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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입니다. 11월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수도권입니다. [편집자말]
어느새 서울살이 17년째다. 인생의 반 가까이를 서울에서 살다 보니 처음에 느꼈던 서울의 아찔함과 신발 끈에 함께 묶고 다녔던 '긴장'은 발뒤꿈치로 내려놓고 익숙한듯 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아줌마의 '불금'을 책임지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1994>를 보며 낯설고 때론 막막하기까지 했던 서울살이 20년이 되살아나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추억에 잠시 젖곤 한다.

관련기사 : 세 아이의 엄마...'응사'에도 내 스무살이 있었다

여전히 낯설고 거대한 남의 동네 '서울'

안녕? 나의 20대
 안녕? 나의 20대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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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스무살에 서울 땅에 이불 깔고 자기 시작했으니 거의 서른여섯 인생의 절반을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 사람들은 '서울' 아닌 곳은 다 '시골'이라하던데 난 '서울사람'인 남편의 표현을 빌리면 시골 중에서도 시골, '깡촌' 출신이다.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산청'이라 답하면 열 명 중에 두어 명이나 알까? '지리산이 있는 곳'이라 해야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다.

그런 시골 산청읍내 사람들도 '촌'이라 부르는 내가 나고 자란 마을, 아직도 친정집이 그 자리 그대로 있는 '우리 동네'는 산청읍내에서 산 하나 끼고 돌고 강 건너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산골 마을 친정 동네는 몇 해 전부터 경호강 래프팅 열풍을 타고 펜션이 들어서기 시작해 겨우 아홉 집뿐이었던 나의 유년시절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내 아이들이 외가에 가 동네를 뛰어다니면 '누구네집 외손녀 누구 왔구나'하며 넉넉한 웃음을 건네는 '이우지'(경상도 말로 '이웃')가 낮은 담 사이로 있는 정겨운 곳이다. 이런 시골 동네에서 나고 자란 내게 서울은 '서울이 고향인 남자'를 '서울'에서 만나 '서울이 고향'인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낯설고 거대한 남의 동네다.

내가 기억하는 서울의 처음은 아홉 살 때 상 받으러 서부경남 곳곳의 초등학생들이 버스를 대절해 며칠간의 일정으로 왔을 때다. 그 전에 몇 차례 집안일로 온 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기억에 없다. 아홉 살, 처음으로 집을 떠나 한 학교 친구들도 아닌 낯선 언니 오빠들과 함께 마주했던 서울은 충격 그 자체였다.

크고 넓고 높은 서울
▲ 넓고 넓은 한강 크고 넓고 높은 서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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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충격적인 풍경 중 하나
▲ 서울의 야경 가장 충격적인 풍경 중 하나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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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서울의 첫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크고 넓고 높았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넘게 달렸는데도 여전히 서울인 것에 어린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더구나 한 시간 내내 차창 밖으로 빌딩만 보이는데 정말이지 아찔했다.

가도 가도 빌딩들만 늘어서 있던 아홉 살 눈에 각인된 서울의 기억은 스무살, 유학을 시작하며 터를 잡으며 상경했을 때도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자라면서 시골마을과 도시의 차이는 직간접적으로 겪어온 바 어릴 때처럼 크게 놀랄 것 없었지만 매일 산청 내리다리만 걸어서 건너다니다 지하철로 한강을 처음 건넜을 때 난 또 한 번 아홉 살 그때처럼 놀랐다. 한강은 내가 헤엄을 쳐서 건너기도 했던 경호강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하철을 타고도 꽤 오래 건너야 하는 한강은, 서울은, 그야말로 컸고, 넓었고, 그리고 길었다.

스무살, 드디어 서울 입성!

