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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전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의 발표를 보고 나는 이 사태가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과 반대진영에게 먹이는 한 방(!)이라고 생각하고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여야 3자회담을 보이콧할 것을 기대했다.

회담을 하기로 발표한 다음 날,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감찰 지시로 선전포고를 하는 식의 행패는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평화회담을 하자고 해놓고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한 북한군의 행태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야당 대표는 모름지기 이런 패악에 격렬하게 분노했어야 했고 그래서 회담 연기라도 선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마땅히 화를 내야 할 때 내지 않는 사람은 성인군자 소리는 들을지 몰라도 이 범속한 세상에서 제 대접 받으며 살기는 어렵다. 정치인과 정당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정치라는 게 무슨 고아(高雅)한 차원의 초월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정서에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하고 그들의 지지에 힘입어야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대중의 분노를 대변하기 위해서라도 화를 낼 때는 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정치가 아니라면 화를 내야 할 때 내지 않는 사람이 더 무섭게 여겨질 수도 있고, 길게 보면 그런 사람이 결국 승리하는 법이기도 하지만 단언컨대 정치는 그런 고차원적인 게임이 아니다.

회담에 나가서 할 소리를 하면 될 것 아니냐는 강행론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예측했던 대로 그 회담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게 국민을 현혹시킬 무대만을 제공해주었다. 야당의 소리는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언론 환경 탓도 있고, 야당의 분노가 적절한 언어와 형식으로 표출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당, 민주주의와 민생 부여잡고 '고난의 행군' 시작해야

그래서 추석 명절은 야당이 아니라 박근혜의 밥상이 되고 말았다. 결국 김한길 대표 식의 캐릭터로는 박근혜 시대의 야당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그는 제대로 화를 내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은 나와 무관한 일이고, 그 대선개입을 물타기하기 위해 저지르는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등 국정원의 끊임없는 정치공작은 적법한 임무수행이고, 정보기관의 대선개입을 불법으로 단죄코자 한 검찰총장을 욕보여 쫒아내고자 하는 짓은 공직기강 확립이라고 주장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절망감 속에 들으며 나는 어쩔 수 없이 박정희를 떠올렸다.

대선 전후 많은 야당 지지자들이 강력하게 퍼부었던 '그 아버지의 그 딸'이란 예단(豫斷)의 비난들을 일종의 연좌제라고 생각하며 그토록 부정하고자 했건만 이제는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예측이 되고 말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예측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던 나와 다수 국민들의 순진한 기대는 순식간에 배반당하고 있는 것이다.

기왕 이 나라 대통령이 그 아버지의 망령과 향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과거 유신시대의 사고방식으로 국민을 다스리려 한다는 것이 자명해진 이상, 그에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야당이 지난 25년 동안 덕지덕지 낀 군살과 허세를 빼고 나서 민주주의와 민생, 두 개의 깃발을 부여잡고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국민의 분노를 대신해서 제대로 화를 내는 방법부터 배울 일이다. 다행히 30~40년 전보다 국민들이 참 많이 지혜로워졌다. 최근의 연이은 시국선언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치인들보다도 더.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전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현 민주당 부산진갑지역위원회 위원장, 인본사회연구소 소장입니다.



태그:#박근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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