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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조금 다른 영화관이 있다. 영화가 상영될 스크린 옆에 작은 두 번째 스크린이 있고, 맨 앞 단상에는 마이크 든 사람이 서 있다. 그가 내뱉는 문장들도 독특하다.

"이곳 1관은 구역이 3개로 나뉘어 있고 가운데 구역은 한 줄당 9개의 좌석이 일렬로 배치돼 있습니다."

상영관의 생김새를 상세히 설명하거나, 화장실 가는 길을 걸음 수 하나하나 짚어준다. "화장실은 뒤쪽 출구로 나가셔서 19걸음 직진 후 우회전, 20걸음 직진 후 좌측에 있습니다." 그의 모든 말은 속기사가 빠르게 받아 적어 작은 스크린 위에 띄운다.

조금 다른 영화관에서는 조금 다른 영화가 상영된다. "선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지아를 바라본다. 이내 터덜터덜 걷는다." 등장인물이 짓는 표정과 행동을 묘사하는 음성이 들려온다. 화면에는 인물의 대사와 함께 '경쾌한 음악 소리', '빵빵거리는 경적' 등 소리 정보가 표기된다. 배우의 발음이 뭉개져 놓쳐버린 대사도, 눈물을 흘리느라 놓쳐버린 장면도 전부 보고 들을 수 있다.

그 어떤 장벽도 없는 영화관 
 
비장애인 감독, 시각장애인 방송인, 수어 통역사, 속기사 그리고 관객이 함께한 씨네토크
▲ 영화 "우리들"의 씨네토크 비장애인 감독, 시각장애인 방송인, 수어 통역사, 속기사 그리고 관객이 함께한 씨네토크
ⓒ 고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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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생소할 수 있는 영화관, 이곳은 '제12회 서울 배리어프리영화제' 현장이다. 이번 영화제는 11월 9일부터 13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와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에서 진행됐다. 배리어프리(barrier-free·장벽을 허무는) 영화는 화면을 설명하는 음성해설과 화자 및 대사, 소리 정보가 담긴 배리어프리 자막을 넣어 만든 영화이다. 시청각 장애인을 비롯해 어린이·노인·다문화 가정 등 모든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배리어프리 영화가 아니라면 시각장애인은 같은 관람비를 내고도 인물의 대사로만, 청각장애인은 화면 속 움직임으로만 영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현재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등에서는 '가치봄 상영'이라는 이름으로 배리어프리 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나 여전히 '배리어(barrier)'는 견고하다. 11월에 개봉한 국내 영화만 벌써 10편을 돌파했는데 11월 가치봄 상영 영화는 지난 9월에 개봉한 '정직한 후보 2', '인생은 아름다워' 단 2편에 불과하다.

상영 극장과 날짜도 제한적이다. 예컨대 11월 26일 토요일 '정직한 후보 2'를 보고 싶다면 전라도에 살고 있더라도 서울 CGV 피카디리 지점 혹은 충남 롯데시네마 아산터미널 지점에 찾아가야 한다. 오전 11시 반과 오전 10시, 단 한 번씩만 상영하니 늦었다가는 큰일이다. 시청각 장애인에게는 "저녁 때까지 시간이 남는데 극장에서 영화나 볼까?"라는 말이 그 무엇보다 어려운 말이다.

배리어프리 영화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사회적 기업 '배리어프리 영화위원회'는 2011년부터 매년 서울 배리어프리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11월 12일, 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김수정 대표이사는 "영화인들이 배리어프리 영화 제작 과정에 처음부터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배리어프리 영화에서는 인물의 대사와 화면 해설 음성이 겹치는 현상이 존재한다. 이때 대사의 음량을 줄일 것인지, 혹은 중요한 대사이니 화면 해설을 생략할 것인지 그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이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리어프리 영화위원회는 영화감독들을 대상으로 제작 교육을 진행하거나, 제작 과정에 함께하기도 한다. 이번 영화제에서도 배리어프리 영화위원회는 '소리 찾기', '가을이 여름에게' 등을 감독과 함께 제작했다.
 