어떤 삶을 물려주어야 할까?
▲ '서울 아이'와 '깡촌 엄마' 어떤 삶을 물려주어야 할까?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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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크고 넓고 긴' 서울에서 둘도 아닌 나 하나 누워 잘 빈 방을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내게 허락된 서울의 방은 정릉의 한 사설 여대생 기숙사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진주에서 하숙을 했기에 내게 객지생활이 새로울 것 없었지만, 부모님껜 이젠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닌 스무살이 된 딸아이를 옆 동네 도시가 아닌 '서울'로 보내는 일이기에 무척 걱정이 많으셨다.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하고야마는 천방지축 나를 잘 아셨던 본당 신부님께서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간다는 소식에 '그렇다고 수녀가 되면 안 되지만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줄 거'라 하시며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기숙사를 부모님께 추천해주셨다. '스무살', '대학 1학년', 그리고 '서울'과 함께 할 '자유'와 '낭만', '모험'이 수녀원 높은 문에 갇히는 듯했지만, 촌놈들끼리만 모여 사는 기숙사라 하니 묘한 동질감이 들어 각기 다른 대학에 다니는 여대생 넷이 함께 쓰는 기숙사에 내 첫 서울 이부자리를 폈다.

서울살이 17년, 8번의 이사

1997년 당시 2번 버스 종점에 내려 가파른 언덕길을 등산하듯 올라가면 있었던 수녀원 기숙사에서 지낸 서울살이 첫해. 버스 종점만이 지니는 변두리 동네 특유의 분위기 속에 산비탈까지 빼곡하게 지붕을 맞대고 들어앉은 집들과 철거가 임박한 낡은 아파트가 있었던 나의 첫 서울 동네 정릉은 서울의 아찔함보다는 정겨움이 더 많았던 곳이다. 정릉에서 1년을 잘 보냈지만 엄격하게 정해져있는 통금시간과 사생활보장이 힘든 기숙사 생활이 답답해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자취라는 신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집구하기 대장정.

내 집은 어디에
▲ 서울의 중앙 내 집은 어디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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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부모님께선 목돈을 마련해 주셨고 난 입시공부보다 더 열심히 벼룩시장에 나온 '전세'코너에 밑줄을 그어가며 '빈 방'을 찾아 헤맸다. 서울살이 1년이라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미로 같은 지하철노선도를 보고 또 보며 학교에서 멀지 않은 동네를 정하고 이집 저집 빈방을 찾아 헤맸다. 고향의 부모님께서 땀으로 마련해주신 이천만원이라는 꽤 큰돈으로 구하는 방이었는데 서울 부동산 시장에서 이천만원은 어찌나 초라하던지.

학생 신분이라 월세를 감당하기 힘들어 전세로 알아봤던 집들은 대부분이 지하철역에 내려 한참을 걷거나, 마을버스를 다시 타고 들어간 골목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끝, 아니면 언덕 끝에서 겨우 찾은 작은 전셋집은 반지하 아니면 위태로운 철제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있는 허름한 옥탑방, 아니면 주인집 처마 끝에 덧대어져 있는 문간방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구하기 힘들었다. 다시 수녀원 기숙사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초라한 방이지만 포기하기엔 너무나 달콤한 유혹(자유와 낭만, 그리고 모험)이기에 반지하 방에 서울살이 두 번째 이불을 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서울살이 자취생활은 평균 2년에 한 번씩 동네를 옮겨 다니며 계속 되었다. 기숙사 시절의 정릉에서 시작해 첫 자취집이 있었던 방배동, 합정동, (잠시 유학을 다녀온 뒤) 다시 합정동, 옥수동에서 또 옥수동, 결혼과 함께 오류동, 그리고 지금의 강일동까지 서울의 곳곳을 전전하며 살고 있다.

파란만장 연애소설의 배경
▲ 옥수동 골목 파란만장 연애소설의 배경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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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종점 변두리 마을 정릉, 즐비한 술집 속에 천연덕스럽게 들어 앉아있던 방배동,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어쩜 그리 다를 수 있을까 싶었던 홍대와 합정동, 재개발에 밀려 하루아침에 몇 천 만원 뛰어버린 전세금에 밀려났지만 낯선 서울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한강의 야경을 볼 수 있었던 동네 옥수동, 남편의 직장이 인천이라 선택의 여지없이 서울의 서쪽 끝에 둥지를 틀었던 신혼집 오류동, 그리고 다시 남편의 이직으로 서울을 횡단해 이사 온 서울의 동쪽 끝 강일동.

