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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 안녕. 선생님이다. 공부는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묻는 것도 좀 미안하구나. 수능시험 40여일을 앞둔 교실의 너희들을 볼 때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너희들처럼 해 놓은 공부는 없는데 시험 날짜는 다가와서 덜컥 겁이나 방황했던 선생님 고3 가을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다 다른 모습들을 똑같은 모습으로 꿈꾸게 하는 입시 제도의 문제점에까지 생각이 미처 너희들이 더 안스럽게 보이기도 하지.

수많은 실패자들을 만들어내지 않고, 너희들의 노력이 온전하게 평가되는 따뜻하고 합리적인 제도와 정책은 없을까 생각도 해 보고. 그래도 작은 일에 기뻐하며 크게 웃을 줄 아는 너희 모습이 많은 위로가 된다. 계속 그 웃음 잃지 않기를 바란다.

시험 준비로 여유가 없는 너희들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선생님은 어제 가을 들어 계속 기다려온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을 보고 왔다. 그런데 영화 홈페이지에 들어가 예고편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기대를 크게 가진 터라 배우들의 푸근한 연기와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음악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감상이었다.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잖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실망감과는 별개로 이따금씩 영화의 장면 장면을 기억해 내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음악도 계속 듣고 있으니 영화의 분위기에 많이 취해 있나 보다.

배우 최민식은 이 영화를 두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하지 않은 영화라고 평했다. 한때는 멋들어진 음악가를 꿈꿨지만 현재는 변변한 직업도 없는 서른을 훨씬 넘긴 노총각 현우. 음악에 대한 자존심은 있어 세상에 날을 세워보지만 현실은 가혹해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매번 떨어지고 애인으로부터는 결혼한다는 통보를 듣는다.

그가 도피처처럼 찾은 강원도 탄광촌의 도계중학교 관악부 임시교사. 쇠락해 가는 탄광 마을처럼 무기력에 빠져 있는 관악부를 지도하면서, 조촐하지만 나름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현우는 자신의 삶에 작은 위안을 받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친 삶을 위무하듯 따뜻한 영상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그런 따뜻한 시선이 이 영화의 미덕이고, 선생님이 영화에 내내 취해 있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선생님은 영화를 보는 내내 꿈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그 꿈은 화려하고 빛나는 것이 아닌 쓰러지고 상처 받은 꿈이겠지. 그건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이야기고, 너희들의 이야기고, 매일 매일 만나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겠지. 그래서 더욱 진실하고 아름답다 할 수 있겠지. 연일 각종 매체를 장식하는 성공한 소수의 꿈보다는 그 꿈 앞에서 쓰러지지만, 다시 살아가는 이름 없는 다수의 소박한 꿈에 삶의 진정성은 더욱 많이 담겨 있을 거야.

선생님은 늘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꿈을 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꿈을 가르치고 얘기했냐고 묻는다면 정말 자신이 없어질 것 같다. 그건 선생님이 서투르고 게으르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교실에서 꿈을 이야기하고 가르치는 것이 온당한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세상에 너희들에게 꿈을 얘기한다는 것이 자칫 무거운 짐 하나 더 지우는 셈이 아닐까 조심스러워질 때가 많다. 세상은 왜 그리도 많은 리더와 인재, 경쟁의 승리자들, 앞서가는 자들을 원하고 꿈이란 것이 그들만이 갖는 소유물처럼 이야기되는지……. 혈기 왕성한 너희들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엔 이루어진 꿈보다는 쓰러진 꿈들이 더 아름답고 절실한 법이란다. 좌절은 수치요, 끝이라고 말들하지만 좌절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니.

영아, 선생님은 너희들이 늘 꿈꾸며 살았으면 한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는 말도 있잖니. 그런데 그 꿈이 너무 현실에 맞춘 똑같은 꿈 말고 세상에 대해 날선 자존심도 부려 보는 그런 꿈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더 부탁하자면, 꿈조차 꿀 수 없는 현실과 여건에 내몰려진 사람들, 꿈 앞에서 좌절한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삶의 진정성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그들의 꿈이 위로 받고 존중받을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다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다.

수능이 다가올수록 흔들리고 초조해지는 너희들 모습이 선생님 눈에도 종종 보인다. 선생님이기에 앞서 그만한 시절을 겪은 인생 선배로서 세상이 너희의 노력에 어떤 화답을 보낼지 걱정되기고 하고.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생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고, 주인공의 실패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니까. 이런 생각이 갖는 자신감은 때론 꽤 큰 힘을 발휘한다. 그저 편안히 갔으면 좋겠다.

매일 잔소리처럼 하는 얘기다만 찬바람에 건강 조심하고, 날마다 좋은 날로 맞기 바란다. 선생님이나 너희들이나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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