11월 12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만난 배리어프리 영화위원회 김수정 대표 이사
▲ 배리어프리 영화위원회 김수정 대표 이사 11월 12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만난 배리어프리 영화위원회 김수정 대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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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대표이사는 "영화제에 참석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비율이 어떻게 되나"라는 질문에 "구분 짓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모두를 위한 행사인 만큼, 단 1명의 장애인 관람객이 있더라도 배리어프리 영화가 상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영화제를 기획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례로 영화 '우리들' 상영 후 진행된 씨네토크에서는 시각장애인 사회자(권순철씨)와 비장애인 영화감독(윤가은 감독)이 토크를 이끌어 나갔다. 그들의 옆에는 수어 통역사와 함께 대화를 적어 화면에 띄우는 속기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영화가 무료로 상영됐으며, 개막식을 찾은 관람객에게는 기념품으로 비건 쿠키를 나눠줬다.

이날 씨네토크 시각장애인 사회자이자, 관람객으로 참여한 권순철씨는 "가치봄 영화는 시간적·공간적 한계가 크기 때문에 영화 관람 시 주로 집에서 OTT 서비스를 이용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서울 배리어프리 영화제에 매년 참석하고 있다. 배리어프리 영화를 극장에서 몰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권씨는 "영화에 음성과 자막이 직접 등장하지 않더라도, 스마트 안경이나 화면 해설 수신기처럼 시청각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보조 기기가 영화관에 구비된다면 모두 함께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장애인 관람객 이예은, 전은솔씨는 이날 "배리어프리 영화를 처음 접했다"라며 "처음에는 화면 해설과 자막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냥 지나치기 쉬운 주인공의 미묘한 표정 변화까지 해설로 들을 수 있어 영화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도움이 많이 됐다"라고 말했다.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는 이들은 "이번 영화제를 계기로 향후 배리어프리 영화를 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라며 소회를 전하기도 했다.

영화관이 조금씩만 달라진다면
 
좌석의 생김새, 화장실과 비상구 위치 등을 설명하는 자원봉사자의 안내가 실시간으로 보이고 있다.
▲ 조금 다른 영화관 좌석의 생김새, 화장실과 비상구 위치 등을 설명하는 자원봉사자의 안내가 실시간으로 보이고 있다.
ⓒ 고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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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어프리 영화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김수정 대표이사는 "배리어프리 영화는 고령사회와 함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2021년 말 65세 이상 등록장애인 중 시청각 장애인이 34%를 차지한다. 2021년에 새로 등록된 장애인 중에서는 청각장애인이 약 33%로 가장 많았다.

김 대표이사는 "일본 규슈의 작은 지역, 사가현에서 열린 배리어프리 영화제에 초청받은 적이 있다. 극장이 아니라 현립 도서관에 있는 작은 상영관이었음에도 자막과 음성해설이 매우 잘 되어 있었다. 이미 초고령사회에 돌입한 일본은 배리어프리 영화 관람 문화에서 한 발 나아가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청각 장애인, 시력과 청력이 많이 안 좋아진 노인,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 장면과 소리만으로 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운 어린이. 이들은 현재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는 영화만으로 온전히 문화를 향유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금 다른' 서울 배리어프리영화제에서는 이들이 영화를 즐기는 게 가능했다. 비장애인은 영화 속 미장센들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를 즐기고 사랑하는 이들과 영화관에서 추억을 쌓는 이들이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조금 다르다면. 조금씩만 달라진다면.

덧붙이는 글 | 서울여자대학교 바롬 졸업 프로젝트 팀 <모두를 위한 영화관>의 기사입니다. 고나린(저널리즘 전공), 정세진(영어영문학과), 이화진(문헌정보학과), 장윤원(디지털영상 전공), 박제언(중어중문학과), 신희정(행정학과)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배리어프리 영화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 관람 문화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12월 2일에는 직접 '모두를 위한 상영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이 기사를 통해 배리어프리 영화에 관심이 생기신 분은 링크(https://forms.gle/SnVrCvMYXFiwPW7o6)를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그:#서울배리어프리영화제,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배리어프리영화, #배리어프리, #서울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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