서로 다른 얼굴이지만 내겐 모두가 '서울특별시'

변두리 동네의 정겨움, 번화가 뒷골목 반지하방의 또 다른 낭만, 젊음의 거리와 오래된 재래시장 사이의 절반의 안정, 달동네 쪽방이지만 밤이 되면 트리처럼 반짝이던 서울의 야경, 구로공단의 끝 서울의 가장 싼 땅값에 지어진 물류창고 너머로 보이던 매연 속에서 더욱 붉었던 노을, 허허벌판에 계획적으로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황량함. 아홉 번의 이사를 하며 내가 겪은 서울의 아홉 개의 동네는 제각각 서로 다른 얼굴이었지만 내겐 모두가 '서울특별시'였다.

잦은 이사로 지치기도 하고 대출을 받아서라도 내집을 마련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불안한 부동산 시장과 빠듯한 살림 속에 아직 '서울의 내집'은 먼 이야기이기만 하다. 그래도 자주 옮긴 이사 덕에 서울 사람보다 더 많이 서울의 골목, 언덕, 동네를 겪었고, 한때 '우리 동네'였던 곳이 아홉 개나 있다.

나의 신접살이
▲ 오류동 아파트 놀이터 나의 신접살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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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많은 만큼 아름다웠던 하늘
▲ 오류동의 노을 먼지가 많은 만큼 아름다웠던 하늘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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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과 이별한 슬픔에 버스 종점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 스무살의 내가, 처음으로 내가 쓴 희곡이 졸업작품으로 올라가는 희열에 밤을 새고도 긴 골목길을 뛰어갔던 내가, 반지하이지만 방 두 개로 집을 넓혀 커튼을 만들며 신이 났던 내가, 지금의 남편과 연애하며 파란만장 연애소설을 썼던 한강변의 내가,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며 고군분투하던 내가, 마흔을 준비하며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내가 모두 들어있는 서울. 이젠 더 이상 낯설기만 하지 않은 내 제2의 고향 서울.

아직도 낯선 동네 서울, 그러나 꿈꾸는 '마을의 귀환'

이곳은 오류동보다는 아이들 키우기 조금 더 나은 곳이다.
▲ 서울 강동구의 가을 이곳은 오류동보다는 아이들 키우기 조금 더 나은 곳이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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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낯설고 마음 터놓을 이웃이 귀하고 아이 키우기 참 힘든 서울이다. 아이 혼자 놀이터에 내보내지 못하는 불안한 서울이기에 어릴 적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하루 종일 놀다 배고프면 아무 집이나, 아무 논에나 들어가 밥을, 새참을 얻어먹었던 내 유년의 동네가 더욱 그립고 절실하기만 하다. 그러나 남편의 직장이 서울에 있는 한 서울이 고향인 내 아이 셋을 서울에서 키워야 한다.

그렇다고 계속 놀이터에서 아이들 보초를 서며 시간을 보낼 순 없는 일. '결핍'은 '욕망'을 만든다 했던가! '아이 하나 키우는데 필요하다는 하나의 마을'이 사라진 서울에서 나를 꿈꾸고 자라게 해주었던 고향 동네의 '마을공동체'를 만들며 나의 아홉 번째 서울, 내 아이들의 두 번째 서울 동네를 보다 정겹게 만들어가려 한다. 비록 세입자들이 절반인 정붙이기 힘든 동네이지만 모두가 타향살이, 떠도는 마음들이지만 함께 아이들을 키우며 아이 키우듯 마을도 만들고 키워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제 아무리 거대한 도시 서울이라 하지만 결국 이 서울도 이렇고 저런 작은 동네들이 어깨를 맞대고 살 부비며 서로의 하루를 살아내며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니까.

그 첫 번째 노력으로 동네 엄마들끼리 마음을 맞춰가며 '부모협동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만들기 위해 매일같이 만나고 있다. 좌충우돌 공동육아 이야기는 뜨문뜨문 이어가고 있는 '그 엄마 육아 그 아빠 일기' 를 통해 이어갈 예정이다. 서울살이 17년째, 더 이상 촌놈 이방인으로 지하철노선도에 코를 박고 헤매지 않기 위해 '제2의 고향'땅 서울에 '마을의 귀환'을 꿈꾸며 오늘도 '파이팅' 한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다
▲ 마을을 꿈꾼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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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응답하라1994,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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