 만져도 필름이 찢어지니까, 화장실 들어가는 장면은 나오는데 갑자기 그냥 (화장실에서) 나오는 장면이 뜨는 거죠. 필름이 잘려서 두 시간짜리 영화가 1시간 40분짜리가 돼버리기도 해요. 지금은 그렇게 나오면 난리 나죠. 한 번 딱 끊기면 나와서 환불해달라고 할걸요." (웃음)

실수한 적이 있냐고 묻자 유씨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계면쩍게 웃었다. "우리 배울 때, 영화가 두 시간 정도 돌아가는 데 몇 번 체인지를 했겠어요? 1번 필름 영사가 끝나면 2번을 넣어야하는데, 모르고 3번을 넣어버렸어요. 필름을 바꿔버린 거죠. (웃음) 영화가 뒤죽박죽됐죠."

그런 실수 때문인지 4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건만 유씨는 아직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 릴(필름 감는 틀). 과거에는 두 시간 분량의 영화에 릴 한 개당 15분씩해서 총 8개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두 개만 있으면 된다.
ⓒ 서영화

▲ 릴을 넣는 케이스. 과거에는 케이스 위에 1번부터 8번까지 쓰여있었지만 지금은 1번과 2번만 쓰여있다.
ⓒ 서영화
어둠속에서 빛을 만드는 '빛나는 조연'

"공짜로 영화 볼 수 있어 좋으시겠어요?" 부러운 마음에 물었으나, 유씨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볼 시간은 없어요. 매 회 화면이 흐트러져 있지는 않나,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조금씩 보죠. 그러다 5일 정도 지나면 한 영화의 줄거리가 짜깁기되는 거죠, 뭐. 허허."

아차! 그랬다. 유씨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한 극장의 영사기사였다.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매일 호흡하며 함께 울고 웃기 때문일까. 자신보다는 관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몸에 밴 유씨는 안전하게 양질의 화면과 사운드를 보내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입장료를 내고 왔으니까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관객들과 호흡하지 않으면 사고 나기 쉬운 일이에요. 관객들에게 베푸는 것이 영사기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의무이니만큼 앞으로도 최상의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힘차게 말하며 넉넉하게 미소 짓는 유씨에게서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단 한 번도 영사기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는 유경열 영사기사. 유씨는 항상 후배들에게 말한다. 최선을 다해야 후회가 없다고.

▲ 각 배급사에서 온 필름들이 쌓여있다. 유경열 영사기사가 필름을 보여주기 위해 꺼내고 있다.
ⓒ 서영화
인터뷰가 끝나고 유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유씨는 한동안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활동사진을 보는 것처럼 옛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네요. 근데 한 순간을 잡으라고 하면 못 잡겠어요. 많은 날들, 여기서 생긴 일들, 수없이 많네요."

유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인생의 수많은 책갈피가 이곳에서 이뤄졌기 때문일까. 극장에 대한 모든 기억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지금. 영사실, 관객, 영화. 이 모든 것들이 유씨에겐 이미 인생의 전부가 돼있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오래할 수 있는 방법은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거예요." 마지막 한 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그:#영사기사, #영사기, #영사실, #제일극장,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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